우리는 빈센트 반 고흐, 클로드 모네와 같은 인상파 화가의 작품들에 열광하고 피카소의 큐비즘과 렘브란트의 키아로스쿠로, 구스타프 클림트의 찬란한 황금칠에 극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정작 우리 전통의 풍속화와 화가들을 외면한다. 그리스로마신화에서 가져다 쓰는 온갖 이미지와 지성들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전쟁에 임하는 충무공 이순신이 치우 신에게 기도하는 장면이 세 차례나 언급된 난중일기를 모르고, 단원 김홍도의 병풍 군선도에 불멸의 여신 서왕모가 등장하는 연유에 무심하게 살아간다. 왜 남의 떡만 커 보이는 것일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가 누구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단원 김홍도’라고 답할 것이다. 특히 삼성미술관 리움에 꼭꼭 숨어있는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명작이다. 왜색 짙은 일본식 비단 족자 표구는 애처롭지만 화폭을 잔뜩 긴장 시키는 위풍당당 조선호랑이의 기운이 압도적이다. 찢어질 듯 입을 크게 벌려 으르렁거리는 일본풍의 맹호가 아니라 소나무 아래로 날렵하게 S라인을 그리며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머리를 내리 깔고 무엇인가 속 깊은 표정으로 말을 거는 우리 할아버지를 만난 것 같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동공은 가을 햇살 아래 바짝 졸아들었고, 왼쪽 끝 흰 자위를 살짝 드러내며 미묘하게 기울어진 시선에 촉촉함이 묻어있다. 두툼하고 수북한 하얀 눈썹은 가운데 몇 가닥이 뻣뻣하게 솟구쳐 매섭고, 작지만 당찬 귀가 날카롭게 솟아 예리한 청각을 증거하며, 기다란 코와 꼭 다문 입술이 근엄하다. 전진하는 힘찬 기운이 느껴지는 흰 수염에서 화룡점정의 미학이 느껴진다. 이 책의 개정판이 맹호의 앞발과 어깨를 드러내느라 줌아웃 되어 아쉽지만, 초판본은 작가의 뜻에 따라 원본의 호랑이 얼굴 크기 그대로 표지를 가득 채웠었다.

“이 호랑이 그림 좀 보십시오. 좀 전까지 보신 그림은 사실 그림에 대한 안목이 꽤 높아진 후에나 감상할 수 있는 그림이었습니다만, 이 그림은 누가 봐도 정말 엄청나게 잘 그렸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죠. 정말 잘 그리지 않았습니까? 단언하지만 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호랑이 그림이 분명합니다! 국보 지정은 되어 있지 않지만······ 이 작품은 당연히 국보급인데, 그것도 그냥 국보급이 아니라 이를테면 초국보급 작품입니다. 이게 사실은 1m도 안 되는 작은 그림이거든요. 그런데도 보는 이를 압도하는 기세가 화폭에 충만합니다.” - 117쪽

오주석 선생은 단원의 후원자였던 정조의 융건릉 인근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동양사학과 고고미술사학을 전공했으며, 옛 그림과 문집들을 통해 작품을 이해하는 고리를 찾는데 열중했던 집념의 미술사학자다. 10년 넘게 공부한 주역과 동양고전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융합적인 사고는 옛 그림 속으로 깊이 들어가 그 시대에 머물다 돌아오는 열정의 세월들을 지탱했다. 특히 ‘오주석으로 인해 김홍도가 호사를 누렸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단원에 탁월한 애정을 보였다. 두 사람은 이백 년의 세월 차에도 불구하고 예술에 열정과 기질이 비슷해서 천상의 벗이 되었으리라.

