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있어 지도란 저울과 같다.
사람살이의 저울이요 세상살이의 균형추요 생사갈림의 나침반이다. 손쉽게 땅의 요긴함과 해로움을 알아보게 하고, 완만한 것과 급한 것, 너른 것과 좁은 것, 먼 것과 가까운 것을 미리 분별하게 할 뿐 아니라, 시기를 살펴 위급할 때엔 가히 생사를 손바닥처럼 뒤집을 수 있으니 어찌 이것을 만민의 저울이라 하지 않겠는가.
- 박범신 「고산자」에서

고산자 김정호에 대한 영화 ‘고산자-대동여지도’가 최근 개봉되었다. 학창시절, ‘조선 후기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는 짧은 역사적 사실만 배웠던 터다. 김정호의 호가 ‘고산자(古山子)’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업무상 국토지리정보원에 출입하며 ‘고산자방’이라는 소강당 이름에 궁금증을 갖게 된 후였고, 대동여지도가 그토록 어마어마한 가치를 띠고 있다는 것도 지리정보 업계에 뛰어든 후 지도를 만지작거리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영화에 대한 기대가 컸던 탓일까? 영화를 보고 나와서 다소 헛헛한 느낌이 들어서 영화의 원작소설인 박범신의 ‘고산자’를 읽었다. 어차피 소설도 픽션(Fiction)이고, 그 픽션을 소재로 만든 영화도 픽션이다.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 등 뛰어난 작품은 남아 있지만, 그에 대한 인물 관련 기록은 지인들의 글 속에 한두 줄의 짧은 평으로 남아 있는 게 고작이다. 심지어 생몰년 미상, 즉 언제 태어났으며 언제 사망했는지조차 그저 추정하는 수준인 고증자료로 비추어 보면, 그의 인생 자체는 소설이나 영화로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이미 픽션에 가까운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고산자에 관련된 영화와 소설을 본 후, 그와 그가 남긴 대동여지도를 통해 현재의 공간정보를 살펴보면 어떨까 싶어서 한 번 정리해 보았다.

대동여지도 목판본의 모습(이미지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대동여지도 목판본의 모습(이미지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 모름지기 지도는 정확해야 한다
그가 지도에 매진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소설과 영화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그릇된 지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도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양면성으로 작용한다. 지도가 없으면 사람의 오감이 부풀어 오를 대로 올라 스스로 지도가 되지만, 지도가 있으면 지도를 믿기 때문에 오감은 만삭의 돼지처럼 그 운행이 느려진다. 엉터리 지도가 사람들을 떼죽음으로 몰아넣기 쉬운 것은 그 때문이다.”라며, 박범신 작가는 소설 ‘고산자’에서 정확한 지도의 중요성에 대해 꼬집는다.

총 22권으로 되어 있는 고산자의 대동여지도는 현대 지도와 견주어 크게 차이가 없을 정도의 놀라운 정확성을 자랑한다. 현대의 경위도 개념이 도입된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동서 방향으로 19단, 남북 방향으로 29단으로 전국을 나누고, 거의 일정한 축척으로 우리나라의 산과 하천과 길과 마을을 대동여지도에 투영하였다.

더구나 산에 대해서는 그저 산봉우리에 이름을 표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산을 포함하고 있는 산맥의 고저까지 표현하여 두었다. 현대의 등고선과 같은 표현은 없지만 고봉준령의 모습을 평면상에 시각적으로 나타낸다. 길의 모습을 다루는 데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강과 하천 같은 물길을 표현하여 두었으나 현대의 도로에 해당하는 길은 직선으로 표시하여 이질적인 정보임을 표현하였고, 도로를 나타낸 직선 위에는 10리 간격으로 방점을 찍어 이동에 필요한 거리를 가늠케 하였다. 평탄한 길에서는 간격이 넓고 기복과 굴곡이 심한 길에는 촘촘한 방점을 찍어 상대적인 거리를 표기하였다. 즉, 땅의 모습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이동까지 고려하였다고 할 수 있다.

