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로 떠난 것은 순전히 더위를 피하겠다는 안일한 생각 때문이었다. 여름은 마치 사우나에 갇힌 느낌이 드는 계절이다.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서로 비교 대상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느끼는 이유는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이 엄습하기 때문이다. 여름이 되면 저 멀리 도망 가고 싶다.

어떤 대상이든 즉, 물질이든, 비물질이든 모든 것에는 존재 이유가 있다. 이런 측면을 놓고 볼 때, 여름은 인간에 빗대어 청년(장년기 일부 포함)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만물이 성장한다는 식상한 표현을 할 수 밖에 없는 이 계절이 없다면,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없다. 여름은 고마운 생명의 계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이 불러오는 불쾌 지수(discomfort index)는 참기 어려울 때가 많다. 신(身)이 지치면서 심(心)마저 지치는 상황이 반복된다. 여름 휴가철에 여행지마다 인파가 몰리는 현상이 우연이 아닌 것이다.

'피서'라는 1차원적인 단순한 소망만 품고 떠난 삿포로 행. 도착 첫 날을 제외한 나머지 날 동안 한국과 똑같은 더위를 경험하며 걷고 또 걸었다. 한국에서의 일상이 반복되는 순간순간들이 삿포로, 오타루에서 겹쳐졌다. 오른쪽 새끼 발가락이 '멈춤’ 신호를 보냈다. 짜증 지수에 '주의' 신호가 켜졌다. 그늘을 찾아 아무런 생각 없이 10여분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멈춤’과 '주의’라는 신체 감각과 감정의 신호에 응답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다시 내 몸 속의 방랑자 DNA가 살아났다.

여행의 재미는 공항 출국장에서 이미 시작된다. 목적지는 사실 '대상’에 불과하다. '낯선 곳으로 떠남’이라는 그 자체가 즐거움이다. 목적지에서의 시간을 훌쩍 뛰어 넘어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옴’에 또한 행복하다. 내가 생각하는 여행은 떠나고, 되돌아오는 과정이다. 마치 잠자리에 들어 꿈을 꾸고 다시 깨어나듯, 여행은 깨어있는 채로 꿈 속으로 바로 들어갔다 나오는 경험을 하고 돌아오는 과정이다.

즉, 현실과 꿈의 경계를 이리 저리 반복하는 순간들이 모여 '여행’이라는 집합체로 갈무리된다. 이것을 확대해서 해석하면, 우리는 평생 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다. 깨고, 활동하고, 자는 신체적인 활동뿐만 아니라 내면으로 들어갔다 나왔다는 순간들도 포함된다.

거리에 나가 보자. 어디서나 스몸비(smombie, 스마트폰과 좀비의 합성어)들이 서성인다. 앞으로 닥칠 위험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오직 스마트폰에만 빠져서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진정으로 '살아있다, 깨어있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의 사람들. 그러다 벽에 부딪히는 순간, 스마트폰과 그 가상 세계라는 꿈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온다. 다행 중에 다행이다. 우리는 고통을 느끼는 동시에 살아있는 존재로서 인식하는 기쁜 순간을 맞는다.

'피서’라는 현실적인 목적을 위해 때아닌 '소소리바람’을 꿈꾸며 떠났던 삿포로 여행은 그래서 성공적인 체험 학습이었다. 꿈에서 꿈을 인식했고, 꿈에서 깨어남을 받아들였고, 꿈에서조차 몸과 마음의 신호에 귀기울일 수 있었다

공항 출발지에서 시작된 여행은 집에서 끝이 난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이 내게 있어 여행의 기쁨을 배가시켜 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가 방황하는 순간마다 우리 내면은 시나브로 알려준다. 완전한 형태의 완벽한 집이 우리 내면에 있음을 말이다. 그러니 세상 어디에도 집만한 곳은 없다(There is no place like home)라는 말은 내가 사는 아파트뿐만 아니라 '진아’에게도 적용된다. 그 가리사니는 몸으로 마음으로 드러난다. 여행을 단지 시공간에서만 이뤄지는 활동으로만 보지 않으면 말이다.

장윤정 eyjangnz@gmail.com 컴퓨터 전문지, 인터넷 신문, 인터넷 방송 분야에서 기자로, 기획자로 10여년 간 일했다. 출판 기획 및 교정을 틈틈히 하면서 글을 쓰고 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살면서 본 애보리진과 마오리족의 예술, 건강한 사회와 행복한 개인을 위한 명상과 실수행에 관심이 많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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