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안치용의 시네마 인문학] '패스트패션‘을 팩폭한 글래디에이터의 블랙코미디, 영화 '그리드'

발행일시 : 2020-10-08 18:00

‘그리드(GREED)’는 제목 그대로 자본가의 탐욕을 전면적으로 포착한 사회비판 영화이다. 비판정신이 넘쳐나고 주제의식이 확고하지만, 관객이 지레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게 이 영화는 재미있다. 영화사를 뒤적거려서 코미디란 장르로 사회비판을 담아낸 사례를 찾아내는 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재미와 비판 각각에서 높은 완성도를 구현하며 전체로서 볼만한 영화가 되기는 쉽지 않다. ‘그리드’가 그 드문 예에 속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영화 '그리드' 스틸컷 <영화 '그리드' 스틸컷>

픽션과 넌픽션, 비판과 재미, 고전과 키치, 로마와 그리스, 비극과 희극, 모던과 포스트모던 등 온갖 이항대립이 넘쳐나는 가운데 이 영화는 현대 문명의 핵심을 통쾌하게 또 아프게 짚어낸다.
  
패션산업에서 자수성가해 영국의 거부 대열의 앞줄에 자리잡는 데 성공한 그린이 실제로 멕시코에서 벌인 초호화 파티를 패러디하여 이 영화는 세계화 시대 ‘패스트 패션’의 실상을 고발한다. 동시에 그린이란 사례를 통해 자본가의 탐욕을 뾰족하고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영화에서는 주인공 ‘리차드 맥크리디(스티브 쿠건)’의 생일파티가 열리는 그리스를 현재 시점이자 기본 공간으로 하여 과거의 영국과 스리랑카를 넘나드는 시공간의 뒤섞임이 목격된다. 

영화 '그리드' 스틸컷 <영화 '그리드' 스틸컷>

윈터바텀은 영화제작 결정 후 ‘트립 투’ 시리즈 등에서 함께한 스티브 쿠건을 찾아가 출연을 의뢰하여 두 사람은 ‘그리드’에서 6번째로 호흡을 맞추게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윈터바텀 감독이 영화에 등장하는 ‘패스트 패션’공장과 노동자, 난민을 실제 스리랑카 공장과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 현실의 시리아 난민을 섭외하여 출연시켜 극화했다는 점이다. 

보기에 따라 번잡한 경로를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극영화를 만들었지만 다큐정신을 시종일관 붙들고 있었다는 표지였다고 나는 판단한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융합하려는 시도가 좋은 결과를 산출하려면 연출자의 탁월한 균형감각과 예민한 시대정신이 필요하다. 윈터바텀은 어려운 일을 ‘그리드’에서 해냈다.
 
1952년생으로 작위까지 받은 필립 그린이 아직 생존한 반면 극중 그의 분신인 리차드 맥크리디는 60살 생일파티에서 어처구니없이 죽는다. 그의 죽음은 우연한 계기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 우연은 필연이었다는 역설을 내포한다. 리차드의 죽음은, 그가 평생에 걸쳐 쌓은 업(業)의 정점이 60살 생일파티를 위한 모조 원형경기장에서 우연찮게 도달하면서, 자신의 탐욕을 이어받은 아들의 탐욕과 자신의 직원으로 일하는 스리랑카 노동자 출신의 분노가 기습적으로 화학작용을 일으켜 발생한다.

그러나 죽음으로 카타르시스는 일어나지 않는다. 탐욕의 화신의 우연찮은 제거 혹은 징벌은 자본가 개인의 소멸을 뜻할 뿐 자본가 자체의 소멸이 아니기 때문이다. 탐욕과 자본은 사자밥에 마약을 타는 멍청한 ‘오이디푸스’에게 상속된다. 탐욕에 대한 일종의 복수는 일어나지만 그럼에도 자본은 영속하고 ‘패스트 패션’ 또한 이어지며 응징자는 다시 ‘패스트 패션’ 노동자로 돌아가야 한다는 냉철한 상황인식이 영화의 대미이다. 
 
극중 리차드의 전처 ‘사만다’(아일라 피셔)가 “돈이 돈을 번다”라고 말하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면 탐욕으로 무장한 금권이 더 많은 돈을 벌게 한다. 윈터바텀 감독은 그들의 탐욕과 사치 외에 조세회피, 갑질 등 자본의 사악한 행태를 깨알같이 유머에 버무려 영화에 구현했다.

개봉 : 2020.10.15
상영시간 : 104분
감독: 마이클 윈터바텀
출연 : 스티브 쿠건
상영등급 : 15세 관람가


안치용 carmine.draco@gmail.com 영화평론가 겸 인문학자로 읽고 쓰는 일을 하며 산다. 흔히 한국CSR연구소 소장으로 소개된다.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KSRN) 집행위원장, 지속가능청년협동조합 바람 이사장 등의 직책을 함께 수행한다. 언론⋅연구 활동을 통해 지속가능 및 사회책임 의제를 확산하고 관련 정책을 수립하는 데 힘을 보태는 한편 지속가능바람청년학교, 대한민국지속가능청소년단 등을 운영하면서 대학생⋅청소년들과 미래 의제를 토론하고 있다. 가천대 경희대 카이스트 한국외대 등에서 비전임교원으로 경영학과 언론학, 글쓰기를 가르쳤다. 경향신문에서 경제⋅산업부 국제부 문화부 기자로 22년을 일했다. 학부는 문학, 석사는 경제학, 박사는 경영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한신대 신학대학원에 다니면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원. <선거파업> <한국자본권력의 불량한 역사> 등 30권 가까운 저⋅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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