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안중찬의 書三讀] 고규홍의 ‘한국의 나무 특강’ - 나무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발행일시 : 2018-03-30 02:00

그리운 날에는 만남이 답이다.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오래된 산, 보고 싶은 언덕, 그리운 나무와 꽃을 찾아가는 발걸음은 즐겁다. 마음이 무겁거나 위로받고 싶은 날에는 나무 가득한 숲길을 고독하게 산책하는 것도 괜찮다. 일상의 작은 숲도 좋지만, 친구를 만나는 마음으로 먼 곳에 있는 나무를 찾아 떠나는 여행도 권할 만하다. 월정사 전나무숲길, 원대리 자작나무 숲길, 학동리 메타세콰이어길도 좋고, 노거수 가득한 설악산 장수대도 가볼만한 곳이다. 세상의 온갖 시름과 원망들로부터 나를 위로하고 감싸주는 나무와의 만남이 좋다.

평창 동계올림픽 알파인 경기장으로 헌신했던 정선 가리왕산의 훼손된 산림은 생태복원추진단의 약속 이행이 불투명하고, 천문학적 복원 비용과 경험미숙으로 진퇴양난에 빠졌다. 지난세기 교과서를 통해 국토의 70%가 산림이라고 배운 천혜의 자연환경이 무색하게 65% 이하로 축소된 난개발의 현실 앞에서 숲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 우리나라에는 약 1,000종의 나무가 있는데 조상들이 부르던 고유의 옛 이름은 조용히 사라져 가고, 현대의 학술적 명칭들은 주로 19세기 외국인 식물학자들에 의한 제국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누구나 나무도감 한 권쯤 읽어봤거나 소장하고 있을 것이다. 멋진 사진이나 그림으로 채워진 만큼 고급스럽고 비싸지만 대체로 오래 붙들기 쉽지 않은 조각 지식이나 우리와 동떨어진 딴 나라 지식을 담고 있다. 학술적인 서적이나 외국에서 인정받은 잘 번역된 나무 책이 이 땅의 숲과 나무를 이해하는데 적절한지 고민해볼 일이다. 우리 고유의 나무, 사연과 전설이 가득한 일상의 나무를 만나고 싶었다. 정교한 설명서가 아니라 사람과 나무의 살림살이에 초점을 맞춘 책이 필요했다. 고규홍의 '한국의 나무 특강'은 바로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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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우리 곁에서 우리와 더불어 살아간다는 걸 몸소 느끼는 것은 우리 삶을 가장 아름답고 풍요롭게 여기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물론 자연의 여러 대상물 가운데, 푸른 풍요를 느낄 수 있는 대상물이 나무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리 사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개체를 가지는 자연물로 나무만 한 대상은 없을 겁니다. (중략) 나무가 아름답고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곳은 사람도 편안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는 곳입니다. 반대로 나무가 죽어가는 곳, 그곳은 사람도 살 수 없는 곳입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수 년 전 이 책을 처음 접하고 소개된 모든 나무를 찾아가 보겠노라 결심했다. 처음 방문한 곳은 집에서 가까운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149-1번지에 뿌리를 내린 천연기념물 제470호 물푸레나무였다. 이전까지 천연기념물 286호 파주 무건리의 물푸레나무가 최고수의 자리를 지켰는데, 2006년 4월 4일 이후로 새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높이 20미터, 가슴둘레 5미터에 육박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물푸레나무다. 아름답고 쓰임새도 많은 물푸레나무 중 으뜸인 존재를 그렇게 만났고, 가끔 안부를 주고받는 관계로 발전하였다.

전곡리 물푸레나무를 세상에 알리고 천연기념물로 만들어 낸 사람은 식물학자도 아닌 신문기자 출신의 인문학자 고규홍 선생이었다. 선생은 천리포수목원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전하는 메신저이자, 벌써 20년째 틈만 나면 낡은 승용차를 끌고 전국의 숲을 누비는 나무에 푹 빠진 사람이다. 이 땅의 나무들이 저마다 사연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입말체 문장과 어우러진 묵직한 선생의 책을 가까이 두는 것은 나무와 친해지는 지름길이다. 어느 독자에게나 마찬가지겠지만 선생의 글과 사진을 따라가는 여행은 즐거운 추억이 아닐 수 없다.


“나무도 자신을 알아주고 사랑하는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챘던 것일까요? 앞에서 이 나무가 꽃을 피운 게 2004년이라고 했잖아요. 제가 2003년 겨울에 문화재청에 이 나무를 지키자고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걸 알아채기라도 했다는 듯 나무는 이듬해 봄에 하얀 꽃을 활짝 피운 겁니다. 정말 놀라운 일 아닌가요? (중략) 마침내 문화재청에서 이 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가치가 있다는 걸 인정하고 2006년 4월 천연기념물 제 470호로 지정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또 경이로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2004년에 꽃이 피었던 이 나무가 한 해를 걸러 2006년 5월, 자신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직후에 다시 환하게 꽃을 피운 겁니다. 매일 이 나무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아주머니는 나무가 꽃을 피운 건 그렇게 단 두 번뿐이었다고 하십니다.” - 48쪽