현대에 와서도, 갱신되지 않은 지도 데이터를 가지고 낯선 동네를 찾아가거나 내비게이션을 이용해서 경로 안내를 받아본 경험이 있다면 지도의 정확성에 대해서 다들 한 마디씩 거들었던 적이 있을 것이다. 모처럼 맛집을 찾아갔다가 발길을 되돌려야 할 수도 있으며, 낯선 길을 내비게이션에 의지하여 운전하다가 공사 중인 길을 만나서 애먹어 봤던 적도 많을 것이다. 정보는, 정확하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애초부터 없는 편이 낫다. 박범신의 소설 속 한 대목에서는 지도를 믿었기에 ‘만삭의 돼지’가 되었으며, 현대 사회에서는 잘못된 지도를 보면서 ‘눈뜬 장님’이 되기도 한다. 모름지기 지도는 정확해야 한다.

◇ 마땅히 지도는 단순하고 편리해야 한다
대동여지도는 지도의 시각적 디자인과 휴대 편의까지 고려한 지도다. 정확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정보를 한 곳에 담다보면 실용적인 측면은 뒤로 처지기 일쑤다. 방대한 양을 담았다고 자랑할 수 있지만, 정작 사용자가 고려되지 않은 정보는 활용처가 불분명한 허섭스레기 정보가 되게 마련이다. 모든 정보는 정확해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정보 제공 측면에서는 단순하고 편리해야만 한다. 결국은 ‘사용자의 정보 활용성’이라는 곳에 초점을 맞추어 제작해야 한다는 서비스 제작 원칙과 일맥상통하다.

과학적인 일러두기 방식을 적용하여 방대한 정보를 단순하게 표기하였다'
과학적인 일러두기 방식을 적용하여 방대한 정보를 단순하게 표기하였다'

그는 ‘지도표’라는 것을 별도로 마련하여 적용하였다. 이른 바 현대 지도에서의 범례(일러두기)와 동일한 방식이다. 우선 14개의 항목을 만들고 22종의 기호를 사용하여 위치를 표시하였다. 현대 지도에서 POI(Point Of Interest : 관심지점) 분류체계에 따른 아이콘 표시 방식과 동일한 스타일이다.

대동여지도 이전 작품인 청구도에서 적용했던 글자 표기 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기존에는 지도상에 위치만 표시하고 해당 지명을 지도 상하좌우의 여백에 새겨 넣는 참조형 방식을 사용하곤 했었지만, 대동여지도에서는 단순화된 기호와 함께 지명 병기 방식을 도입하여 글자 수를 과감하게 줄이는 한편, 인지성 및 정확성을 동시에 확보하였다. 많은 정보를 지도 위에서 다루면서도 이용자의 해석 오류는 줄이게 하는 UI이면서 UX를 적용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지도의 편리성에 대한 수많은 고민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동여지도의 특징 중 하나는 분첩 및 절첩 방식의 도입이다. 우리나라 전국을 위도에 따라 29개의 층으로 나누고(분첩), 그것을 각각의 책자 형태로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도록(절첩) 고안하였다. 책을 펼쳐놓으면 지도가 되고, 그 지도를 접으면 책이 되는 아코디언과 같은 방식은, 보관 및 휴대의 편의성까지 고려하여 기존 지도와 비교할 때 훌륭한 차별화 요소를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22권의 책자 형태로 된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전체 지도의 크기는 남북으로 6.6미터, 동서로 4.2미터에 이르는 3층 건물 크기의 지도이지만, 목적과 용도에 따라서 필요한 지도만 지니고 이동할 수 있는 형태를 강구하여 적용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 땅과 연결된 각종 정보 역시 소홀할 수 없다
땅은 그저 형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도는 땅(地)의 모습을 그림 형태(圖)로 담아놓은 것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땅과 얽힌 다양한 정보가 숨어 있다. 현대 공간정보에서 말하는 속성정보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고산자는 ‘대동여지도’라는 그림 모양의 지도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22권의 대동여지도만큼 가치를 따져봐야 하는 것이 바로 ‘대동지지(大東地誌)’라는 지리지(地理誌) 저술 작업이다. 그는 1861년 대동여지도 목판본 간행 이후 바로 그 동안 축적한 각종 지역정보를 한데 모아서 32권 15책 분량의 지리지를 저술하여 남긴다.

