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으리
(朝聞道 夕死可矣)
- 공자, 「논어」 이인(里仁) 편 -

충남 계룡시에 있는 형님 댁에서 설을 지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설날 당일 아침에 경기도 용인에서 형님 댁으로 향하는 길은 두 시간 남짓 소요되어 가볍게 드라이브 하는 기분으로 운전하였으나, 오후에 거슬러 오는 길은 수도권으로 복귀하는 차량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출발할 때부터 만만찮은 정체가 예견되었다.

고속도로 교통상황을 보여주는 지도는 이미 모든 구간에서 붉은 선을 띠며 극심한 정체 상태임을 표시하고 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교통 안내 역시 정체구간보다 막히지 않은 곳을 나열하는 게 훨씬 수월해 보일 정도로 모든 도로의 정체상황을 쉴 새 없이 언급하고 있다. 도로가 마치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다 등 현장 리포터들의 다양한 멘트는 숱한 정체 표현의 지겨움에 따른 진화일 것 같다.

결국 내비게이션 앱을 실행하고, 그에게 길을 묻는다.

○ 길 위에서 길을 묻다
이제 낯선 길을 떠날 때에는 무조건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수년 전 익숙했던 길이더라도 그새 또 다른 도로가 연결되어 새로운 도로망을 구성하고 있기 일쑤고, 실시간 교통상황을 반영한 우회도로 안내의 매력을 한 번 맛보고 나면 고집스레 내 갈 길만을 외치기에는 쉽지 않다. 내비게이션이 가라는 대로 운전하는 모습이 마치 ‘임기사’가 된 것 같아 종종 반항도 해보지만, 어느 샌가 고분고분 내비게이션의 말을 듣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고 만다.

내비게이션은 일단 고속도로의 상황을 감지하고 도저히 저 무리에 끼어들면 헤어나오지 못하겠다고 판단했는지, 세종시에 있는 정부종합청사를 관통하는 일반국도로 길을 안내했다. 내려올 때보다는 차량이 다소 늘었지만 세종시까지 향하는 길은 나름 순탄했다.

문제는 세종시를 빠져나오면서 정안나들목을 향해 달리던 때다. 정안나들목으로 향하는 뻥 뚫린 너른 길을 두고, 딱 보기에도 좁고 이미 차량들로 밀려 있는 샛길을 추천해온 것이다. 군소리 없이 따라야만 별 탈이 없다던 3대 멘트(집에서는 아내의 말, 골프장에서는 캐디의 말, 차에서는 내비게이션의 말)라고는 하지만, 이성적인 판단으로든 감성적인 판단으로든 솔직히 이건 아니다 싶다.
다른 내비게이션 앱을 하나 더 실행하여 길을 조회해 본다. 한 쪽의 증언만을 듣는 것보다 양자 대질심문을 하겠다는 심사다. 새로 증인석에 선 내비게이션은 좀더 현실적인 설득력 있는 도착시간을 예상하며 자신 있게 정안나들목 쪽 길을 추천한다. 어라, 이것들 봐라.

조수석에 앉아 있는 아내의 얼굴을 한 번 힐끗 쳐다보며 배심원의 동의를 얻는다. 언제 동의를 구했던 적이 있냐며 알아서 하라는 눈치다. 마침내 판결을 내린다. 증인들의 증언을 참고하고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 볼 때 본 기사, 아니 본 판사는 정안나들목 쪽으로 향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사료됨. 땅땅땅!!!

○ 내비게이션이 내게 길을 묻다
정안나들목에 이르니 흡사 주차장을 옮겨놓은 듯한 광경이 펼쳐진다. 각 방향의 여러 도로에서 합류하는 차들이 한데 엉켜서 병목현상을 이루고 있다. 조금 전 판결이 옳았던 건지 글렀던 건지 알 수 없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처럼 돌이킬 수 없다.

