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분류학자 유기억교수가 들려주는 야생화 이야기, `내 이름을 불러주세요`]

<그림=홍정윤. 제비꽃>
<그림=홍정윤. 제비꽃>

봄의 따뜻한 기운으로 나른해지면, 반가운 꽃 하나가 수줍은 얼굴을 들어 사람들을 반긴다. 봄에 꽃을 피우는 식물들의 꽃 색깔은 흰색이나 노란색이 많은 편인데 제비꽃(Viola mandshurica)은 진한 보라색을 띤다. 튀어 보이고 싶은 모양이다. 그래서 ‘제비’라는 이름이 붙었나? 제비꽃은 낮은 산이나 길가의 한적한 곳이면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든 쉽게 볼 수 있으며, 약 40종의 제비꽃 종류가 우리나라에 분포하고 있다. 이들은 꽃 색깔에 따라 크게 노란색, 흰색, 보라색의 세 무리로 구분하기도 하며, 줄기가 있고 없고에 따라 나누기도 한다.

나는 제비꽃 종류를 대상으로 몇 년간 식물분류학적 연구를 시도했었다. 처음에는 이른 봄에 꽃이 피고 전국적으로 분포하므로 한 가지씩 찾아보는 재미도 있고, 또 봄이 시작되면 콧등에 바람이라도 쐬러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을 충족시켜 주는 재미로 제비꽃에 대한 연구를 편하게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연구를 하면 할수록 머릿속에는 정리된 것은 없고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얻었다. 오전에는 그래도 그럭저럭 종을 구분하는 것 같은데 오후가 되면 각각의 개체에서 나타나는 형태적 변이 때문에 머릿속이 흐릿해지고 만다. 어떤 세미나에서 그동안 연구한 것들을 정리하여 발표했더니, 그 발표 자료에 대한 요구가 며칠이나 계속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적어도 제비꽃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혼란스러워했던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속명 ‘Viola’는 제비꽃의 영국 이름 ‘Violet’에 대한 라틴어로 보라색을 뜻하는 그리스어 ‘ion’에서 유래되었으며, 종소명 ‘mandshurica’는 만주 지역에 분포한다는 뜻이다. ‘제비꽃’이라는 우리 이름의 정확한 어원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올 때 꽃이 핀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오랑캐꽃’이 있는데, 춘궁기에 오랑캐들이 찾아올 무렵 핀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전설도 있고, 꿀샘이 들어 있는 거(距)라고 불리는 꽃뿔의 모양이 오랑캐의 머리 모양과 비슷하다 하여 그렇게 부른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방에서는 ‘병아리꽃’, ‘ 장수꽃’, ‘ 씨름꽃’, ‘외나물’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제비꽃과 형태가 가장 비슷한 종류로는 흰제비꽃이 있는데 제비꽃에 비해 꽃이 흰색이고 꽃뿔의 길이가 2∼3밀리미터로 짧으며 포엽이 꽃줄기의 중간 이하에 달려 차이가 있다. 제비꽃 가운데 비교적 흔하게 볼 수 있는 종류로는 남산제비꽃, 잔털제비꽃, 금강제비꽃, 태백제비꽃, 알록제비꽃, 털제비꽃 등이 있다. 이에 비해 왕제비꽃과 선제비꽃은 자생지와 개체 수의 감소로 멸종위기 야생식물 II등급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이 종류들은 울릉도에 분포하는 큰졸방제비꽃과 함께 식물구계학적 특정식물종 IV∼V등급으로도 지정되어 있다.

흔히 ‘팬지’라고 부르는 식물도 제비꽃의 한 종류인데, 북유럽이 원산지인 삼색제비꽃(V. tricolor)이라는 종을 수백 가지가 넘는 원예 품종으로 개량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봄철이면 화분에 심어 도로변에 진열하는 제비꽃 무리의 대부분이 바로 이 꽃이다. 팬지 대신 우리나라 자생 제비꽃으로 화분을 채우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제비꽃의 꽃말은 충실, 겸손, 사색 등인데 꽃 색깔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어 흰색은 소박함, 보라색은 사랑, 노란색은 수줍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서인지 나폴레옹 1세는 결혼기념일에 왕비 조세핀에게 제비꽃 꽃다발을 보내어 사랑을 표현했다고 하며, 문학가는 ‘젊은 죽음’의 상징으로 “그녀(오필리아)를 땅 속에 매장하라. 그녀의 아름답고 더럽혀지지 않은 육체에서 제비꽃이 나올지도 모르므로....”(햄릿 5막 1장)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쓰임새도 다양해서 고대 로마에서는 제비꽃을 목에 걸고 술을 마시면 취하지 않는다고 믿었으며, 여성들은 꽃으로 만든 염료로 눈 화장을 했다고 한다. 잎으로 만든 허브 차는 불면증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한방에서도 제비꽃의 지상부를 자화지정(紫花地丁)이라 하여 결핵균의 성장을 억제하고 해열, 소염 및 해독 작용에 사용하고 있다.

몇 년 전 이른 봄에 강원도 홍천의 가리산에 다녀온 적이 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정상부에 거의 도달했을 때, 비탈 가득 노랑제비꽃이 피어 있는 군락을 만났다. 산 아래쪽부터 보이기 시작했던 보라색의 제비꽃, 도랑가에 피었던 흰색의 콩제비꽃, 연한 하늘색의 졸방제비꽃, 고깔 모양의 잎을 펼치고 수줍게 피어 있는 연분홍의 고깔제비꽃, 그리고 노랑제비꽃의 화려함까지 등산로 주변은 온통 제비꽃 밭이었다. 마치 제비꽃을 보러 나선 산행처럼 느껴졌다.

제비꽃이 만발하는 5월이면 하루가 다르게 푸르름은 더해만 가고 꽃의 화려함도 절정에 달한다. 가끔은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깊이 숙여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여유를 가져 보는 것도 봄을 즐기는 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유기억 yooko@kangwon.ac.kr 강원대학교 생명과학과 교수이며, 식물분류학이 전공인 필자는 늘 자연을 벗 삼아 생활하면서 숲 해설가, 사진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야생화를 주로 그리는 부인 홍정윤씨와 함께 책 집필 뿐 만 아니라 주기적인 전시회를 통해 우리나라 자생식물의 소중함을 널리 알리는데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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