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호주에서 올해 마지막 텀에 접어들었다. 호주의 학교는 연 4텀으로 운영되는데, 한 텀당 10주 간의 교육, 2주간의 방학이 이어지는 형식이다. 텀 운영과 방학 시기는 주마다 조금씩 다르다. 호주에서 보낼 마지막 텀이라고 생각하니 새삼 지난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왜 하필 시드니가 아닌 캔버라(Canberra)에 왔을까? 왜 하필 기라랭(Giralang)에서만 살게 되었을까? 어떻게 나는 그들을 만났을까? 이 모든 것이 길 위의 우연한 만남이 인연으로 이어진 경우다. 스치듯 만나 잊혀진 얼굴이라도 시나브로 인연의 꽃이 피나 보다.

시드니가 아닌 캔버라행은 단순한 결정이었다. 그곳에 유일하게 남편이 아는 지인 부부가 있었다. 10여년 전에 그들이 연인이었을 당시 코엑스몰을 걷다 잠시 인사를 했다. 그것이 전부였는데, 10년이 흐른 후, 그들은 한 아이의 부모가 되었고, 한국을 떠나 호주에 정착했다. 호주하면 시드니라는 등식이 성립하지만, 서울만큼 복잡할 게 뻔한 시드니는 관심이 없었다. 시드니로부터 세 시간 거리 수도 캔버라에 대한 호기심과 그곳의 안정적인 환경에 반해 단번에 캔버라행을 결정지었다. 이때 나의 충동적이고 무모한 행동이 가져올 어떤 결과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단기간이라도 해도 정착하는데 애를 먹었다. 그 후유증이랄까, 오십견을 얻었다.

14년 전에 우리 부부 모두 직장을 포기하고 뉴질랜드로 훌쩍 떠난 적이 있다. 그래서 바로 옆 동네인 호주도 비슷할 거라는, 나의 생활 영어로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짐을 쌌다. 이 희망은 시드니 킹스필드 공항에 내릴 때까지 이어졌다. 이국적인 느낌이 전혀 없던 공항과 익숙한 공기, 이 모든 것에 안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희망과 기대는 캔버라에 도착하자 마자, 사라졌다.

솔직히 무서웠다. 그리고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14년 전에는 남편과 둘이였고, 지금은 아이와 나, 이 조합으로 이곳에서 3개월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아이는 온전히 나를 의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이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모든 승객들이 버스 터미널을 빠져나가고 지인을 기다리는 두어 시간 동안, 나는 당황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아이와 둘 사이에서 어찌할 수 없는 침묵이 잠시 흐른 뒤, 드디어 생각을 마치고 터미널 밖을 살펴보았다. 허전하다. 인적도 드물다. 토요일 4시경 캔버라의 도심이 사막처럼 느껴진다. 버스는 왜 보이질 않나?, 버스터미널이라면 마땅히 있어야할 택시는 도대체 어디에 있나? 주소를 적은 수첩만을 만지락거리다 지인으로부터 콜택시 전화번호를 문자 메시지로 넘겨받았다. 그 지인은 5살 자녀와 관련된 사정이 있어 우리를 마중 나오지 못했다.

캔버라에 오기까지 많은 준비를 하지 못했다. 때론 긴 준비가 도통 먹히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어느 순간부터 나는 즉흥적으로 현지에서 하나씩 부딪혀가며 해결하는 것을 선호한다. 학교 입학 절차를 미리 한국에서 해결했으니 남은 것은 주거 문제라고만 가볍게 여겼다. 그런데 결코 가볍지 않은 역경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와 둘이서 살 집을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고 하면 믿을까? 한국에서부터 찾아보고 연락해보고 했지만 아무도 우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특히 기라랭은 원주민이 많은 올드타운이라 쉐어하우스 구하기가 더 어려웠다. 가까운 이웃 타운이 캐일린(Kaleen)만 해도 제법 있었는데, 차도 없는 외국살이를 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무조건 기라랭에 머물러야 했다. 아이가 다닐 학교가 기라랭 프라이머리 스쿨(Giralang Primary School)이었기 때문이다.

지인의 집에 머무르는 일주일 동안 편히 잠을 자본 적이 없다. 페이스북의 ‘Canberra Share Housing & Rooms for rent’ 그룹에 가입해서 기라랭에 쉐어하우스가 있으면 무조건 문자를 보냈다. 그런데 전부 이렇게 답이 왔다.

“우리는 학생이나 직장인을 원합니다.”

처음에는 이 말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곧 그 이유를 알았다. 이곳의 높은 전기료와 수도료와 관련있다는 사실을. 나는 아이의 보호자로 이곳에 왔고, 낮시간 동안 집에 머물 시간이 많으니 쉐어하우스 메이트로서는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물론 이 이유가 전부가 아니다. 같은 세대끼리 편하게 뭉쳐 살고 싶은데, 초등학생과 엄마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또 그들은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도 문제 삼았다. 참 당연한데, 어서 빨리 지인의 집을 떠나야 하니 조급한 마음이 더해져 ‘한국으로 돌아갈까? 하는 약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때만 떠올리면, 안절부절 못하던 내 모습이 살아난다. 다시 되돌려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절박했고 긴장했던 내 모습.

