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시작되자,
여행은 끝났다
- 게오르그 루카치 ‘소설의 이론’ 중에서 -

여름이다. 더위가 절정에 달했다. 매년 유난을 떨며 ‘올해가 가장 덥다’를 연발했지만, 올 여름의 더위를 넘긴 후에는 한동안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못할 것 같다. 한반도 전체를 뜨거운 불판 위에 올려놓은 느낌이다.

휴가철을 맞이하여 다들 더위를 피해 떠날 채비를 한다. 평소 눈여겨두었던 곳의 숙박을 예약하고, 주변 관광지와 맛집을 조사하고, 동행자와의 휴가일정을 조절하며 들뜬다. 어쩌면 여행은, 여행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그것을 하나하나 구체화하면서 이미 시작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길에 오르면 루카치의 ‘길이 시작되자 여행은 끝났다’는 표현처럼 여행이 끝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루카치가 ‘여행 이야기’를 하고자 사용한 말은 물론 아니다.) 일단 여행 계획을 세우며 목적지 위주로 동선을 편성하고, 내비게이션에 최초 목적지를 입력하고 떠난다. 이내 난관에 부딪힌다. 잔뜩 몰려나와서 도로를 점령하고 있는 차들, 휴게소마다 넘치는 인파, 아스팔트의 뜨거운 열기, 그 속에서 몇 시간 시달리다 보면 즐겁게 즐겨보겠다는 의지조차 꺾이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창 밖 풍경보다는 내비게이션에 찍힌 도착시간에 눈길이 더 많이 머문다.

내비게이션으로 목적지까지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을 찾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행태가 아니다. 무조건 차에 앉아 시동을 걸면, 그 다음 동작은 스마트폰 내비게이션 앱을 켜서 행선지를 입력하게 된다. 내비게이션은 목적지까지의 경로를 따박따박 안내해 주고, 중간중간 과속 카메라 위치와 사고 위험구간도 알려주고, 잠시 쉬었다가 갈 수 있는 휴게소 정보를 제공하면서 지루하지 않도록 숱한 말을 걸어온다. 요즘에는 교통상황까지 알아서 판단해서 우회경로도 안내해주고, 오늘의 가장 저렴한 주유소 정보까지도 알려준다.

종이지도책을 펼쳐들고 보조석에 앉아서, “6번 국도를 타고 쭉 가다가 양평을 다 지날 무렵에 44번 국도로 갈아타고 동쪽으로 계속 달려서 홍천, 인제를 넘어서면 만나게 되는 46번 국도 이정표를 놓치지 말고 바꿔 탄 후 다시 56번 지방도로로 달리다 보면 미시령을 통과해서 바로 속초에 도착하게 될 거야”라고 말할 필요가 없어졌다. 현재 가고 있는 방향이 남쪽인지 북쪽인지도 분별하지 않은 채 운전한다. 그저 내비게이션이 50미터 앞에서 우회전하라고 하면 우회전하고, 길을 잘못 들었다며 유턴하라고 하면 재깍 유턴하고, 속도제한에 주의하라면 속도를 줄인다. 지금은 서비스 명칭이 바뀌었지만 예전 유행했던 내비게이션 앱 이름처럼 운전자 스스로가 “김기사”가 된 듯한 느낌이다. 종종 내비게이션이 교통상황이 바뀌었다며 호들갑을 떨며 당장 다른 경로로 바꿔서 가야겠다고 변덕을 부려도, 잠시 그 변덕에 화를 낼 것인지 맞장구를 칠 것인지 망설여보지만, 결국 하릴없이 따른다. 나에게도 필요한 것은 ‘빠른 길’이기 때문이다.

내비게이션은 기본적으로 두 종류의 길을 찾아주는 역할을 한다. 출발지점에서 목적지점까지의 가장 가까운(최단거리) 길 내지는 가장 빠른(최단시간) 길을 찾는다(종종 비용이 들지 않는 저렴한 길을 찾아 달라고 할 수도 하지만, 다 비슷비슷한 원리다.) 맵 인사이트 칼럼 초반에 ‘모든 것은 점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했듯이, 이번 이야기 역시 점과 점을 연결하는 방식에 대한 일종의 문제풀이라고 할 수 있다.

