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인도북부 칸푸르라는 도시를 방문한 적이 있다. 가끔씩 장을 봐서 식사를 준비하곤 했는 데 숙소로부터 약 200미터 남짓한 거리에 있는 시장까지 걸어가는 시간이 내게는 큰 고역이었다. 비포장의 진흙길을 따라 광우병에 걸린 개들과 소들을 피해가야 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지만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모호한 시선들(참고로 인도 사람들은 별로 하는 일 없이 집 앞에 주로 나와 앉아 있다)을 견디기는 매우 힘들었다. 당시 칸푸르에 있는 유일한 동양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와 같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인도인들 눈에 내가 어떻게 비춰졌을지는 상상이 될 정도다. 동물원의 원숭이, 아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칸푸르에서는 인도 근현대작가들을 공부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많은 작가들은 삶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더불어 해답을 찾으려는 일련의 작업에 매진해 왔고 궁극적으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실재와 이미지, 진실과 허구에 관한 담론을 작품으로 표현하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특히 이미지 이면의 세계를 탐구하는 알와 발라(Alwar Balasubramaniam)(2009)의 작품은 내게 신선한 충격과 더불어 현실적으로 시장 보는 불편함을 크게 덜어 주었다. 항상 이미지에 익숙해있던 나의 삶은 오히려 이미지와 실재를 구분 못하고 나의 이미지를 통해 그들이 나의 실재를 알 것이라는 판단하여 늘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운 시장보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타자의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나라고 규정하면서 실재와 이미지 사이에서 길을 잃고 살아왔던 셈이다.

Alwar Balasubramaniam, Untitled (Self in Progress), Mixed media, 2009
Alwar Balasubramaniam, Untitled (Self in Progress), Mixed media, 2009

모든 가시적인 이미지는 대상의 일면으로 한낱 환영적인 효과에 불과하다. 모든 대상은 그 이면에 이질성, 일탈성, 부정성 등 비가시적인 본성을 숨기고 이중적 혹은 다중적인 특성으로 중첩되어 있다. 이미지 이면의 ‘실재’에 대한 탐구는 본질적인 세계를 인식하고 타인과 더불어 그 세계 속에서 공존하려는 당연한 진리추구와 결부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실재에 대한 감각영역을 확장시키기 위해 이미 ‘의미’로 인식되는 피상적인 이미지를 의식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사색을 통한 내면세계의 진지한 성찰이 요구된다. 선입견과 편견을 깨고 비로소 드러나는 우리의 머리와 가슴 속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적인 세계가 감각적 현실의 베일을 걷고 표면 위로 자기 자신을 밀어 올리는 과정인 것이다.

김창겸의 작업은 미술에 있어서의 재현의 문제, 즉 실재와 이미지와의 관계에 대한 탐구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실체에 대한 이해가 이미지에 의해 대체된 탓에 조각을 포기했다’는 작가의 말은 ‘이미지가 실재를 감추고 변질시키며 이후 실재의 부재마저 감춘다’고 해석한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를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이미지에 대한 강한 회의는 작가 작업에서 기본적 토대를 이루면서 작품 속에서 개념적이고도 서정적인 독특한 분위기로 표현된다. 디지털 기술에 의해 현실 공간은 예술적인 세계로 재배치되어 우리에게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며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주문한다. 김창겸의 작업은 직접 제작한 오브제 위에 영상을 투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오브제(물질) 위에 투사된 영상(비물질)은 실재와 이미지,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작가는 우리가 다양한 매체로부터 학습한 이미지에 대한 허구성을 진실과 거짓의 이분법적인 구조로서 설명한다.