대동지지를 좀 더 깊게 들여다보면 그가 단순히 괴나리봇짐 하나 들쳐 메고 전국 산하를 떠돌던 유랑인만의 이미지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동지지 작성을 위한 참고문헌은 조선 측 자료 43종, 중국 측 자료 22종에 이른다. 수많은 자료의 고증을 거쳐 한 권의 책에 집대성하려고 했던 학자로서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목차 다음에 순우리말 지명에 대한 지명 유래를 소개하며, 그 당시 통용되던 한자 지명이 순 우리말 땅이름에서 왔음을 내심 비치고 있다.

그가 기획한 32권 15책의 분량은 경도 및 한성부로부터 시작하여,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 지역별로 24권을 분할하였으며, 그에 그치지 않고 산수, 변방, 한양으로부터의 각 지점 거리, 역참, 우리나라 역사 등을 기록한 나머지 분량으로 나뉘어 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더라도 실로 어마어마한 저술이었음에 틀림없다. 몇몇 정보가 누락, 오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채 사망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목판본 제작까지 이르지는 못하고 필사본 형태로 그친 것으로 보여 아쉬울 뿐이다.

지도가 사용자와 대면하는 인터페이스라면, 지지는 방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콘텐츠다. 그는 이 두 가지 모두를 최고의 수준으로 올리기 위해서 한 평생을 바쳤을 테다.

고산자 김정호의 동상은 국토지리정보원 한 켠에서 만나볼 수 있다.(이미지 출처 : 국토지리정보원)
고산자 김정호의 동상은 국토지리정보원 한 켠에서 만나볼 수 있다.(이미지 출처 : 국토지리정보원)

◇ 지도는 끊임없이 발전해야 한다
대동여지도는 흔히들 말하는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가 아니다. 그는 기존에 있던 각종 지도와 지지를 섭렵한 것으로 보이며, 그에 대한 분석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공간정보 서비스를 만들어내고, 이를 꾸준히 버전업하였다. 청구도를 만들고, 동여도를 만들고, 대동여지도로 승화하였다. 그의 지도는 생애 내내 끊임없이 발전했다.

그의 생이 좀더 길었더라면, 그에게 지도 제작을 위한 여건이 주어졌더라면 또 다른 멋진 작품이 나왔을 것이다. 위도에 따른 분첩이 아니라 경도에 따른 분첩 버전도 나오지 않았을까? 서울에서 강릉까지 동서 방향으로 가려면 한두 권만 챙겨가도 되지만, 서울에서 목포를 남북으로 가로질러 가려면 대략 10권 정도는 챙겨가는 불편에 대한 생각도 그에게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목판 작업의 여유만 더 있었다면 현대의 레이어 개념이 도입되었을 수도 있을 테다. 추측컨대, 보부상용 상업지도, 군사용 전략요충지 지도, 팔도유람용 관광 지도 역시 각각 자매품으로 나오지 않았을까?

◇ 지도는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
영화 ‘고산자’의 홍보 문구를 보면 “지도가 곧 권력이자 목숨이었던 시대”라는 점을 내세운다. 그리고 스토리를 풀어가는 내내 ‘지도는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라는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지도에는 많은 정보를 담고 있으며, 그 정보에 대한 ‘알 권리’가 통제되어 있었을 것이다. 봉수대의 위치와 같은 군사시설 역시 국가 전략 상 매우 중요한 보안요소일 수 있다. 대동여지도만 제대로 해석하면 전국의 도로 네트워크는 물론 물길까지 파악할 수 있으니 쓰임에 따라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는 물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진정 누구를 위해서 끊임없이 지도를 만들었을까? 영화나 소설에서 언급한 것처럼 단지 ‘아버지와 같은 억울한 죽음이 없기 위해서’였을까? 누가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짐작하는 것은 모든 서비스 기획 시 가장 첫 단추다. 이른 바, 목표 사용자에 대한 정의와, 그의 요구사항을 파악하여 분석하는 절차에 해당한다.