위 그림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풀어보자. 숫자가 적혀 있는 점은 ‘교차로’라고 생각하면 되며, 점과 점을 연결한 선은 차량 통행이 가능한 ‘도로’라고 이해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공간정보 용어로는 이러한 그물 구조를 ‘도로 네트워크’라고 하며, 이는 노드(Node, 점)와 링크(Link, 선)로 이루어진다.

A점(3번 점)에서 출발하여 B점(19번 점)까지 가려고 한다. 전제조건이 없으면 숱한 경우의 수가 발생한다. 사다리 타듯이 지그재그로 갈 수도 있고, 심지어 한 번 거쳐간 길을 다시 지나갈 수도 있다. 길이라는 게 원래는 그런 성격이다.

‘최단거리’를 구하라고 하면 그리 어렵지 않다. 선의 길이의 합이 가장 작은 경우의 수를 답으로 제시하면 된다. 내비게이션을 비롯한 각종 지도 서비스의 ‘길찾기’ 유형에서 ‘최단거리’를 선택하는 경우, 3-8-15-19 점을 연결하는 길(빨간 색 실선)을 찾아서 알려줄 것이다. 비록 ‘삼각형을 이루는 두 변의 합은 나머지 한 변보다 길다’는 정의를 모르더라도, 육안으로 봐도 인지적으로 파악 가능한, 미취학 자녀에게 물어봐도 쉽게 찾아낼 수 있는 최단거리 경로다.

하지만 ‘가장 빠른 길’을 물으면 상황이 좀 달라질 수 있다. 도로 네트워크 상의 모든 링크들이 동일조건이라면 상관없겠으나, 실제로는 도로(링크)마다 차선의 개수가 다르고, 제한속도가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좀 더 나아가면 경사 정도도 다를 수 있고, 재질도 아스팔트인지 비포장도로인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3-8-15-19 점으로 연결되는 링크들이 산 능선을 넘어가는 도로여서 평균시속 40Km 수준에 불과하고, 3-2-7-14-19 점으로 연결되는 링크들은 산업 용도로 만들어진 평균시속 60Km 이상의 큰 도로라면 ‘최단시간 경로’에 대한 답은 3-2-7-14-19 코스(파란 색 실선)로 바뀌게 된다. 계산기를 두드려봐야만 알 수 있는 답이다.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내비게이션은 이런 계산을 도와준다. 사용자가 현재 위치와 목적지의 좌표를 알려주면, 이를 경로 연산을 담당하는 서버에 전달하여 길찾기를 부탁하고, 서버는 다양한 조건을 고려한 최적의 경로를 찾아서 내비게이션에게 전달해 준다. 그러면 내비게이션이 화면 상의 지도나 화살표, 음성 등을 통해 추천된 길을 안내한다.

이러한 길찾기 계산에 필요한 자료는 도로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점(노드)과 선(링크)의 각종 속성정보이다. 각각의 링크에는 통행속도(평균속도 및 최고속도)와 방향(양방향, 일방통행 등), 통행가능 여부(10톤 이상 화물차 통행금지, 자동차 전용 등), 유료도로 여부 등의 정보가 담겨 있다. 해당 방향으로 통행이 가능한지 판단하고, 통행이 가능하다면 구간별로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지 계산하여 알려준다. 각각의 노드(노드는 사실 교차로 뿐만 아니라, 링크의 속성이 바뀌는 변경점이나, 막다른 지점(종점) 등도 포함된다)는 어떤 링크의 끝점인지에 대한 정보와 함께, 좌회전 금지, U턴 가능, 2차선까지 좌회전 가능 등등의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재료를 기본으로 삼아, 각종 경우의 수를 도출하고, 그 가운데 가장 최소비용이 드는 경로를 ‘추천경로’라는 이름으로 제공하게 된다.

