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바람과 햇살을 즐기기는 데 최적이다. 가을은 내게 여행을 부르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대책 없이 여행을 떠나는 유형은 아니다. 서랍 속 여권을 만지작거리며 마음을 달랜다. 1년에 그래도 한 번쯤 비행기를 타는 일이 만들어졌는데 주기가 길어졌다.

‘삶은 여행’이라는 정의는 적합하다. 여행은 비행기, 기차나 배를 타고 갔다가 돌아오는 것만이 아니다. 여행은 내 한 뼘 방에서도 가능하다. 고인이 되신 신영복 선생은 ‘내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것이 가장 먼 여행’이라고 표현했다. 삶을 여행으로 비유하며 물리적 공간을 오가는 것만이 아니라 이성에서 감성으로, 감성에서 이성으로 떠나는 일을 여행으로 비유했다.

200년 전에 쓰인 책, <내 방 여행하는 법>은 가택 연금을 당한 저자가 집 안에서 책과 함께 지낸 42일간의 기록을 담았다. 알랭 드 보통은 히드로 공항의 상주 작가로서 공항을 드나드는 여행객들을 관찰하며 <공항에서 일주일을>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여행은 늘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떠나는 일이지만, 관찰자로 여행객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여행의 설렘을 느낀다.

면세점 디자인 협력업체 AE로 일하면서 현장 확인을 위해 인천공항 면세구역을 방문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업무방문 허가를 받고 들어가서 여행객을 지켜보는 일은 감춰둔 부러움을 꺼내 놓게 만든다. 일하다 막히는 날에는 시내 호텔 앞 공항리무진을 타고 인천공항을 향해 가기도 했다. 공항 근처 비행기가 막 활주로를 벗어나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뭉쳤던 뭔가가 풀리는 기분이다. 당시 버스 나들이는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는 다른 곳에서 ‘도구’를 가져와 풀어야 한다. 여행은 막힌 길을 여는 열쇠다. 열리지 않는 뚜껑을 힘으로만 하려면 잘 열리지 않는다. 손에 힘을 다시 조절하고 나면 열 수 없었던 뚜껑이 돌아간다. 여행은, 열리지 않는 생각을 여는 힘이다. 과거에 발목 잡힌 인생은 안타깝다.

일상 탈출 방해 요소를 없애자. 조금만 비켜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데도 대단한 일로 혼자 생각하며, 상대마저 괴롭힌다. 여행은 다르게 생각할 기회를 준다. 근심에 얽매인 삶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한다. 오직 현재에만 충실하도록 만든다. 과거의 일로 현재의 삶을 망치게 놔두지 않는다. 여행은 힘겨운 시간을 씻겨주는 힘을 품고 있다. 삶을 가볍게 만들면 떠나는 일이 자유롭다.

어느 순간 다시 묵직해진 삶의 무게를 들여다보며 덜어낼 시간이 왔음을 느낀다. 작가 김영하는 <여행의 이유>를 통해 익숙한 공간이 아닌 낯선 곳, 낯선 사람들 속에서 마주했던 일을 이야기하며, 여행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다.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둔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을 것과 잘 곳을 확보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거듭하여 말한 것처럼 미래에 대한 관심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줄이고 현재에 집중할 때, 인간은 흔들림 없는 평온의 상태에 근접한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110쪽, <여행의 이유>

여행은 닫힌 생각을 열어주는 길이다. 가을은 마음에 자유를 선물할 시간이다. 떠날 이유를 만들자. 때로는 그냥, 이유가 없어도 좋다.

길윤웅 yunung.kil@gmail.com 필자는 IT전문 잡지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 한글과컴퓨터 인터넷 사업부를 거쳐 콘텐츠 제휴와 마케팅 등의 업무를 진행 했다. 디자인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활동 중. 청소년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미디어교육과 제작 활동에 관심을 갖고 산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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