그가 생각한 대동여지도의 사용자는 비단 국가만은 아니었다. 국가 경영이나 통제나 군사작전 수행을 염두에 둔 지도가 아니다. 땅에 살고 있으며, 그 땅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일반 사용자가 대상이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산줄기며, 하천의 흐름이며, 길의 길이 등이 중요한 정보였다. 그렇다고 국가가 배제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지도 제작에 참고할만한 각종 고급 자료들을 나라에서 음으로 양으로 제공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으며, 국가 통수에 필요한 정보 역시 함께 수록되어 있다. 목표 사용자가 정확하게 설정되어 있지 않아 불분명한 종합지도가 탄생한 것이긴 하지만, 그 당시 시대상을 파악하면 수긍이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는 대동여지도 첫 머리에 실린 ‘지도유설’에서 “세상이 어지러우면 이 지도로써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 강폭한 무리들을 제거하며, 시설이 평화로우면 이로써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니”라고 적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게 비단 국가만을 위한 지도였을까? 그렇다면 굳이 양산체계를 염두하고 목판본 형태로 제작하였을까? 그는 국가의 도움으로 지도를 만들게 되었지만, 지도 위에는 국가는 물론 이 땅에 발을 딛고 살고 있는 수많은 민중들의 편리도 함께 고려하지 않았을까 싶다.

◇ 전자지도 시대에 고산자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 후로 많은 시간이 흘러 어느덧 전자지도 시대가 되었다. 차를 타면 내비게이션부터 켜고, 약속을 잡으면 스마트폰 지도를 펼치고, 버스나 전철 도착정보 역시 지도를 통해서 조회하고, 가장 값싼 주유소를 찾거나 전세를 구할 때에도 일단 지도부터 펼치는 세상이 되었다. 지도는 이제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서비스다.

이러한 전자지도 시대에 고산자가 다시 출현한다면 어땠을까 잠시 생각해 본다. 이런 세상이 도래했음에 대해 놀라는 한편, 꽤 많은 이야기를 건넸을 것 같다. 그는 수많은 공간정보 데이터의 양에 놀라움을 표시하겠지만, 그 수많은 정보가 정확하고 최신성을 띠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띨 것이다. 양과 질을 놓고 우선순위를 매기라고 한다면 질을 선택했을 고산자다.

그는 모두들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전자지도서비스의 UI와 UX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숙고해 보았을 것이다. 왜 검색 목록은 좌측에 있어야 하며, 마커는 천편일률적이어야 하며, 인포윈도우는 획일적인지에 대해서 따지고 들었을 테다. 스마트폰 시대의 전자지도가 가져온 휴대성과 편의성에 충격을 받겠지만, 그것만이 해답인가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공간과 관련된 콘텐츠에 대해서는 어떤 분류로 어느 수준까지 다루어야 하는지 고민하였을 것이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버전업된 지도 서비스를 다시 만들어내어야 한다고 강조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용자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서비스의 대상은 발주처의 ‘갑’도 아니고 프로젝트 팀 내의 ‘빅마우스’도 아니고 오직 서비스 사용자여야만 제대로 된 서비스가 만들어진다. 서비스의 중심에는 사용자가 있으며, 그 사용자의 각종 요구사항에 맞추어 서비스는 발전하게 된다. 만약에 그였다면, 끊임없이 사용자에 대해서 관찰하고 파악하고 수용해야 한다고 조언했을 것이다.

이 시대의 지도쟁이들은 마땅히 모두가 ‘고산자’여야 한다. 현재 현업에서 불철주야 활동하고 고민하고 있는 모든 고산자들을 응원한다.

임영모 0duri@naver.com 대학교에서는 국어국문학을 전공하였다. 컴퓨터잡지사 기자로 시작하여, 애니메이션, 출판, 모바일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후 GIS 업계에 종사한 지 10년이 넘었다. GIS 분야에서 전통적 GIS보다는 인문학 기반의 다양한 공간정보 기획을 진행하고 있다. 지도를 통해 볼 수 있는 다양한 시각과 활용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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