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영화간의연결고리③] 스크린을 통해 다시 만나는 대륙의 명작

영화 '패왕별희' / 출처: 조이앤시네마
영화 '패왕별희' / 출처: 조이앤시네마

장국영 주연의 불멸의 명작 '패왕별희'가 5월 1일부터 국내 관객들을 다시 한번 만난다. 제46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영화 '패왕별희'는 최고의 경극 배우 청데이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리고 있다. 전통적으로 남자들만 연기할 수 있는 경극에서 청데이는 어려서부터 여자 배역을 연습해왔으며, 경극 ‘패왕별희’에서도 여성인 우희 역을 맡는다. 청데이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단샬루는 경극 ‘패왕별희’에서 '패왕' 초나라의 군주 항우 역을 연기하며, 청데이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한 그에게 연정을 품게 된다. 중일전쟁부터 국공 내전, 문화대혁명까지 격변의 시대를 겪는 청데이는 역사적 혼란 속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영화 '패왕별희'는 종종 ‘사랑’이라는 주제 하에 소개되지만,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주제는 ‘사랑’보다는 ‘운명’과 ‘정체성’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우선 청데이는 어린 시절 매춘부인 어머니로부터 버림받는다. 다 큰 사내아이를 더 이상 유곽에서 키울 수 없었던 그의 어머니는 경극 학교에 청데이를 맡기려고 하지만, 경극 학교에서는 본래 육손이었던 청데이를 거절한다. 여기서 그의 어머니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데, 바로 칼로 그의 여섯 번째 손가락을 잘라내는 것이다. 이 장면 속 손가락은 음경에 대한 은유로 손가락의 절단은 곧 청데이의 거세를 상징한다.

결국 청데이는 경극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거세라는 과정을 거처야 한다. 경극 학교에서 평생 여성을 연기하게 되는 청데이의 미래를 고려한다면 청데이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성 정체성의 변화를 맞이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청데이는 평생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데, 그가 이런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자신에게 따뜻하게 다가온 친구 단샬루를 통해서다.

영화 '패왕별희' / 출처: 조이앤시네마
영화 '패왕별희' / 출처: 조이앤시네마

청데이와 단샬루의 관계는 둘이 함께 경극 ‘패왕별희’를 연기하면서 복잡해진다. 경극 ‘패왕별희’는 전쟁 가운데도 초나라 군주 항우에 대한 변함없는 우희의 사랑을 그린 작품으로, 청데이는 우희를 연기하고 단샬루는 항우를 연기한다. 어린 청데이는 처음에는 여성 배역을 제대로 연기하지 못하는데, 심한 체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나는 원래 계집으로 태어나서, 사내도 아닌데…”라는 대사를 “나는 원래 사내로 태어나서, 계집도 아닌데…”라고 뒤바꿔서 말한다.

청데이의 습관적 실수는 그가 무의식적으로 여성 배역을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청데이는 결국 중요한 후견인 앞에서 이 실수를 하게 되고, 단샬루는 그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후견인 앞에서 담뱃대로 청데이의 입을 쑤시며 그를 처벌한다. 친한 친구로부터 폭력을 당한 청데이는 그 충격으로 대사를 제대로 연기하게 된다. 그의 정체성에 '여성'이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마치 그가 거세라는 과정을 통해서만 경극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청데이는 폭력이라는 과정을 통해서만 최고의 경극 배우라는 꿈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었다.

청데이가 여성 배역을 받아들이면서 단샬루 또한 최고의 경극 배우를 성장하게 된다. 어른이 된 청데이는 단샬루에 대한 집착 같은 애정을 보인다. 그는 경극 중 우희가 항우와 한평생 함께 했던 것처럼 단샬루와 한평생 함께 하길 희망한다.

영화 '패왕별희' / 출처: 조이앤시네마
영화 '패왕별희' / 출처: 조이앤시네마

단샬루는 청데이의 집착에 대해 한 발자국 물러선 태도를 보이는데, 그를 친구이자 동료로서 사랑하지만 너무 극에 몰입하는 것 같다며 선을 긋는다. 청데이의 단샬루에 대한 연정 또한 모호하다. 그는 과연 진심으로 단샬루를 사랑하는 것일까? 혹시 우희라는 배역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단샬루를 항우로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청데이의 모호한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영화의 마지막까지도 계속된다.

영화 '패왕별희' / 출처: 조이앤시네마
영화 '패왕별희' / 출처: 조이앤시네마

청데이와 단샬루의 관계는 주샨의 등장으로 더 복잡 미묘해진다. 단샬루는 유명한 매춘부였던 주샨과 결혼하게 되고, 청데이는 그녀를 질투하며 적대시하지만 계속해서 단샬루 곁에서 머무른다. 중화권 최고의 배우 공리가 연기한 주샨이라는 인물은 단순히 청데이의 경쟁자로 남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단샬루와 청데이의 관계는 조금씩 어긋나지만, 그럴 때마다 버림받은 청데이를 위로하는 사람은 주샨이다. 그녀는 청데이를 이해하며 공감하고, 그를 위해 아파한다. 거세된 청데이는 끊임없이 경극 ‘패왕별희’의 완벽한 남성 항우를 찾아 헤매지만, 그를 받아주고 이해하는 사람은 오히려 여성인 주샨이었던 것이다.

영화 '패왕별희' / 출처: 조이앤시네마
영화 '패왕별희' / 출처: 조이앤시네마

영화 '패왕별희'의 가장 큰 매력은 천카이거 감독의 섬세한 연출과 화려한 캐스팅이라고 할 수 있다. 극중 청데이 그 자체였던 장국영부터 시작해서 팔색조 매력의 공리, 투박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단샬루를 잘 보여준 장풍의, 개성 있는 연기로 사랑받는 갈우, 그리고 신비로운 매력의 아역들까지, 배우들의 열연이 단연 돋보이는 영화다. 또한 관객들은 영화 '패왕별희'를 통해 격변하는 중국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데, 이러한 중국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영화로는 장예모 감독의 1994년작 '인생'이 있다.

영화 '인생' / 출처: IMDB
영화 '인생' / 출처: IMDB

갈우, 공리 주연의 '인생'은 중국의 국공 내전, 대약진 운동, 그리고 문화대혁명을 경험하게 되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그 작품성을 인정받아 제48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고 제47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영화 '패왕별희'에서 원대인으로 오묘한 매력을 보여준 갈우는 영화 '인생'에서 도박에 빠져 사는 철없는 남편에서 책임감 있는 가장으로 변화하는 주인공 푸궤이를 섬세하게 묘사하며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 '인생' / 출처: IMDB
영화 '인생' / 출처: IMDB

영화 '인생'이 한 가족을 중심으로 중국의 역사를 그려낸 반면 영화 '패왕별희'는 청데이라는 개인에 초점을 맞춰 격변의 중국을 묘사한다. 특히 이번 5월 1일 국내 관객들을 만나볼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은 중국에서 상영이 금지되었던 버전으로 상영시간이 약 15분이 추가된 171분의 확장판이다. 코로나19로 인해 개봉이 연기되었지만 벌써부터 독립·예술영화 예매율 1위에 오르면서 관객들의 기대감을 보여주고 있다.

정인혜 라이프&컬처팀 객원기자 lifenculture@nextdaily.co.kr

정인혜 기자는 현재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으로 비교문학과 수학을 이중 전공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영화와 사랑에 빠진 영화 마니아로 영화가 가진 매력을 하나하나 짚어 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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