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소설을 좋아한다. 소설 속의 ‘바다’는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바다의 모습을 죄다 들춰내지만, 영화 속 바다는 이미 갈고닦아 좁디좁은 그저 아름다운 바다만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따옴표는 상상할 수 있는 온갖 목소리와 감정 변화를 담고 있지만, 또박또박 다듬어진 영화 속 군더더기 없는 목소리는 마냥 안락하기 때문이다. 끝을 알 수 없는 사랑의 표현과 감정의 기복들도 스크린의 몇 가지 몸짓과 몇 마디 세련된 언어로 규정되어 그냥 그대로 화석처럼 굳어버리기 때문이다. 영화가 싫은 것이 아니라, 소설의 무한한 가능성이 좋다.

30여 년 전에 발표된 30쪽도 안 되는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納屋を焼く)’가 3시간 가까운 긴 영화로 만들어졌다. 1930년대 윌리엄 포크너가 쓴 세 부자의 거친 이야기 ‘헛간 방화(Barn Burning)’에서 비롯된 소설이 국경을 넘나들며 영화 ‘버닝(Burning)’으로 거듭난 것이다. NHK의 제안을 받은 이창동 감독이 오랜 준비 끝에 완성시킨 수작으로 제 71회 칸영화제에서 호평 받은 명화다. 청년 하루키의 군더더기 없는 20세기 상상력이 노장 이창동의 섬세한 연출로 정교하게 해석되어 21세기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세상에는 헛간이 얼마든지 있고, 그것들은 모두 내가 태워주기만 기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변에 우뚝 서 있는 헛간도 그렇고, 논밭 한가운데 서 있는 헛간도 그렇고······ 어쨌든 여러 헛간들이 말입니다. 십오 분이면 깨끗하게 태워버릴 수 있지요. 마치 처음부터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요. 아무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저 ㅡ 사라질 뿐이죠. 깨끗이요.” - ‘헛간을 태우다’ 중에서

소품으로써의 ‘포크너 단편집’, 몇 잔의 술, 카페오레, 차이코프스키의 ‘현악 세레나데’, 냇 킹 콜, 마일스 데이비스의 ‘에어진’이 흐르며, 요한 스트라우스의 ‘왈츠곡집’으로 흐르는 다양한 음악이 배경으로 흐르는 소설이다. 영화는 현실과 비현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모호하게 표현하는 하루키 특유의 야생적 상상력을 얼마 뒤 태워 없애버릴 헛간 속에 가둬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백이면 백 관객 모두 각자의 시선으로 영화를 해석하겠지만, 원작이 암시한 수많은 가설 속에 풍요로운 추측들이 이미 해체된 현장을 목격한 기분이다.

청년실업, 여성과 다문화, 남북대치 현실 등 크고 작은 사회 문제들을 버무린 복잡하고 개운하지 못한 허무주의 스릴러다. 비무장지대에 인접한 파주와 후암동 달동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상미는 우울함이 밀려온다. 연기력 출중한 유아인, 무표정한 최승호와 느끼한 문성근의 조력도 볼만했다. 신인 전종서의 기대하지 않았던 노출과 정사신, 서글픈 남자 주인공의 뒷모습에 실오라기 하나 없음으로 꿀꺽 침을 삼키는 관객들은 저마다의 끈적끈적한 평론가로 극장을 나설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귤껍질 까기’를 했다. ‘귤껍질 까기’란 말 그대로 귤껍질을 까는 것이다. 그녀의 왼쪽에 귤이 가득 든 유리통이 있고, 오른쪽에는 귤껍질을 넣는 통이 있다ㅡ는 설정이다ㅡ 사실은 아무 것도 없다. 그녀는 그 상상 속의 귤을 하나 들고 천천히 껍질을 벗겨, 한 알씩 입에 넣고 씹다가 찌꺼기를 뱉어내고, 한 개를 다 먹으면 찌꺼기를 모아 껍질로 싸서 오른쪽 통에 넣는다. 그 동작을 끝없이 되풀이한다. 말로 설명하면 별로 대단치 않다. 그러나 실제로 눈앞에서 십 분이고 이십 분이고 그러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점점 내 주변에서 현실감이 흡수되어 버리는 듯 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묘한 기분이다.” - ‘헛간을 태우다’ 중에서

마주 앉은 그녀가 귤을 까서 오물오물 맛있게 먹는다. ‘거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되는 거’라던 목소리는 그대로 팬터마임 연기와 함께 명장면으로 남았다. 일부 독자들에게는 무덤덤하고 지루할 수 있는 텍스트의 나열을 아름다운 영상으로 담아낸 것은 박수 받아 마땅하다. 준비 안 된 독자에게는 피곤할 수도 있는 나른한 텍스트를 정성스럽게 스크린으로 옮겨 놓은 친절함에 고마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8분의 연기는 스물아홉 쪽 방대한 상상력을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다.

