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일생 자체가 무언가를 기다리는 과정이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음, 사랑, 기회, 선택과 같은 일생에 크게 의미를 줄 수 있는 기다림에서부터 사소하게는 하교하는 아이를, 결혼기념일을, 은행창구에서 내 순서를, 연로하신 부모님의 생신을...늘 자각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으로나 물리적으로 기다림을 지속하고 있다. 기다림의 시간적 지속성은 매우 다양하다. 길게는 일생을 통틀어 기다리는 그 무엇이 있으며 짧게는 찰나적 기다림도 존재한다. 기다린다는 것은 기다리는 대상과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 결론지어야 할 그 어떤 것을 보류한다는 의미이다. 한정된 시간 속에 주변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정지시킨 체 기다린다는 것은 어찌 보면 내면 깊숙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치열한 자기성찰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이 기다림의 연속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기다림을 외면한 채 성급하게 내린 무수한 결론이 복잡한 세상에서 우리를 더욱 방황하게 한다. 방황하는 자들이 난무하는 도시에서 나 자신만이라도 ‘pause' 버튼을 스스로 망설임 없이 누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작가 권대훈은 인간의 자기 성찰적 과정을 기다림의 미학으로 표현한다. 기다림을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기다림의 주체와 대상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지 않고도 불가능한 작업이다. 더욱이 한정된 재료와 표현방식으로 형이상학적인 기다림의 메타포를 보편적 인식의 차원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는 입체적인 '공간'을 다루지만 기다림의 '시간'에 더욱 초점을 맞추기 위해 조각을 만든 다음 시간성을 내포한 그림자를 함께 배치해 매우 인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 왔다. 따라서 작품 안에서 어떠한 부분은 조각이라는 대상으로 존재하기도, 또 이미지로 존재하기도 한다. 작가의 작업은 기다리는 찰나의 순간, 특히 자신의 기억 속에 각인된 찰나적 깨달음의 순간을 담아보려는 의도로 시도되었다. 경험이 수반한 심리적, 감정적 요인으로 각인된 찰나의 순간, 즉 상황이 발생한 ‘현재’의 시간적 개념은 인체 조각 위에 상황 그대로의 명암을 설정하고 채색함으로써 표현된다. 작가는 채색된 그림자는 단순하지만 한 순간의 시간을 극명하게 대변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빛의 방향에 따라 이동하는 그림자의 방향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과 그에 따른 인식의 변화이다. 표면적으로는 육체의 휴식 같은 기다림이 실은 복잡한 정신적 내면세계를 품고 있는 활시위 같은 긴장된 상태라는 것을 작가는 빛의 움직임으로 담아내고 있다.

기다리는 사람들은 표면적으로는 많은 움직임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대상과의 끝없는 소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다가올 사건이나 만날 사람에 대한 상상으로 다양한 감정적 교차를 경험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와의 끝없는 대화를 이어나가기도 한다. 정지된 행동이 일시적일뿐이며 곧 전개될 동적인 상황은 변화를 수반하는 ‘빛’이라는 매체를 통해 암시적으로 표현된다. 삶에서의 일시적인 중지는 정신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다음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 인식된다. 작가에게 기다림은 일시적인 중지이며 또한 그 중지 속에서 서서히 변화해 가는 시간적 속성이다. 권대훈의 작업은 빛의 강약, 속도의 변화와 함께 마치 마술처럼 사람들의 감수성을 자극하고 그들 스스로가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절대적 공감대를 만들게 된다. 한 공간에서 작가 권대훈이 만든 기다리는 사람들과 일생을 기다림으로 무장한 우리 스스로가 일체가 됨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지루하거나 아무 가치가 없어 보이는 정지 상태의 사람들이 아니고 기다림 자체가 어떤 인연을 낳을 과정 자체로 혹은 어떤 결과에도 상관없이 그 자체가 중요한 목적으로서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무인삼림지대를 일컫는 ‘Willowwacks’은 작가의 ‘찰나시리즈’ 중에서 기다림을 통해 집약된 사유의 공간을 담으려한 시도로 만들어진 작업이다. 빽빽한 나무로 덮여진 무인산림지대는 무인도처럼 사람이 접근하기도 생존하기도 힘든 공간이다. 작가는 사유의 공간이 Willowwacks과 같은 정체성으로 쉽게 접근하기 힘들며 오직 사유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무언가로 빽빽하게 차있는 자아탐색의 공간일 거라 생각한다. 기다림이란 행위에 동시에 수반되는 끊임없는 사유의 과정이 만들어 놓은 각자에게 있어 도달하기 힘들지만 도달해야한 하는 염원의 공간이 바로 작가에게 있어 Willowwacks이다. 아래 작품에서 표현된 자소상은 실제 이미지는 없지만 인물과 바닥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통하여 유추해볼 수 있는 창가에 우두커니 서 있다. 이 공간에는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또 다른 앉아 있는 나의 모습이 존재한다. 작가의 자소상이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기다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대변한다. 형상적으로 기다리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지만 활발히 전개되는 사유의 과정 속에 앉아있는 나와 서 있는 나가 하나로 묶인다. 각각 서로를 들여다보는 거울이 되어 기다림 속에서 지속적인 자아성찰 내지 탐색의 시간이 흐른다. 그리고 어느 순간 ’Willowwacks' 속에 들어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어느 누구의, 또는 어떤 상황의 구애도 받지 않는 자유인으로 거듭나기를 갈망한다.

배미애 geog37@nate.com 갤러리이배 및 이베아트랩 대표, 전 영국 사우스햄톤대학교 연구원 및 부산대학교 연구교수. 지리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강의와 연구원 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 직업에서 배우는 성찰적 태도에 깊이 공감하면서 평소 미술작품과의 막역한 인연으로 50세에 정년에 구애 받지 않는 새로운 직업으로 갤러리스트를 택했다. 미술사의 맥락을 짚어가며 일년에 약 10번의 전시를 기획하며 주로 우리나라의 보석 같은 작가들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차세대 한국 미술계를 이끌어나갈 신진 작가 발굴에도 힘쓰고 있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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