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3일 월요일, 밀양 영취산 남봉 산마루에 고즈넉한 소나무 숲. 곡절 많은 선생님께서 이곳으로 오신지 어느덧 일 년째 되는 날이다. 생전에 선생님과 인연이 있는 분들의 연락을 받으면 안내를 자처하며 마치 뒷산처럼 수시로 동행했던 곳이다. 그곳에 갈 때마다 약속하는 거제의 손응현 형은 일주기 이후 만나지 못해 아쉬웠다. 이번에는 만화가 정용연, 조선 노동자 조종규, 하루를 쓰는 작가 최성문의 초행길을 안내했으니 그들이 또 새로운 안내자가 될 것이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따사로운 햇살 아래 진달래꽃 만발한 산길을 천천히 걸었다.

2016년 4월 3일 일요일, 영남루가 바라 뵈는 밀양강가에서 벚꽃 구경을 겸한 아침 산책을 마치고 전날에 이어 다시 삽과 곡괭이를 들고 선영으로 향했다. 우거진 숲을 치우고 터를 잡은 뒤 땅을 파는 동안 빗줄기가 갈수록 굵어졌다. 옷과 신발이 흥건히 젖었지만 다행히 서울에서 유족들과 친지들이 도착하기 전에 모든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생전에 선생님께서는 할아버님 홀로 외롭게 계신 이곳으로 오고 싶어 하셨지만 굳이 학교 뒷산으로 모시겠다던 성공회대학교 측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다. 그 결정이 차일피일 미뤄지다 최종적으로 불가 통보를 받았지만 오히려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결국 타계하신지 80일 만에 당신이 그토록 원하시던 할아버지 곁에 영면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2006년 4월 3일 월요일, 선생님께서 서오릉을 찾았는데 하필 휴무일이라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노라 하셨다. 1966년 4월 3일 일요일 서울대학교 문학회 회원 20여 명과 함께 서오릉으로 한나절의 답청놀이를 다녀온 바로 그 40주년 기념일에 말이다. 김무종 선배가 2주 뒤에 서오릉 모임을 확정하고 공지하자 전국에서 많은 회원들이 함께했다. 선생님의 대학후배 권만식 선생은 책의 내용과 달리 자신이 더 씨름을 잘 했다는 너스레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권 선생의 증언에 따라 옛 추억의 순창원 앞 잔디밭에서 서순환 형의 심판으로 씨름대회가 있었는데 정영교 형이 들배지기로 김인석 형을 넘어뜨릴 때 활짝 웃으시던 선생님과 이승혁 형의 미소가 아른거린다.

“언젠가 먼 훗날 나는 서오릉으로 봄철의 외로운 산책을 하고 싶다. 맑은 진달래 한 송이 가슴에 붙이고 천천히 걸어갔다가 천천히 걸어오고 싶다.”
“Some day in the future, I want to take a lonely walk to Seo-O-Reung. With a bright azalea on my plastron, I want to go slowly on foot to Seo-O-Reung and slowly walk back.”

청구회 추억.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1969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수감된 사형수 신영복의 유서와 같은 글이다. 서슬 퍼런 독재시절 촉망받던 젊은 교수이자 장교였던 청년이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총살형을 기다리는 초조한 시간 동안 세상에 두고 온 부채감을 정리하던 그리움의 산물이다. 우연히 인연을 맺은 달동네 어린이들과의 순수했던 우정의 기승전-미결을 꼼꼼하게 적은 것으로 세상과의 마지막 인사가 될 수 있는 기록이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6시가 되면 아직도 장충체육관 앞을 서성이며 오지 않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여섯 어린이들을 걱정하며 미안한 마음으로 남긴 글이다.

