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경도시의 ‘호모 사케르’가 직면한 이중의 폭력

후아레스에서 젊은 여성 노동자는 어떻게 ‘호모 사케르’가 되었을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뜨는 자막의 약자(acronym) NAFTA가 단서이다. NAFTA는 북미자유무역협정을 뜻하며 미국 엘패소와 다리로 연결되는 멕시코 후아레스는 국민국가(nation) 멕시코의 북단 국경도시로서 자유무역협정(FTA)을 상징한다. FTA가 상품의 국경을 없앰으로써 자본은 국경을 초월하게 된다. 그러나 국민국가의 국민은 TV 같은 상품과 달리 국경을 마음대로 넘지 못한다.

영화 '보더타운' 포스터
영화 '보더타운' 포스터

멕시코 상품과 달리 멕시코 사람은 리오 그란데(Río Grande)를 자유롭게 월경할 수 없다.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자본은 국민국가인 멕시코로부터 멕시코 국민을 잠정적으로 양도받고, 초국적 자본의 지배를 받는 멕시코 국적의 여성 노동자는 주권권력이 보호를 포기한 벌거벗은 생명이 된다. 따라서 극중 에바(마야 자파타)와 같은 여성 노동자는 "아무나 죽여도 되지만 죽음의 값은 무(無)인" 호모 사케르로 재정립된다. 영화 속에서 디아즈(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여자를 죽이고 싶으면 후아레스로 오면 된다"라고 말할 때 그가 말한 여자가 '호모 사케르'이다.

국민국가의 주권권력을 포기함으로써 생성된 ‘호모 사케르’의 공간은 자유무역을 겨냥해 설립된 마킬라도라(Maquiladora)라는 대형 공장이다. 자막에서 약 1,000개로 추정된 후아레스 마킬라도라 노동자의 푸른 노동복은 사막에서 시체로 발견되는 '호모 사케르'의 수의이다.

20세기 말~21세기 초에 후아레스에서 목격된 호모 사케르는 이중으로 벌거벗겨진 존재이다. 주권권력의 의미를 정치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로 확장하면 인류가 생긴 이래 가장 역사가 오래됐고 가장 많은 살해가 일어난 ‘호모 사케르’는 여성이다. 남성지배의 기나긴 역사에서 그 역사만큼 오래된 혐오의 대상인 여성.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에서 여성과 노예가 민주주의의 주체가 아니었다는 사실(史實)이 새삼스럽지 않듯, 지난 인간 역사에서 여성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무가치했다. 자본에 의해 가정에서 공장으로 동원된 여성은 자본의 지배를 받는 노동이 됨으로써 다시 한번 무가치해진다. <자본론>에 잘 묘사되었듯이 여성 노동은 아동 노동과 마찬가지로 자본이 선호하는 노동으로서 남성 노동과 분리되는데 이러한 분리는 부르주와지의 대자적 존재로 정립된 프롤레타리아트에서 여성이 배제되었음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 폴리스의 여성은 현대 멕시코 후아레스 마킬라도라의 여성으로 재현되고 중첩된다.

영화 '보더타운' 스틸컷
영화 '보더타운' 스틸컷

칼 슈미트는 일찍이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라고 말했다. 1987년의 민주화운동이 대중이 스스로 예외상태를 만들어 주권자임을 선언하는 장면이었다고 한다면, <1987>이 취급하는 근본 문제가 주권이 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영화는 인물의 정치를 다루게 된다. 반면 영화 <보더타운>은 조르조 아감벤이 말한 주권(권력)의 유예와 벌거벗은 생명의 문제를 다루는데, 이 문제는 인물의 탈(脫)정치로 소묘된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상의 구도는 역설적으로 반대 결과를 초래한다. 즉 현실을 장악한 자본에게서 현실을 쟁취하려는 <보더타운> 극중 인물의 '보잘것없는' 움직임은 불가피하게 정치적이 되는 반면, 주권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1987>은 확고한 진실의 휘장을 내거는 바람에 정치가 소멸하고 관객이든 출연자이든 눈물 흘리는 수동적 인간만을 남긴다.

<보더타운>은 "The following is inspired by true events"라는 말로 시작해 "실종되고 살해당한 후아레스의 여성들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는 말로 마무리된다. 영화는 후아레스의 빈민촌을 원경으로 살짝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잡으며 시작하고, 조립을 마친 대형 TV 완제품이 컨베이어에서 휙 하고 나와 아마도 출하를 위해 위쪽 라인으로 솟구쳐 오르는 장면과 곧 바로 살해당해 암매장당한 여성 시신의 발을 근경으로 보여주며 끝난다.

안치용 carmine.draco@gmail.com 영화평론가 겸 인문학자로 읽고 쓰는 일을 하며 산다. 흔히 한국CSR연구소 소장으로 소개된다.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KSRN) 집행위원장, 지속가능청년협동조합 바람 이사장 등의 직책을 함께 수행한다. 언론⋅연구 활동을 통해 지속가능 및 사회책임 의제를 확산하고 관련 정책을 수립하는 데 힘을 보태는 한편 지속가능바람청년학교, 대한민국지속가능청소년단 등을 운영하면서 대학생⋅청소년들과 미래 의제를 토론하고 있다. 가천대 경희대 카이스트 한국외대 등에서 비전임교원으로 경영학과 언론학, 글쓰기를 가르쳤다. 경향신문에서 경제⋅산업부 국제부 문화부 기자로 22년을 일했다. 학부는 문학, 석사는 경제학, 박사는 경영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한신대 신학대학원에 다니면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원. <선거파업> <한국자본권력의 불량한 역사> 등 30권 가까운 저⋅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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