열정은 혼자만으로 채울 수 없었다. 아주대학교 피부과 이성낙 교수의 자문을 받아 이재의 초상화가 사실은 그의 손자 이채의 초상화임을 밝힌 것을 시작으로 선생은 늘 배움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한국야생호랑이연구소 임순남 소장을 찾아가 ‘송하맹호도’의 주인공이 부모로부터 막 독립생활을 시작한 청년 범이라는 분석을 이끌어냈다. 호랑이는 세 살쯤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다섯 살이면 어른이 되는데, 이파리 두 개의 적송 줄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발톱으로 긁어 낸 자국이 이제 막 영역표시를 하는 생태적으로 네 살짜리 조선호랑이의 전형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오주석 선생은 단원 혼자만의 작품이 아니라 도송 이인문이 소나무와 전체 구도를 조언하지 않았을까 추측했다. 좌측 하단에 단원의 자 사능(士能)이 새겨져 있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오른쪽 상단에 어색하게 새겨진 가짜 서명 표암(豹菴)을 발견하고 누군가의 악의를 개탄했다. 조작에 이용당한 표암 강세황은 예조판서 강현의 막내아들로 자신의 큰형이 과거에서 부정을 저지르는 바람에 당시 관행에 따라 벼슬길에 나서지 못한 사연 많은 분이다. 영조 21년(1745년), 서른두 살에 경기도 안산 처가로 낙향해 시서화와 거문고에 마음 붙이며 재야의 선비로 보냈다.

영조 50년, 그의 재능을 아깝게 생각한 임금의 배려로 61세에 처음 벼슬을 하였으나, 정조 3년(1779년) 66세 때는 당당히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하여 당당하게 공직에 나섰다. 식견과 안목이 뛰어난 사대부 화가로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고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법을 수용하는 데도 공헌한 거물이다. 표암이 안산에 정착하던 해에 평범한 중인의 가정에서 태어난 김홍도는 7~8세 무렵부터 표암의 집에 드나들며 그림을 배웠는데, 사제의 인연은 직장의 상하 관계로, 나중에는 예술적 동지로 정조 15년(1791년)까지 평생을 이어간다.

청출어람 청어람. 김홍도의 아호 단원(檀園)은 그가 흠모했던 명나라 화가 이유방의 것을 빌려온 것인데, 200년 뒤 안산시 단원구라는 지명으로 부활하였다. 해마다 시월이면 전국 규모의 단원미술제가 단원미술관과 단원조각공원에서 개최된다는 사실도 예술혼이 살아 숨 쉬는 문화예술의 도시로서 단원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단원 연구에 일생을 바친 미술사학자 오주석 선생이 타계하던 2005년에 개교한 길지 않은 역사의 단원고등학교도 세월호합동분향소가 있는 화랑유원지 단원각 맞은편에 있어 크고 작은 사연의 뿌리가 되고 있다.

오주석 선생은 우리 그림에 은근히 녹아있는 왜색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으며 겨레의 회화사를 바로 잡아, 옛 그림에 담겨 있는 역사, 문화,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집대성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강연활동을 했다. 이 책은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이던 무렵에 속기사가 받아 적은 강연 초고를 바탕으로 완성된 것으로 독자가 마치 강의실에서 선생을 마주하는 기분이 들게 한다. 선생의 낭랑하고 맑은 목소리가 잔잔한 미소와 그대로 녹아 있다. 청중들과 호흡하듯 진행되는 특징이 있어 질문하고 답하며 그림과 예술을 논하는 분위기가 참으로 편안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인 보물 527호 ‘단원풍속도첩’은 총 25점의 풍속화로 구성된 겨우 공책만한 크기의 그림책자다. 단원의 '씨름'을 설명하는 선생은 마치 스포츠 경기를 흥미진진하게 생중계하는 해설자처럼 빛났다. 200년 전 작품들을 심도 깊게 해설하여 시이불견(視而不見)과 청이불문(聽而不聞)의 교훈을 이야기한다. 아주 작은 크기의 원본 그림을 스캔하여 화면 가득 확대하여 가리키며 각각 등장인물의 표정과 몸짓, 옷매무시를 통해 신분이나 나이, 성격, 직업 등을 그럴싸하게 분석한 것은 하나의 교본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등장하는 사람은 모두 22명인데 오른편 위쪽의 중년 사나이를 보세요. 입을 헤 벌리고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재미있으니까 윗몸이 앞으로 쏠렸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두 손이 땅에 닿았습니다. 그 옆에 있는 총각은? 아니, 상투를 틀었군요! 총각이 아닙니다! 수염도 안 난 모양새를 보면 요즘으로 치면 고등학교 1학년이나 2학년 밖에 안 되어 보이지만 장가를 들었어요. 그런데 팔베개를 하고 하고 누웠습니다. 아니, 씨름판에 오자마자 팔베개를 하고 눕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 이거 씨름판이 한참 진행돼서 이제 거의 막바지에 가까운가 보다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재미는 있지만 몸이 고단해 누운 거지요. 시간의 경과를 보여줍니다.” -36쪽