“이때부터 우리는 매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6시에 장충체육관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이 약속은 1968년 7월 내가 구속되기까지 매우 충실하게 이행된 셈이다. 다만 만나는 시간이 조금씩 일러지는 기현상(?)을 연출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약속시간이 오후 6시임에도 불구하고 이 녀석들은 꼭꼭 5시부터 나와서 기다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약 30분 가량 일찍 나타나서 5시 30분에 만나게 되면 이제는 4시 30분부터 나와 있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내 쪽에서 30분쯤 더 일찍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결국 6시에 만나자는 약속은 에스컬레이션을 거쳐 어느덧 5시로 변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제야 우리는 군축회담이나 하듯 다시 6시로 되돌아 갈 것을 결의하고 6시로 되돌아가면 다시 동일한 에스컬레이션을 거쳐서 다시 5시에 만나게 되곤 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이 만나서 하는 일이란, 무슨 할 일을 만드는 일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만나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나누는 그런 사소한 일에 불과하지만 그저 만난다는 사실 그것이 그냥 좋을 뿐이었다. 괜히 자기들끼리 시키지도 않은 달음박질 내기를 해보이기도 하고, 광장 가장자리의 난간에서 서로 떨어뜨릴 내기를 하거나, 모자를 뺏어서 달아나기를 하는 것들이 고작이었다.”
- 청구회 추억 47쪽 or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36쪽 or 신영복의 엽서 36쪽

영영 사라질 뻔 했던 명작 ‘청구회 추억’은 하루 두 장씩 지급되는 재생종이로 된 휴지에, 항소이유서를 작성하기 위해서 빌린 볼펜으로 썼다. 3년 뒤 대법원의 파기환송을 거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안양교도소로 이송되던 날, 당신을 관리 감독하는 한 헌병에게 집으로 보내줄 것을 부탁한 뒤 까맣게 잊고 살았다는 것이다. 20년 뒤, 1988년 광복절 특사로 출소할 무렵 햇빛출판사를 통해 출간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초판본에는 실리지 못했던 이유도 원고를 분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출소 후 살았던 우이동(선생님의 호가 牛耳, 쇠귀인 까닭)을 떠나 목동으로 이사를 할 때 춘부장 서실에서 한 덩어리의 휴지묶음과 함께 발견된 불굴의 명작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헌병에게 독자로서 감사의 큰절을 올리고 싶다.

‘청구회 추억’은 1993년 2월에 선생님의 친구들이 너른마당의 이름으로 ‘엽서’ 영인본을 출간하면서 처음 세상에 알려졌고, 월간중앙을 통해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돌베개출판사의 1998년 개정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2003년 개정판 ‘신영복의 엽서’ 각각 앞부분에도 수록되었다. 선생님께서 타계한 한 달 뒤에 재출간된 ‘처음처럼’ 초판본 별책부록으로도 한 번 더 소개되는 등 독자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된 불후의 명작이다. 영화감독 이창동, 무일영화사 최광석 등 여러 사람들이 영화로 만들기 위해 깊이 있는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고, 국민대학교 김 모 교수는 주연 배우로 지진희를 추천하는 등 매우 세부적으로 검토했다는 증언이 있다.

2008년 여름에 단행본으로 처음 만들어진 ‘청구회 추억’은 조병은 교수의 적절한 영문 번역과 김세현 화백의 따뜻한 그림이 조화로운 책이다. 이미 10년 전부터 번역을 부탁받고 고민했다는 역자는 또 한 사람의 저자나 마찬가지다. 외국인들도 더 많이 읽을 수 있다면 좋겠고, 영작 공부에도 귀감이 될 만한 명문장이라 할 수 있겠다. 역자가 선생님의 직장 동료였던 것도 행운이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 중인 ‘전장의 아이들’이 김영덕 화백의 벽제 자택에 걸려 있을 때 찾아간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그것은 전쟁 직후인 1955년 작품으로 변변치 못한 옷차림의 청구회 어린이들과 선생님이 교감할 수 있는 뿌리 혹은 모티브였다고 한다.

