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근의 역사기행]'파묘’ 최대 수혜자는 조선 14대 왕 선조?
서울국립현충원내 창빈안씨묘…중종 후궁으로 선조 할머니 장례 1년만에 파묘해 현 위치 이장…17년후 손자가 왕 등극
영화 ‘파묘(破墓)’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집안의 액운을 피하거나 조상 덕을 보기위한 명당에 관심이 높아졌다.
‘파묘’는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새롭게 조성하기 위해 묘를 파내는 행위를 말한다.
영화에서는 가족들이 원인모를 병을 앓자 조상 묘를 잘못쓴 탓이라 여겨 파묘를 하면서 벌어지는 기괴한 일들을 다뤘다.
풍수지리 영향으로 옛날에는 조상을 좋은 자리로 옮기는 것이 조상과 후손 모두에 좋은 효도로 여겨졌고, 조선 왕실에서도 묘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다른 곳으로 이장하기 위한 파묘가 흔했다.
▶서울국립현충원 가장 좋은 곳에 중종 후궁 창빈안씨 묘
순국선열들이 잠들어 있는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은 풍수지리가들이 명당으로 꼽는 곳이다.
뒤로 조산인 관악산이 떠받치고 있는 가운데 주산인 서달산이 양팔을 펼치듯 좌청룡, 우백호 형상으로 현충원을 감싸고 있다.
특히 전직 대통령들이 잠들어 있는 대통령 묘역은 현충원내에서도 명당으로 꼽힌다.
그런데 이곳에 조선 왕의 후궁 묘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어 눈길을 끈다. 중종의 후궁으로 선조의 친할머니인 창빈안씨다.
혹자는 국립묘지에 웬 후궁 묘가 있냐고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하지만, 원래 이곳 주인이 창빈안씨다.
▶장사지낸지 불과 1년만에 ‘파묘’해 현 위치로 이장
창빈 안씨는 명종 4년인 1549년에 사망해 경기도 양주 장흥에 매장되었는데, 풍수가 불길하다고해 1년뒤 파묘해 과천현 동작리로 옮겼다. 장사 지낸지 불과 1년만에 파묘하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경우다. 그만큼 후손이 풍수지리를 신봉했고, 명당에 집착했음을 짐작할수 있다.
창빈의 무덤 입구에 있는 신도비(神道碑)에는 ‘양주 서쪽 장흥리에 예장하였으나 묘자리가 좋지 않다고 해 과천 동작리 로 이장하였다’며 풍수를 이유로 이장을 했음을 명확히 적어놓았다.
그런데 동작리로 이장한지 3년 만인 1552년 창빈의 아들 덕흥군에게 셋째인 막내 하성군이 태어났고, 14년후인 1567년 왕이 됐다.
왕비 소생의 적자가 아닌 후궁 소생의 방계출신으로 처음으로 왕이 된 선조다. 이후 왕들은 모두 창빈의 자손이니, 이 모두가 창빈의 묘가 명당이었기 때문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선조는 막내인 자신이 왕이 된 것은 온전히 할머니의 음덕 덕으로 여겼을 것이다.
주변에서도 왕을 배출시킨 창빈의 묘를 동작릉이라며 왕과 왕비의 무덤을 지칭하는 ‘능’으로 높혀불렀다.
창빈은 생전에 내명부 종3품 숙용이었으나 선조가 왕이 되자 정1품 빈으로 추존했다.
1956년 국립현충원 건립후에도 남아 이색지대 역할
1956년 묘역 주변으로 국립서울현충원이 건립됐지만 창빈안씨묘는 그대로 남게됐다. 창빈묘는 혈(穴)이 지나는 좌청룡, 우백호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주변으로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등 전직 대통령의 묘가 둘러싸듯 들어서 있다.
조선 중종의 후궁인 창빈안씨묘는 국립서울현충원내 이색지대다.
탁트인 넓은 공간에 비석들이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있는 순국선열들의 묘역과 달리 비밀정원처럼 외부에 노출되지않고 숨겨진 듯 자리잡고 있는 창빈묘가 조화속 파격처럼 느껴진다.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않지만 창빈묘에서는 멀리 현충원 진입로가 한눈에 들어오는 등 탁트인 전망이다.
주변 경관도 아름답다.
봄이면 묘역 주변 아름드리 벚나무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골바람에 하얀꽃잎이 눈처럼 떨어지는 벚꽃엔딩도 환상적이다.
무엇보다 현충원 진입로를 따라 벚꽃길이 화려하게 펼쳐지는데, 특히 개천을 따라 군락을 이루고 있는 수양벚꽃이 다양한 봄꽃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벚꽃이 활짝 피는 화창한 봄날,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아 벚꽃을 감상하고 왕을 배출한 명당으로 불리는 창빈안씨묘도 방문해보자.
*필자 김순근은 서울대 역사교육학을 전공하고, 중앙일보와 스포츠조선에서 기자로 일한 뒤, 공항철도 홍보실장과 본부장을 역임했다. 유튜브 '순당당역사여행tv'에서는 더 다양한 역사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