이탈리아어로 ‘정물(Natura Morta)'은 ’죽은 자연‘, 즉 조용한 생명 또는 움직이지 않는 생명을 뜻한다. 영어로는 ‘정지된 삶(still life)’이다. 김창겸의 작업에서 석고 오브제는 사물의 주검, 즉 죽은 사물을 뜻하는 ‘정물’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장 보드리야르가 그림자를 뜻하는 이미지(image)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시뮬라크룸(simulacrum)은 사실상 유령을 의미한다. 이렇듯 이미지는 진작부터 허구와 환영 그리고 귀신 등의 실재하지 않은 것들과 긴밀하게 연관되며, 죽음과 관련한 영적 세계와 맥락을 같이 한다. 미술을 포함한 예술의 역사는 실재와 허구 사이에서 이들의 본질에 대한 정의와 실재에 접근하기 위해 추론가능한 세계를 탐색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작가는 이탈리아 유학시절 형이상학파(Pittura Metafisica)의 대표적인 작가인 조르조 모란디(Giorgio Morandi)의 정물화에 크게 영감을 받아 정물이 의미하는 ‘죽은 자연’에서 과거의 기억이 남겨진 채 시간이 정지된 상황을 발견하고, 사진과 영상 등으로 ‘부재의 기억’을 환기하게 된다. 고전주의의 전형적인 표현인 ‘죽은 자연’은 작가에게 있어 마치 미토스(mythos)처럼 유연성을 발휘하여 진부한 이념을 벗어나 새로운 은유로서 예술적 진리에 도달하게 하는 개념으로 작동하였다. 죽은 사물로서의 오브제이지만 작가는 그 표면에 투영되는 영상을 통해 유희와 환타지를 부여함으로써 죽은 사물에 새 생명을 불어 넣는다. 작품 'Still Life' (2011)에서 그가 모란디의 정물처럼 유사하게 배치한 석고 오브제는 다양한 색채로 변화하다가 점점 색채가 옅어지면서 결국 모든 색은 사라져 버리게 된다. 이 작품에는 우리를 현혹하는 현란한 이미지이지만 실재의 부재를 암시하는 역설이 담겨 있다. 그에 따르면 이미지가 화려할수록 대상의 실재는 더욱 유령같이 변한다는 것이다.

김창겸, Still Life, 동영상, 5분45초, 2011
김창겸, Still Life, 동영상, 5분45초, 2011

작가의 작업들은 이미지와 실재라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개념을 가장 이상적이면서 조화롭게 공존시키고자 하는 일련의 노력으로 궁극적으로는 실재의 진정성을 드러내고자 함이 목적이다. 이와 더불어 그의 작업이 지니는 서정적인, 그리고 자전적인 요소는 정서적 공감과 함께 감정이입을 가져온다. 대표적인 예로서 작가 안창홍과 함께 작업한 시간여행을 통한 자기성찰적 작업인 '나비와 사람'(2012)을 들 수 있다. 작가의 작업은 과거의 추억과 이야기들을 그대로 안고 가는 디지털이지만 아나로그적 감성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작가에게 있어 실재는 자신의 행동과 사고에 끊임없이 작동하는 지나온 삶의 흔적들과 분리하기 힘들다. 그는 시간의 흐름이나 기억을 환기시킴으로서 불가능한 실재에 좀 더 가까이 가려 한다. 만약 대상이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더욱이 인간이라면, 아니 자신의 가족이라면 현재의 자신과 분리될 수없는 실재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김창겸, 나비와 사람 ,동영상, 4분45초 2012
김창겸, 나비와 사람 ,동영상, 4분45초 2012

작가가 이와 같이 작가적 정신을 쏟아 부어 찾고자 한 실재는 무엇일까? 작가에게 있어 ‘죽은 자연’은 더 이상 삶과 분리되지 않은 실체임에 분명하다. 죽은 정적인 이미지가 살아있는 동적인 실재로서 구현되는 과정이 바로 작가 김창겸이 정신적으로 체험하는 유토피아가 아닐까 생각한다.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이미지들을 통해 작가는 '꽃잎 조각(花片)'이 넘실거리는 유토피아를 창조했다. 작가가 인도여행에서 경험했던 화려한 색과 정교한 문양, 사람과 동물이 조화롭게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에서 받은 영감이 작품으로 연결된 감각적인 가상의 세계를 표현한 'Garden-Journey' (2012) 시리즈가 바로 그것이다. 작가는 “가난하고 고단하지만 나 혼자만의 유토피아가 아닌 타자와 함께 공생하는 세계, 나는 그 곳에서 또 다른 유토피아를 보았다.”고 말했다. 내가 인도 칸푸르에 머무는 동안 감히 상상하지도 못한 환상적인 세계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창겸, Garden Journey#6, Archival pigment print, 120x80cm, 2012
김창겸, Garden Journey#6, Archival pigment print, 120x80cm, 2012

배미애 geog37@nate.com 갤러리이배 및 이베아트랩 대표, 전 영국 사우스햄톤대학교 연구원 및 부산대학교 연구교수. 지리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강의와 연구원 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 직업에서 배우는 성찰적 태도에 깊이 공감하면서 평소 미술작품과의 막역한 인연으로 50세에 정년에 구애 받지 않는 새로운 직업으로 갤러리스트를 택했다. 미술사의 맥락을 짚어가며 일년에 약 10번의 전시를 기획하며 주로 우리나라의 보석 같은 작가들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차세대 한국미술계를 이끌어나갈 신진작가 발굴에도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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