"나는 어린이들의 세계에 들어가는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중요한 것은 '첫 대화'를 무사히 마치는 일이다. 대화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은 서로의 거리를 때에 따라서는 몇 년씩이나 당겨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꼬마들에게 던지는 첫마디는 반드시 대답을 구하는, 그리고 대답이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만일 "얘, 너 이름이 뭐냐?"라는 첫마디를 던진다면 그들로서는 우선 대답해줄 필요를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는 불쾌감으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뱅글뱅글 돌아가기만 할 뿐 결코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반드시 대답을 필요로 하는 질문을, 그리고 어린이들이 가장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놀림의 느낌이 전혀 없는 질문을 궁리하여 말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 청구회 추억 13쪽 or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31쪽 or 신영복의 엽서 28쪽

선생님은 부산상고 재학시절에 미술반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열 살 연상의 미술교사 김영덕 화백을 많이 따랐다고 한다. 그분의 작업실을 자주 찾았고 그곳에 걸려있던 작품을 통해 전쟁의 비극과 공포의 압축을 느꼈으며 그 모습은 청구회 어린이들이 풍기는 이미지와도 연결되었다고 말씀하셨다. 불광동시외버스터미널에서 서오릉까지 논둑길은 이제 완벽하게 도시화 되었고, 걸어서 한 시간 거리임에도 사람들은 더 이상 그 거리를 걷지 않는다. 50여 년 전 문화동 산기슭에서 초라한 행색으로 서오릉까지 봄소풍을 가던 낭만파 달동네 소년들의 분위기에 압도된 것은 바로 ‘전장의 아이들’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청년 신영복의 관점에서는 괴롭고 미안한 이야기도 사실은 지키지 못한 약속의 뒤안길에서 문화동 달동네의 살벌한 분위기를 알 수는 없었다.

청구회 어린이는 모두 여섯 명이지만 중간에 두 명이 이사를 가면서 “요사이는 좋은 아이가 참 드물다.”는 이유로 한 동안 네 명에 머물렀다가 새로 두 명이 충원되었으니 연인원 여덟이다. 1952년생 조대식은 당시 14살로 유일하게 중학교에 진학한 상태였으며,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자전거포에 취직한 1954년생 이덕원은 스무 살이 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비운의 인물이고, 이덕원의 뒷집에 살았던 1955년생 손용대는 일본 체류 중에 뉴스로 소식을 접하고 선생님의 장례식장을 다녀갔다. 이 세 사람은 숙명여대 교수시절 선생님에게 처음 편지를 띄워 청구회 결성의 주역이 된 인물이다. 그밖에 청량리로 이사 간 뒤 한 번 다녀갔지만 영영 연락이 끊긴 이대형과 이규한·이규승 형제, 반장집 아들 김정호 등이 등장한다.

"1968년 1월 3일에 청구회 꼬마들을 우리집으로 초대하여 간소한 회식을 갖자고 제의하여 이들의 승낙을 받았다. 그러나 약속날인 1월 3일 12시 동대문 체육관 앞에는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이들의 초대를 위하여 어머니에게 이들의 면면을 말씀드려 '회식'의 준비에 각별한 애정을 느끼게끔 터를 닦아놓기까지 하였던 터였다. 12시부터 약 1시간 40분 동안 추운 버스정류장에서 이들을 기다렸다. 처음 한 시간은 12시 약속을 1시 약속으로 착오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그 후 40분은 도중에 무슨 일로 좀 늦어질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1시간 40분을 행길가에 서서 기다렸다. 흔히 약속 시간보다 1시간씩이나 일찍 나타나곤 하던 이 녀석들의 특유의 버릇을 생각하며 근처의 담뱃가게에 소상히 문의해 보는 일도 잊지 않았다."
- 청구회 추억 89쪽 or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44쪽 or 신영복의 엽서 49쪽

책 속에 실명이 등장하지 않는 유일한 청구회 어린이는 손용대의 막내 동생인 1958년생 손응현이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그는 또래들이 대개 그러하듯 귀찮아하는 동네 형들에게 따돌림 당하면서도 악착같이 함께하며 아름다운 청년 신영복을 동경했고,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잘 자라 청구회 회원 중 유일하게 대학을 나와 전문경영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신당동 산17번지 옛집을 그리워하며 신라호텔 입구 아스팔트 위에서의 추억을 회고하는 그의 서재에는 친형 손용대를 통해 전달받은 선생님의 글씨 ‘더불어숲’이 걸려있다. 그는 1968년 정초에 이유도 모르고 청구회 어린이들로부터 바람맞은 선생님의 기억 이면의 사건들에 대해서 또렷하게 증언했다.