갑자기 내비게이션이 길을 물어 온다. 얼마 전(불과 5분 전!) 추천한 것처럼 고속도로를 타게 되면 10분 빨리 가긴 하겠지만 14Km 정도 돌아갈 테고, 6,100원이라는 통행료도 낼 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니 지금이라도 샛길로 빠져서 일반국도를 타고 간다면, 10분 정도는 더 걸리겠지만 꽤 쏠쏠한 규모의 연료비용과 통행료를 아낄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길을 선택할래요, 그 잘난 임기사님?

그림1 내비게이션은 종종 운전자를 시험에 들게 한다.
그림1 내비게이션은 종종 운전자를 시험에 들게 한다.

자기 주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결정지원을 위한 기초 데이터들을 던져주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겪었던 지긋지긋한 숱한 고충을 너도 한 번 당해보라는 심보다. 1번 보기를 선택하자니 시간에 허덕이는 현대인의 모습을 들킬 것 같고, 2번 보기를 선택하자니 그깟 몇 천 원에 쩨쩨하게 구는 것처럼 보일 것 같다. 결국 그런 이유보다는 훨씬 더 타당한 이유인 ‘화장실이 급하므로 일단 고속도로를 타고 휴게소에 들르겠다’는 핑계를 대고 과감히 1번을 선택했다. 그 후, 천안을 지나면서 다시 일반국도로 내려서서 쭉 올라오기는 했지만...

○ 길을 비용으로 계산하다
내비게이션은 대표적인 공간정보 시스템이자 서비스다. 지도라는 밑그림 위에, 노드 및 링크(각 교차로와 교차로를 연결하는 도로라고 이해하면 쉽다)로 이루어진 도로 네트워크 데이터가 그물망을 이루고, 각 노드와 링크의 속성들(몇 차선이며, 제한속도는 얼마며, 좌회전은 허용되며, 일방통행인지 아닌지 등등)이 결합된 정보를 기반으로, 사용자가 설정한 출발점과 도착점 사이의 최소 비용을 구해서 알려주는 길찾기 기능을 구현한다. 또한, 사용자의 시시각각 변하는 현 위치를 기반으로, 또한 시시각각 변하는 교통상황을 기반으로, 최적의 길을 알려주는 길안내 기능을 제공한다. 공간정보 데이터, 공간 분석 및 예측 등 다양한 기술이 어우러진 총합이다. 사용자가 길을 물으면, 공간정보 담당 서버는 그에 대한 답을 각종 연산을 통해 구한 후 단말기에 던져주고, 단말기는 그 값을 지도 및 거리, 방향, 남은 시간 등의 각종 정보와 함께 보여준다.

이 내비게이션은 기본적으로 ‘비용(cost)’을 기준으로 설계한다. 최소비용을 계산하는 방법으로는 최단 거리(유류비를 아낄 수 있으며 그만큼의 소소한 차량 감가삼각을 줄일 수 있다)를 뽑아내거나, 최단 시간(시간에 대한 금전적 가치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꽤 중요한 비용 요소임에 틀림없다)을 구하게 된다. 물론 유료도로 포함에 따른 통행료 부담도 비용 중 하나로 작용할 수 있다.

아래의 두 화면(그림 2와 그림 3)은 최근 필자가 고민에 빠진 출근 루트다. 그림 2의 코스(편의상 이하 ‘경로 1번’)는 영동고속도로와 과천-봉담 유료도로를 포함(통행료 2,200원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총 거리 약 28Km에 소요시간은 약 35분이 소요된다. 그림 3의 코스(편의상 이하 ‘경로 2번’)는 일부 용인서울 유료도로가 포함되지만 무료 구간만 요령껏 이용하는 것으로, 총 거리 약 20Km에 소요시간은 약 50분이 소요된다.
즉, 최단소요시간의 경우는 경로 1번이고, 최단거리의 경우는 경로 2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2 경로 1 : 유료도로를 포함하고 있는 최단시간 코스
그림2 경로 1 : 유료도로를 포함하고 있는 최단시간 코스

그림3 경로 2 : 시간은 다소 걸리지만 통행료 발생이 없는 최단거리 코스
그림3 경로 2 : 시간은 다소 걸리지만 통행료 발생이 없는 최단거리 코스

이동거리는 유류비와 관련이 있으므로 이에 대한 기준은 연비 리터당 12Km로,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1,500원으로 산정해 보았다. 문제는 시간을 어느 정도 금액으로 환산하느냐에 대한 문제인데, 이에 대해서는 최저임금 시간당 6,470원과 당구비 기준인 시간당 12,000원의 경우로 나누어 보았다.
[표 1] 및 [표 2]와 같은 답이 나왔다.

