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테넷’은 확실히 대작이다. ‘인터스텔라’, ‘인셉션’, ‘덩케르크’, ‘다크 나이트’ 3부작 등 화제작으로 세계 영화계에 자신의 역사를 쓰고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으로, 놀란은 “내가 만든 영화 중 가장 야심 찬 영화”라고 자부한 작품이 ‘테넷’이다.

주연 존 데이비드 워싱턴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이름만으로 ‘테넷’의 출연을 결심했다는 후문이다. 영화에서 이름 없는 주도자의 역할을 수행한 그는 덴젤 워싱턴의 아들이자 미식 축구선수 출신으로 세상을 구한 영웅의 모습을 나름 묵직하고 충실하게 소화한 듯하다. 문제는 워싱턴의 맞수로 영화 속 악의 화신인 안드레이 사토르(케네스 브래너)이다. “잔인하고 병적으로 자기 자신에 집착하는 극도로 위험한 인물로 그의 야심과 욕심이 전 세계를 위기에 빠뜨리는” 인물로 설정됐다.

영화 '테넷' 포스터
영화 '테넷' 포스터

이 영화는 감독의 설명대로 ‘인셉션’의 아이디어가 어른거리는 가운데 ‘터미네이터’ ‘007’과 같은 기존의 강력한 영화 텍스트와 만화 드래곤볼까지 연상되는 놀란 판 종합 액션 스파이 영화이다.

스파이물에서 핵심은 당연히 주인공인 스파이이지만 그 상대인 악한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으면 전체적인 완성도가 떨어진다. 스릴러물의 악역과는 달리 스파이물의 악역은 크게 보아 캐릭터의 리얼리티나 캐릭터의 우의성(寓意性)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결을 볼 때 ‘테넷’에서는 리얼리티가 살아나는 악역이 어울릴 것 같은데, 세계멸망을 꾀하는 악의 화신은커녕 편집증에 사로잡힌 암환자에서 한 발자국도 못 벗어난 듯하다. 약간 다른 결이어서 어울릴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의적인 악의 캐릭터로 표현하는 대안이 있었음직도 한데, 그러기엔 현재 구현된 리얼리티가 강한 편이다.

결국 매우 허약한 악한을 매우 강한 수퍼 히어로의 맞수로 만들어놓아 영화는 심각한 불균형에 빠진다. 여기서 강함과 약함은 당연히 캐릭터 자체에 관한 것이다. 사토르 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라기보다는 애초에 적정하게 작성되지 못한 대본의 문제이지 싶다.

주제를 정리해주는 장면이라고 할 클라이맥스의 주인공과 사토르의 대화는 더 엉망이었다. 사토르가 악의 화신인지 악의 대리인인지 불분명하고, 그가 세계멸망의 이유를 선포하는 대사에서도, 결국 캐릭터의 문제로 귀결될 테지만, 영화적 팩트는 불분명하고 어휘만 번지르르하다. 대가(大家)라는 명성에 취해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가 아닐까. 세계적인 감독 소리를 듣는 사람은 세계적인 기대치를 시종일관 맞출 수 있어야 한다.

흥미로운 발상, 박진감 넘치고 빠른 전개, 짜임새 있는 영상 등 전반적으로 훌륭한 영화로 평가받을 소지가 많았던 작품인 만큼 허황하고 과잉된 대사를 포함한 악(惡)의 캐릭터의 형상화 실패는 크나큰 옥에 티로 남는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앞으로 연출만 하고 각본은 쓰지 않는 게 좋겠다.

안치용 carmine.draco@gmail.com 영화평론가 겸 인문학자로 읽고 쓰는 일을 하며 산다. 흔히 한국CSR연구소 소장으로 소개된다.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KSRN) 집행위원장, 지속가능청년협동조합 바람 이사장 등의 직책을 함께 수행한다. 언론⋅연구 활동을 통해 지속가능 및 사회책임 의제를 확산하고 관련 정책을 수립하는 데 힘을 보태는 한편 지속가능바람청년학교, 대한민국지속가능청소년단 등을 운영하면서 대학생⋅청소년들과 미래 의제를 토론하고 있다. 가천대 경희대 카이스트 한국외대 등에서 비전임교원으로 경영학과 언론학, 글쓰기를 가르쳤다. 경향신문에서 경제⋅산업부 국제부 문화부 기자로 22년을 일했다. 학부는 문학, 석사는 경제학, 박사는 경영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한신대 신학대학원에 다니면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원. <선거파업> <한국자본권력의 불량한 역사> 등 30권 가까운 저⋅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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