나는 이곳, 캔버라에서 집을 렌트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렌트를 하는 조건도 무척 까다롭거니와 쉐어하우스에서 머무는 것이 금전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영어로 계속 말을 해야 하는 환경에 노출된다는 측면에서 이득이라 여겼다. 그리고 이는 사실이다. 페이스북 외에도 rent.com.au, allhomes.com.au 등 렌트와 쉐어하우스를 구할 수 있는 사이트는 많다. 일주일 간 잠을 설치면서 얼마나 많이 인터넷 검색을 했는지, 휴대폰에 묻은 땀자국만이 그 사실을 안다. 7월의 캔버라는 겨울이었는데, 언제나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던 그때. 사실, 그러한 날들이 있었기에 이곳에 더 빨리 적응했을 거다. 도움없이 해보겠다는 철없던 생각과 그 이후의 일들이 아이와 나, 모두를 한 단계 성장시켰음에는 의심할 이유가 없다.

현지 정착의 1순위는 뭐래도 머물 집을 구하는 것이다. 절차 상, 이미 아이의 입학은 결정되었지만, 학교를 방문해 교장 선생님과 담당 교사를 만나는 일이 남았다. 또 하루 빨리 통장을 개설해야 하고, 버스 노선과 지리를 익혀, 당장 먹고 사는 데 필요한 생필품을 사야 한다. 호주 도착 다음 날부터 손발을 총 동원해 현지 적응 훈련을 시작했다. 아, 아찔한 대중교통, 버스. 처음에는 3개월만 머물 생각이었기에, 차 구입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결국 6개월을 머물면서, 다시는 차없이 호주에서 지내지 않겠다는 각오를 했을 정도로 이곳에서 ‘차’는 필수품이다. 무겁게 장을 보느라 차없는 호주 생활로 오십견을 얻었으니,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캔버라 대부분의 가정은 가족 구성원 중 성인 인원수만큼 차가 있다. 오클랜드에 있을 때도, 도심에 머물던 한 달을 제외하고, 중고차를 구입해 생활했다. 호주는 뉴질랜드보다 훨씬 큰 대륙 국가이고, 캔버라는 호주의 수도이니 한국만큼은 아니겠지만 대중교통 이용이 쉬울 것이라는 착각은 호주 도착 다음 날, 바로 깨어졌다. 모두 차가 있으니, 버스는 우리나라 시골 버스처럼 움직였다. 아침 등굣길, 출근길이면, 15분 혹은 20분에 한 대인데, 이후에는 1시간에 한 대 꼴이다. 게다가 오후에는 똑같은 버스지만, 오전과 다른 노선으로 운행된다. 운행 횟수가 줄면서 거쳐가는 정거장 수도 늘어난다. 운행 일정도 평일과 주말이 다르다. 나의 도우미는 구글맵. 완벽하진 않지만, 의지할 수 있을 만큼 버스 실시간 정보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늘 버스를 놓치지 않을까 조마조마 했다.

봐둔 집이 있었다. 학교에서 7, 8분 거리이고, 아이와 나를 받아 주겠다는 집. 온갖 고생을 하면서 집을 구하면서도 그 집이 맘에 들지 않아 주저했다. 그러다가 원래 2, 3일만 머물 생각이던 지인의 집에 일주일을 신세졌다. 외국에서 남의 집에 신세 지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호주 캔버라의 높은 물가를 생각하면, 일주일이지만 금전적인 부분을 고려해봐야 한다. 특히 나의 지인이 아니라 남편의 지인이었고, 10여년 전에 길가다 우연히 인사만 나눈 사이라 일주일을 머물면서 내내 편치 않았다. 그러나 그 지인이 있어 아이가 행복한 첫 외국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었으니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이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또 2016년의 캔버라 생활도 그로부터 시작되었으니, 결코 작은 인연은 아닌 셈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클랜드에서 배운 영어가 서바이벌 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학교 입학 마무리, 통장 개설, 쉐어하우스 찾기 등 필요한 일들을 스스로 해내는데 있어 영어는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이래저래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다가 시간만 축을 내었다. 마지막 선택은 가기 싫었으나 가야 하는 그 집이었다. 나에게 보내는 위로는 우습게도 그 집의 주소가 처녀자리의 알파별인 스피카(Spica)라는 점이었다. 내 별자리의 알파별, 스피카. 그러니 힘을 내자, 이제 좋은 일만 남았어, 하면서 애써 위로를 했다. 일주일의 마지막 날 저녁 6시 무렵, 나와 아이는 그 집을 노크했다. 집주인 린다(Linda)와 쉐어하우스 메이트인 스티브(Steve)가 우리를 반겼다. 사실, 어렴풋이 짐작했다. 망설였지만, 결국 미리 정해진 것처럼 이 집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어떤 사실에는 저항해봤자 득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괜한 고집을 앞세워 대항했고, 결국 부질없이 시간 낭비만 했다. 참담한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더이상 쉐어하우스를 구하기 위해 전전긍긍 하지 않아도 되니 그냥 다 내려놓고 편안할 수 있었다. 앞으로 닥칠 고된 쉐어하우스에서의 생활도 이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파란만장한 린다네에서의 생활이 막 시작되었다.

장윤정 eyjangnz@gmail.com 컴퓨터 전문지, 인터넷 신문, 인터넷 방송 분야에서 기자로, 기획자로 10여년 간 일했다. 현재 호주의 수도 캔버라에 아이와 함께 머물면서, 두 번째로 로컬처럼 살아보는 중이다. I AM 수행과 명상하는 삶을 추구한다. 호주 원주민 애보리진의 이야기와 그들의 세계관, 미술작품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이곳의 하늘과 구름, 별에 푹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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