하루키가 표현한 ‘은색 독일제 스포츠카’는 영화 속에서 포르쉐911 카레라S로 구체화 된다. 뭐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종수와 암담하지만 한없이 해맑은 해미,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잘 사는 벤의 삼각관계는 원작의 대비에 순조롭게 따른다. 젊은 부자를 향한 담담한 메타포들이 구체화되면서 다수 관객의 이질감도 덩달아 표출된다. 열심히 일하지 않는데도 돈 많은 그 남자에게 “꼭 개츠비 같네.”라는 종수의 목소리는 강화된 질투로 객석에 울려 퍼진다. “한국에는 개츠비들이 너무 많아!”, 그런 불만과 질투에 해미는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나(僕), 그녀(彼女), 그 남자(彼)는 영화에서 종수, 해미, 벤으로 바뀌었고, 소설 속에서 서른한 살로 가장 연장자인 유부남이 영화에서는 벤보다 대여섯 살 아래 장래가 암담한 소설가 지망생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해미는 오랜만에 재회한 동네 친구 종수를 유혹해 어색하고 찌질한 사랑의 감정에 불을 지피고 벤에게로 떠났다. 해미가 아프리카에서 벤을 만난 것도 영화에서는 구체적인 사연으로 완성된 뒤다. 시종 기분 나쁜 웃음소리와 하품하는 벤의 거슬리는 모습은 부드러운 개츠비적 메타포의 소설을 뛰어 넘지 못한다.

“그녀와 둘이 있으면 나는 마음이 몹시 편해졌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며 결론을 내리기 힘든 사소한 골칫거리, 영문 모를 인간이 떠안은 영문 모를 사상에 대한 것들을 깡그리 잊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었다. 그녀가 하는 얘기의 대부분은 백 퍼센트 아무 의미가 없었지만, 그것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멀리 흐르는 구름을 바라볼 때처럼 아주 아련해지고 기분이 좋았다.” - ‘헛간을 태우다’ 중에서

하루키는 ‘유두 모양이 선명하게 드러날 정도로 얇은 셔츠에 올리브그린색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라든가 ‘그녀는 옷을 훌러덩 벗고 팬티 차림으로 티셔츠를 뒤집어쓰고 침대 속으로 들어가더니, 오 초 뒤에 이미 새근거리며 잠들어버렸다.’와 같은 잔잔함으로 영상 속 노골적인 이미지와 다른 자극의 글맛을 보여준다. 삼각관계에 집중하다가 등장인물을 관념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니 영화가 만들어 낸 전혀 다른 복잡성과 번뇌가 스친다. 그토록 훌륭한 영화인데, 그 모든 것을 상상할 수 있었던 원작이라면 또 얼마나 위대한가.

대마초를 받아 물고 거리낌 없이 깔깔거리는 자유로운 그녀는 옷을 벗어 던지고 석양 속에서 알몸으로 춤을 추다가 노을을 예찬한다. ‘처음엔 주황색이었다가 피처럼 붉은 색이었다가 그리고 보라색 파란색이 된다’며 죽는 건 너무 무서워서 그저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는 복선을 날린다. 배고픈 리틀 헝거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나서는 그레이트 헝거의 몸짓은 영화가 만들어낸 꽤 괜찮은 메타포다. 느슨하고 지루했던 영상이 경쾌한 리듬을 타고 소설을 압도한다. 후반부에 이르러 박진감이 넘치지만 관객들은 여전히 머리 쓸 일이 별로 없다.

“가끔씩 헛간을 태운답니다.” 그가 반복했다.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손톱 끝으로 라이터의 모양을 따라 더듬고 있었다. 그리고 마리화나 연기를 힘껏 폐 속으로 빨아들여 십 초쯤 그대로 있다가 천천히 뱉어냈다. 마치 엑토플라즘처럼, 연기가 그의 입에서 공중으로 떠돌았다. 그는 내게 마리화나를 건넸다. “물건이 아주 좋죠?” 그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략) “두 달에 한 번쯤은 헛간을 태웁니다.” 그가 말했다. 그리고 또 손가락을 꺾었다. “그 정도 페이스가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물론 제게는 말입니다.” - ‘헛간을 태우다’ 중에서

태워버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소설을 읽는 동안 상상할 수 있었던 모든 방화의 이미지는, 스크린에서 단 한 번 표현되는 강렬한 비닐하우스 방화 신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소설의 드넓은 상상력이 영화의 구체적인 답안으로, 감독과 배우들의 매우 친절한 표현으로 관객의 전두엽을 편안하게 방치한다. 헛간과 그녀를 오가는 소설 속 의문들은 깔끔하게 해석되는 답안지로 무덤덤하다. 별 볼일 없는 원작이 멋진 영화로 탄생하기도 하지만 원작의 감상 포인트가 사라진 아쉬움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소설과 확연히 구분되는 영화의 핵심이 아닐까.