인물이 아래보다 위에 더 많은 가분수형 그림이 역동적이다. 무조건 앞이 진하고 뒤가 흐리게 그려지는 서양화와 달리 뒷사람을 오히려 더 진하게 그려 작은 그림 속에서도 배려와 통일감이 있고, 철저하게 원근감을 무시했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다. 멀리 숨겨진 소년들의 표정과 명확한 자세를 통해 참으로 예의범절이 반듯했다는 평가는 그 시절 세시풍속과 사회 분위기를 파고든다. 관람객 중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왼쪽 상단의 인물평은 갓도 삐딱하게 쓴 모양이 하여간 성격도 소심하고 영 시원치 않아 그런 사람을 사위 삼아서는 안 된다는 농담으로 정겹다.

승부가 결정 나는 순간을 포착하여 들배지기로 쓰러져 나가는 사람의 벗어 놓은 신발이라든지, 패배자의 넘어지는 방향, 씨름꾼들 허리에 샅바가 없는 것을 지적하며 지금은 전승되지 않는 수도권 전통의 ‘바씨름’임을 추론한다. 공간적 배경에 이어 부채를 든 인물을 통해 단오절 즈음이라는 시간적 공간도 유추해 낸다. 어려운 글씨가 하나 없는 점이나 승리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의 신분을 통해 양반이 아닌 서민들 중심의 그림이라는 해설 과정은 숨겨진 손모양의 비밀까지 한 편의 추리 영화를 감상하는 듯 짜릿하다.

단원 풍속화 속 상당수 등장인물의 어색한 손 모양 찾는 재미도 즐겁다. 숨은그림찾기인 양 일부러 그렇게 처리했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지만 우리문화의 자긍심을 강조해온 선생의 국수주의를 한번쯤 의심해 볼 수도 있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선생은 미켈란젤로나 로댕의 실력에 비해 우리는 손 그리기에 매우 소질이 없는 민족이었음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넘어 간다. 정조 임금으로부터 부채를 하사받은 채제공의 초상화에서 평생 손 그리기에 자신 없었던 화가 이명기가 쩔쩔맨 흔적이 가득함을 해설할 때 청중의 감탄 소리가 들려오는 책이다.

수도권 최남단의 신도시에 살다보니 융건릉과 용주사 산책을 자주 누린다.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화는 김홍도, 이명기 등 여럿이 공동 작업한 것으로 유명한 작품인데, 오주석 선생의 책을 읽은 이후로 탱화의 손부터 감상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 어색한 손 모양에서 인간미를 느끼는 즐거움이라고나 할까. 그러다 문득 화려하고 아름다운 김은호 화백의 논개, 충무공초상화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면 정체성도 없이 미화된 작품들에 분노하는 선생의 감정이 느껴진다. 참된 것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던 겨레의 얼이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손을 거치면서 훼손되어버린 것이다.

영·정조의 시대를 살다간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의 작품이 많은 이야기를 불러낸다. 정조의 신분상승 정책도 작품 곳곳에 녹아 있어 문화예술이 가장 꽃피던 시대를 보여준다. 선생은 옛 사람의 눈과 마음으로 그림을 봐야 하는 원칙을 강조했다. 내용을 의식하면서 자세히 뜯어 볼 것과 많이 보고 자주 보고 오래 두고 보면서 작품의 됨됨이를 생각하라 하셨다. 작품의 크기에 따라 거리를 맞추면서 본다든지, 우리 고유의 옛 글과 그림의 구조에 맞게 시선을 우측 상단에서 좌측하단으로 이동하며 봐야하는 서양과 다른 원칙도 말씀하셨다.