실제 내비게이션 앱서비스에서는 위에 말한 기본적인 정보 이외에도 실시간 교통상황(정체, 사고발생, 통제상황, 현재 평균속도 등)을 각각의 도로 네트워크 자료에 부가적으로 반영하여 현재 상황에 맞는 가장 빠른 길을 제공한다. 길 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변수를, 얼마나 효과적인 알고리듬으로 연산해서 제공하느냐가 좋은 내비게이션 서비스를 결정하는 차별적 요소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상황에 대한 가정을 하나 더 보태보고자 한다. 아래의 지도를 보면 위에 도출한 결과가 왠지 허전하다. 앞서 본 도로 네트워크와 동일한 자료이나, 배경지도로 제주도를 넣은 것이다.

A 지점은 제주국제공항이고, B 지점은 중문관광단지다. 제주도에서 2박 3일의 휴가 일정을 보내기 위해서 막 공항에 도착했고, 렌트카에 앉았다. 숙소는 중문관광단지에 있다. 체크인 시간까지는 충분히 여유가 있다. 어차피 둘러보려고 온 여행이니 LPG 충전비용은 걱정하지 않는다. 굳이 서둘러 중문단지까지 짧은 길 혹은 빠른 길로 갈 필요가 없다.

출발지와 목적지가 위의 사례와 동일하나, 길찾기의 목적이 짧고 빠른 길을 검색하기 위한 게 아닌 상황이다. 좀 빙 돌아가도 좋으니 3-1-6-12-18-19 점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 코스(주황색 실선)를 추천해 주면 좋으련만, 그 방향으로 핸들을 꺾어 들어서기만 해도 자기가 설정해 놓은 경로를 어겼다는 투로 매번 ‘(운전 좀 똑바로 하세요) 경로를 벗어났습니다’를 외치고, ‘(당신 때문에) 경로를 재탐색합니다’며 짜증을 내곤 한다. 이 경우, 진정 내가 ‘김기사’가 된 느낌이다. 길이 시작되자, 여행이 끝난 느낌은 이 때문이다. 경유지를 해안도로에 있는 어딘가, 가령 수월봉 정도로 찍으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 제주공항에서 수월봉을 목적지로 삼아 안내를 요청해 보아도 협재나 금능으로 이어지는 소소한 해안도로를 포함해서 안내하는 경우는 드물다.

모든 지도 서비스에서 ‘추천경로’라고 표시되어 있는 것은, 결국 ‘최단시간 경로’의 다른 이름이 되고 말았다. 업무나 일상생활의 상황이라면 이 등식이 틀렸다고 말하기 어렵다. 우리는 대부분 소설 ‘모모’(미하엘 엔데 저)에 나오는 것처럼 ‘시간저축은행’에 적립할 시간을 짬짬이 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쳐도, 여행의 순간까지 ‘추천경로’가 그런 의미로 쓰여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말 그대로 목적지가 목적 전체여서 발생하는 문제다. 목적지까지 빨리 달려갈 수 있는 도로를 찾는 결과만 중요할 뿐, 목적지에 이르는 수많은 즐길만한 길에 얽힌 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빠른 길 따위가 뭣이 중헌디! 나는 가족과 제주도에 여행을 즐기러 왔고, 공항 렌트카 반납을 하기 전에 아직 6시간의 여유가 있고, 떠나기 전에 적당한 높이의 오름과 한적한 해안도로와 바닷가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카페에 들르고 싶어.’라고 말할 때, 그 길을 추천해 줄 수 있다면 ‘길이 시작되자 여행도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임영모 0duri@naver.com 대학교에서는 국어국문학을 전공하였다. 컴퓨터잡지사 기자로 시작하여, 애니메이션, 출판, 모바일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후 GIS 업계에 종사한 지 10년이 넘었다. GIS 분야에서 전통적 GIS보다는 인문학 기반의 다양한 공간정보 기획을 진행하고 있다. 지도를 통해 볼 수 있는 다양한 시각과 활용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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