그 살벌했던 시절, 청구동 아이들은 뭔가 심상치 않은 동네 분위기에 잔뜩 움츠려 있었다고 한다. 썩 괜찮은 청년으로 칭찬이 자자했던 신영복이 갑자기 비호감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몇 가지 조짐이 있었다. 국가 기관 사람으로 추정되는 수상한 이들이 동네 사람들에게 신영복에 대해 탐문하기 시작했고, 김신조 간첩사건, 인혁당 사건, 통일혁명당 사건 등이 신문에 거론되면서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마을사람들이 청구회 어린이들에게 선생님의 초대에 응하지 말라고 말렸다는 것이다. “너희들이 안 가길 정말 잘했다.”고 격려 했으며, “만약 너희들이 그 초대에 응했더라면 북으로 끌고 갔을 것이다.”라는 식으로까지 말했다는 것이다. 청구회 소년들은 충격으로 입을 다물기 시작했고, 나중에 선생님이 수배되고 붙잡혀 가는 신문을 보며 “거봐! 빨갱이였잖아.”로 확신시켰다는 것이 그 시절의 풍경이었다는 것이다.

“중앙정보부에서 심문을 받고 있을 때의 일이다. ‘청구회’의 정체와 회원의 명단을 대라는 추상 같은 호령 앞에서 나는 말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어떠한 과정으로 누구의 입을 통하여 여기 이처럼 준열하게 그것이 추궁되고 있는가. 나는 이런 것들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8월의 뜨거운 폭양 속에서 아우성치는 매미들의 울음소리만 듣고 있었다. 나는 내 어릴적 기억 속의 아득한 그리움처럼 손때 묻은 팽이 한 개를 회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답변해주었다. ‘초등학교 7학년, 8학년 학생’이라는 사실을. 그후 나는 서울지방법원 8호 검사실에서 또 한 번 곤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청구회 노래인가?“ 검사의 반지 낀 손에 한 장의 종이가 들려 있었다. 거기 내가 지은 우리 꼬마들의 노래가 적혀 있었다.”
- 청구회 추억 101쪽 or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45쪽 or 신영복의 엽서 51쪽

신영복 선생님은 수많은 저서를 남겼으나 ‘청구회 추억’ 만큼 간결하고 쉽게 그 삶의 철학과 글 솜씨를 드러낸 것이 있을까 싶다. 진달래 만발하던 서오릉 길에서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 우정과 인간애, 인생역정, 비극적인 이 나라의 현대사가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훗날 선생님의 옥중 엽서는 글자 한 자 고쳐지지 않을 만큼 교정 교열이 완벽한 예술적인 명작들임에 반해 ‘청구회 추억’은 고쳐 쓰고 첨삭한 흔적도 있고, 활자화 되는 과정에서 아주 조금 다듬어지기도 한 보다 인간적인 엽서였다는 점에서 더욱 따뜻하다. 언젠가 선생님 연구실로 한 통의 낯선 전화가 걸려 왔는데, 상대방이 우물쭈물 자신을 설명 못하고 있을 때 “너, 용대지? 손용대!” 수십 년이 흘러도 그 목소리를 기억하셨다던 선생님을 이야기하는 애틋한 증언에 나는 술잔을 떨어뜨렸다.

2006년 4월 16일, 그 아름다운 유언 같은 기록 ‘청구회 추억’ 말미에 이야기하는 선생님의 소원은 결국 다른 형식으로 이뤄졌다. 혼자서 봄철의 외로운 산책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서오릉 둘레길을 수다스럽게 건널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질문이 많았던 나도 그날 참 피곤하게 괴롭혀드렸으나 선생님은 단 한 번도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으셨기에 기억이 선명해질수록 부끄럽고 마음 아프다.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2014년 4월 16일에 노랑종이배 그림과 함께 붓글씨로 써주신 ‘아이들을 구하라!’는 루쉰의 글을 인용한 선생님의 정신이다. 그 이후로도 하필 매년 4월 16일에 서오릉으로 진달래 꽃구경을 떠나는 우리들의 일상은 선생님과 함께 했던 서오릉 소풍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우리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우리가 어린이들과 대화하는데 조금 더 익숙한 것도 모두 청구회 추억을 읽었기 때문이 아닐까?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사교적인 생활인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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