“이 여인의 눈빛을 자세히 뜯어보십시오. 이 앞에 누군가 남정네가 앉아 있는 것처럼 보입니까? 분명 여인이 옷을 벗기는 벗는 모습이지요. 옷을 입는 모양일수도 있다고요? 하지만 아래 치마끈 매듭이 풀려 느슨해진 것을 보십시오. 하루 일이 끝난 고단한 몸을 우선 치마끈 매듭부터 풀러 숨쉬게 해놓고 이제 막 저고리도 마저 벗으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옷고름을 풀때는 이렇게 한 손으로 노리개를 꼭 붙들고 끈을 끌러야 아래로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위에 남자가 없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요? 남자는커녕 아무도 없는 게 분명합니다. 이 꿈 꾸는 듯한 눈매를 보세요! 이런 맑은 표정이 남 앞에서 나오겠습니까? 그러니까 제 생각에는 신윤복이 저 홀로 지극히 사모했던 기생을 그린 것 같습니다.” - 209쪽

신윤복의 ‘미인도’ 해설에서는 힘찬 목소리가 느껴졌다. 조촐하고 해맑은 인상에, 층층이 색이 다른 속옷의 옅은 옥색 치마 아래로 은은하게 비추는 모습은 조선 후기 여인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기생 조합이 결성되고, 일패, 이패, 삼패라는 식으로 기생들의 등급이 있었는데, 가령 이패 기생이 길을 가다가 일패 기생을 만나면 스스로 양산을 접고 일패 기생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가는 예를 갖췄다고 한다. 나라가 망해도 유지되는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혜원과 같은 신분 낮은 화가가 꽤나 지체 높은 기생을 어떻게 상대했을까?

그저 에로틱한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비단 채색의 그림 한 장에서 많은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선생의 설명은 흥미롭다. 좌측 상단 붓글씨 반박흉중만화춘 필단능여물전신(盤礴胸中萬花春 筆端能與物傳神)을 ‘이 조그만 가슴에 서리고 서려 있는, 여인의 봄볕 같은 정을 붓끝으로 어떻게 그 마음까지 고스란히 옮겨 놓았느뇨?’로 해석하고, 그림 속 미인의 꿈꾸는 듯한 눈매를 분석하며 홀로 있는 여인의 모습임을 추리하는 선생의 심미안은 그녀가 혜원이 흠모했던 일류기생임을 확신하고 있다. 짝사랑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에 감히 반박을 못하겠다.

성북동 간송미술관에 소장 중인 ‘미인도’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보다 자유롭게 볼 수 있게 된 것 만큼 우리도 더 잘 준비된 것일까? 선생은 역사의 왜곡과 허무맹랑하게 꾸며내는 이야기꾼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했지만, 선생의 연구를 기반으로 창작된 ‘바람의 화원’과 같은 팩션의 드라마가 트레이시 슈발리에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그림 ‘진주 귀고리 소녀’를 소재로 한 상상력을 압도했다. 옛 그림들을 소재로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와 추리를 엮어 내는 것이 진정한 문화융성의 길이라 믿는다. 그것이 우리가 오주석을 넘어서는 일이 아닐까?

이순신 종가에서 현충사 현판을 박정희 대통령 글씨에서 원래의 숙종이 사액 현판으로 원상복구하는 일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진 않았으나 조상들의 예술 세계에 보다 자부심을 갖고 살아갈 때가 온 것 같다. 문화는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보람, 특히 지금 이 땅에 사는 이유, 그리고 우리가 우리인 까닭, 바로 정체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햇살 좋은 가을날, 그림 책 한 권 들고 박물관으로, 미술관으로, 고궁으로 어깨를 펴고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싶다. 당신과 함께, 오주석과 함께...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사교적인 생활인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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