헛간 대신 벌판의 비닐하우스가 등장한다. 지저분해서 눈에 거슬리는 비닐하우스들을 향해 ‘걔네들은 다 내가 태워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는 벤의 목소리가 음산하다.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통해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스’를 느낀다는 그 목소리와 눈빛이 불편하다. 젊고 아름다운 신인 여배우를 훌러덩 벗겨버린다. 출렁이는 커다란 가슴과 어색한 베드신이 한 번 지나간 후로 그녀를 그리워하는 못난 남자는 자위를 반복한다. 보이지 않는 고양이 보일이가 나타났을 때, 정작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혹자들은 소설이 영화의 모티브였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글쎄...

“그녀는 사라져버렸다. 나는 아직도 매일 아침 다섯 개의 헛간 앞을 달리고 있다. 우리 집 근처의 헛간은 여전히 한 곳도 불타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헛간이 탔다는 얘기도 들리지 않는다. 또 12월이 오고, 겨울새가 머리 위를 지나간다. 그리고 나는 나이를 먹어 간다. 밤의 어둠 속에서, 이따금 나는 불에 타 허물어지는 헛간을 생각한다.” - ‘헛간을 태우다’ 중에서

1984년에 발표된 이 작은 소설집에는 모두 다섯 편의 작품이 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 듯이, 아름다운 여인을 유혹하기 위해 춤추는 난쟁이에게 몸을 맡기는 ‘춤추는 난쟁이’는 더욱 몽환적이다. 경찰에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한 노동자가 자신을 추적하는 경찰을 피해 코끼리를 타고 달아다는 이야기는 한없이 우울하다. 그렇게 해서 한 달 가까이 숲에서 숲, 산에서 산으로 도망 다니는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숲속의 존재가 처량하다.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세 가지의 독일 환상’도 전혀 다른 장르의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표제작 ‘반딧불이’는 어떤 기시감처럼 밀려온다. 대학 신입생인 화자가 고교 시절 단짝 친구의 자살 뒤로 친구의 여자 친구와 사랑에 빠진 이야기가 그렇다. 그녀가 정신적으로 추락하는 것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진행되는 에로틱한 감정선이 비틀즈의 노래 ‘Norwegian Wood’를 소환한다. 이 작품보다 3년 늦게 발표된 장편소설 ‘노르웨이의 숲’의 뼈대로 읽어지기에 충분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반딧불이 같은 청춘의 빛 속에 하루키의 청춘이 박제되었다. 비틀즈의 선율과 함께 30년 넘도록 전 세계 젊은이들을 지배한 그 문학의 뿌리가 연상되는 작품이다.

“6월에 그녀는 스무 살이 되었다. 그녀가 스무 살이 된다는 건 뭔가 신기한 느낌이었다. 나나 그녀나 원래는 열여덟과 열아홉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게 옳을 듯했다. 열여덟 다음에 열아홉이고, 열아홉 다음이 열여덟- 그건 이해된다. 그러나 그녀는 스무 살이 되었다. 나도 오는 겨울에 스무 살이 된다. 죽은 자만이 언제까지나 열일곱이었다. 생일에는 비가 왔다. 나는 신주쿠에서 케이크를 사서 전철을 타고 그녀의 아파트에 갔다. 전철은 몹시 혼잡한데다 자주 흔들렸다. 덕분에 저녁 무렵 그녀의 방에 도착했을 때 케이크는 로마의 유적처럼 무너져 있었다.” - ‘반딧불이’ 중

열도의 지성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무겁고도 가벼운 창작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칠순의 젊은이다. 1949년 교토 출신으로 와세다대 영화연극과를 졸업한 뒤, 재즈 카페를 운영하다가 서른 즈음에 등단했고,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하면서 간결하고 세련된 자신만의 문체를 완성시켰다. ‘1Q84’, ‘기사단장 죽이기’, ‘해변의 카프카’, ‘노르웨이의 숲’과 같은 기발한 상상력의 장편뿐만 아니라 팩트와 판타지를 넘나드는 수많은 단편과 르포르타주, 에세이들을 넘나들며 세계 시민들을 사로잡았다. 노벨문학상이 아니라도 오랫동안 충분히 인정받은 작가다.

21세기에 출발한 Z세대들은 이미 존재했던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성장한다. TV나 책보다 인터넷 미디어에 더 익숙한 그들은 사진 그 이상의 동영상으로 소통하며, 일상의 많은 지식도 책이나 블로그 아닌 유튜브 검색을 통해 습득한다. 이런 시대에 한가롭게 소설을 예찬한다는 시각은 얼핏 적절한 듯싶지만 미래를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편향된 시각일 뿐이다. 상상력은 대체될 수 없는 고유의 영역이며, 소설 하나가 어떻게 영화로 만들어지는가를 고민하지 않는 이들은 리틀 헝거(little hunger)에 지나지 않는다. Z세대라고 다를까? 그래서 읽고 또 읽는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온라인뉴스팀 (news@next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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