[표 1] 최저임금 기준인 시간당 6,470원을 적용한 경우
[표 1] 최저임금 기준인 시간당 6,470원을 적용한 경우

[표 2] 당구비 기준인 시간당 12,000원을 적용한 경우
[표 2] 당구비 기준인 시간당 12,000원을 적용한 경우

[표 1]처럼 시간의 가치를 최저임금 수준으로 여기는 경우라면 경로 2번을 선택하는 쪽이 매번 1,583원 정도 절약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시간가치비용을 [표 2]에서처럼 최소한 당구비 기준액으로만 증가시켜도 그 격차는 줄어들어서 불과 200원 차이 밖에 나지 않게 된다. 시간이 곧 고가의 비용인 고소득자의 경우라면 전세는 역전될 게 뻔하다.
결국 아무리 내비게이션을 사용하더라도, 스스로 본인의 시간가치비용을 얼마로 판단하느냐에 따라 길에 대한 선택은 다양할 수 있을 테다.

○ 길을 묻는다는 것은
길을 가다가 말을 걸어오는 낯선 사람들과 종종 마주치곤 했다. 인상이 좋네, 좋은 기운이 느껴지네 등의 말 건넴은 마침내 잠시 이야기 나눌 시간이 있느냐는 쪽으로, 그리고 그것은 결국 ‘도(道)를 아느냐’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나는 말을 섞기에는 지금 내 갈 길이 바쁜 상황이며, 신분 자체가 이미 ‘지도’하는 사람이니 상관없다고 했다. 그 지도가 地圖면 어떻고, 知道면 또 어떠냐는 심산이다. 지도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길에 대한 것을 아는 과정’과 같으니 틀린 말도 아니겠다.

‘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요소였다. 예수 역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라고 했었다. 동양 철학이나 불교에서도 ‘득도(得道)’를 미혹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피안으로 건너는 것으로 의미하고 있다. 사람들은 늘 길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묻고 구하고 헤매고 답하고 들었다.

객관적인 자료 기준에서 산술연산만을 하는 내비게이션에게 나의 갈 길을 묻는다는 것 자체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공허하다. 내비게이션의 음성에 따라 운전하면서 결국 나 역시 비용과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현대인이구나 싶기도 하다. 철학적 개념인 길이 아니더라도, 거리와 시간 이외에 길이 주는 심리적, 정서적 느낌이라는 것들은 내비게이션이 아직 비용 연산에 고려하지 못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나는 주택가와 벌판과 저수지를 끼고 있는 경로 2번을 선택했다. 나의 인건비 가치를 최저임금 수준으로 여겨서는 결코 아니다. 여러 조건의 비용에 대한 셈보다는 매번 다른 생각과 느낌을 마주할 수 있는 풍경에 대한 가치가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계속 사람들은 지도에게 길을 묻고, 지도는 길을 알려줄 것이다. 언젠가는 지도가 심리적 만족감마저 비용으로 연산하여 알려줄 수 있는, ‘느림의 미학’마저도 갖춘 길을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는 고은 시인의 시 구절을 닮은 길도 충분히 추천 가치가 있는 길일 테니 말이다.

임영모 0duri@naver.com 대학교에서는 국어국문학을 전공하였다. 컴퓨터잡지사 기자로 시작하여, 애니메이션, 출판, 모바일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후 GIS 업계에 종사한 지 10년이 넘었다. GIS 분야에서 전통적 GIS보다는 인문학 기반의 다양한 공간정보 기획을 진행하고 있다. 지도를 통해 볼 수 있는 다양한 시각과 활용에 대해 이야기한다.

(*본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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