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에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季節)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梅花) 향기(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감상의 글
이육사의 광야를 접할 때면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떠오른다. 선생님은 시를 가르치실 때마다 낭송을 하셨는데 많은 낭송 중 이 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시의 흐름에 맞게 어떤 부분은 높은 목소리로 힘차게, 또 어떤 부분은 낮고 비장하게 낭송하셨다. 시와 낭송이 잘 어울렸다. 많은 세월이 지났어도 광야를 접할 때마다 그 분의 낭송이 떠오른 걸 보면, 수업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육사 시인은 러일전쟁이 발발하던 해인 1904년에 경북 안동에서 출생했다. 그 해 2월에 일본군이 대한제국에 굴욕적인 외교문서인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조인시켰으니, 출생 때부터 나라가 평온하지 못하였다. 시인은 20대 초반인 1925년에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과 관련하여 3년형을 받고 수감되었다. 이 때 그의 수인(囚人) 번호가 264번이었는데, 이 때 시인의 호를 육사(陸史)로 정했다고 전한다. 시인의 본명은 원록(源綠)이다. 시인은 1929년 출옥 이후 광주학생운동, 대구 격문사건(檄文事件) 등에 연루되어 모두 17번의 옥고를 치렀다. 결국에는 해방 직전인 1944년 1월 베이징 감옥에서 작고하였으니 얼마나 안타까운가.

시인은 독립 투쟁과 함께 작품 활동도 활발하게 하였다. 1933년에 육사라는 필명으로 ‘황혼’이라는 첫 작품을 발표한 이후, ‘광야’, ‘청포도’, ‘교목’, ‘파초’, ‘절정’ 등 식민지하의 민족의 처지에 대한 슬픔과 강렬한 저항 의지를 담은 시들을 다수 발표하였다.

이 중 ‘광야’는 육사의 대표작으로 육사와 관련한 검색어 중 1위를 다툰다. ‘광야’에는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이 영원할 것이라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다. 1~3연에는 우리 국토가 까마득한 과거로부터 존재하였음을 말하고, ‘모든 산맥들이/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에는 우리 국토의 신성성과 불가침성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4연에서는 일제강점기 엄혹한 환경을 ‘눈’이라는 시어로 상징하였고, 비록 힘들다 할지라도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겠다고 한다. 지금 현재는 조국 광복의 길이 보이지 않고 내 개인의 능력은 미미하더라도 조국광복에 대한 의지를 감추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지를 이어 5연에서는 천고(千古)의 뒤에 초인이 올 것이라고 말한다. ‘천고의 뒤’에는 ‘언젠가는’, ‘반드시’ 등의 의지를 담겨 있다. 어려운 시기에도 이렇게 광복에 대한 강한 열망을 표출한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보면 숙연한 마음에 머리가 절로 숙여진다.

가수 김광석의 ‘광야에서’는 이육사의 ‘광야’와 광활한 국토를 언급하고 미래지향적인 측면에서 연결이 될 수 있다. ‘광야에서’의 노랫말 일부를 소개한다. ‘해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우리 어찌 가난하리오/우리 어찌 주저하리오’

최성원 기자 ipsi1004@nextdaily.co.kr 시인이자 칼럼니스트. 시집으로 「천국에도 기지국이 있다면」이 있다. 현재 서울 동부이촌동에서 국어와 논술을 가르치고 있으며, 저서로는 「7일 만에 끝내는 중학국어」 등이 있다. 또 ‘하얀국어’라는 인기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시와와(詩와와)’는 ‘시 시(詩)’에 ‘와와(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웃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떠들어 대는 소리나 모양)’를 결합하였다. 시 읽기의 부흥이 오기를 희망한다. 100편의 시를 올릴 계획이다. 걷기와 운동, 독서와 집필, 사람 만나는 것, 그리고 야구를 좋아한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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