수령 600살이 넘는 순천 선암사 매화는 천연기념물 제 488호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매실나무인데, 올해도 변함없이 꽃을 피웠다. 안동 도산서원의 매화나무(=매실나무)는 퇴계 선생이 충북 단양군수로 있을 때 만난 관기 두향과의 사랑 전설이 새겨진 나무다. 현재의 매실나무는 사실 수령이 훨씬 짧은 것으로 원래의 나무가 죽자 후학들이 퇴계를 기리며 다시 심은 것이라고 한다. 지역성 특성상 개화시기가 조금 늦은 관계로 남도의 봄소식을 놓치거나 아쉬울 때는 도산서원을 방문하여 매화를 비롯한 여러 다른 나무들을 만나보는 것도 추천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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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을 빛내는 나무 중 하나인 금송은 일본 사무라이의 충정을 상징이라서 불편하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진해 군항제가 하필 벚꽃축제라는 것도 부적절하다. 그렇다고 나무에 지나친 정치색을 부여하는 것도 옳지 않다. 임하댐 건설계획으로 수몰위기에 빠졌던 수령 700년 용계리 은행나무를 살리려고 노력했던 수자원공사 이상희 사장도 훌륭했지만 그의 탄원을 받아준 독재자 전두환도 인정해줘야 한다. 680톤 노거수를 생명토 공법으로 4년 동안 우직하게 옮긴 대지개발 이철호 사장의 실행력까지 3위 일체가 이뤄낸 쾌거임을 기억해야 한다.

부여 성흥산성 큰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린 느티나무는 ‘사랑나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후백제 견훤과 맞서 싸우던 고려 덕장 유금필의 지팡이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전설은 키 20미터, 가슴둘레 5미터, 수령 400년인 나무를 1,000년도 더 된 옛 인물과 연결시킨 당황스러운 사연이다. 강감찬 장군의 지팡이로 천년을 살았다는 신림동 굴참나무처럼 나무가 된 지팡이의 전설이 참으로 풍성하다. 태백산 정암사의 주목은 신라 자장율사의 지팡이, 순천 송광사 고향수와 천자암 쌍향수는 지눌의 지팡이, 용문사 은행나무는 의상대사의 지팡이라는 전설이 있다.

수령 300년 해미읍성 회화나무는 병인박해 당시 교수대가 되었던 참혹한 역사와 함께 150여 년 전 철사 줄이 그대로 박혀 있는 가슴 아픈 나무다. 여산 동헌의 느티나무와 팽성읍 향나무도 마찬가지 맥락의 아픔을 담고 있다. 신앙 때문에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신념과 배신을 통해 사라지거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교수목’ 줄기마다 새겨진 아비규환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랏줄에 매달린 머리채를 상상하는 사람들과 아무 것도 모르고 나무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관광객들 사이에 괴리마저 깊은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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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나무의 중심부인 심재는 썩어 들어가게 마련이다. 고목의 안쪽 조직을 끄집어내 확인해 보면 가운데가 텅 비어있기 십상이라 생장추나 탄소연대측정법으로 나무의 나이를 측정하는 일이 참으로 어렵다고 한다. 젊은 나무가 아니고서야 나무의 나이를 세는 일은 쉽지 않아서 터무니없이 나이를 먹어야 가능한 천 년의 전설이 난무하지만 그것을 두고 아무도 사기라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의 나무에 가장 많이 사는 짐승이 이무기임을 전할 만큼 감수성과 인간성이 맛깔스럽게 흐르는 따뜻한 에세이에 탄복할 뿐이다.


“나무의 수술 흔적은 많이 보셨을 겁니다. 큰 나무들을 보면, 나무 줄기의 썩은 부분을 뭔가로 잘 막아 놓은 것이 그것입니다. 시멘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냥 시멘트가 아니지요. 시멘트처럼 보이는 그 안쪽에는 황토라든가 다른 여러 물질이 혼합돼 있습니다. 나무가 오래되면, 줄기 안쪽이 잘 썩거든요. 그 안쪽을 심재라고 하고 바깥쪽을 변재라고 하는데, 심재는 좀 썩어도 나무의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습니다. 뿌리에서 잎까지 물을 끌어올리는 수관은 변재에 있으니까, 변재만 튼튼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썩은 곳을 그냥 놔두면 점점 더 썩겠지요. 그러다 보면 차츰 변재까지도 상처를 주게 되잖아요. 그게 위험한 겁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썩지 않게 막아줄 필요가 생깁니다.” - 192쪽


수령 600년의 ‘석송령’은 부모 자식 간의 정을 생각하게 하는 반송이다.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 416번지에 뿌리를 내린 나무이기 때문에 4월 16일의 참사를 상기시키는 아픔이 있다. 4.16미터 가슴둘레에 넓게 퍼진 그늘만 300평을 훌쩍 넘기는 큰 나무다. 일제강점기에 이 마을 살던 한 노인이 하나뿐인 아들 ‘이수목’과 헤어지고, 자식 대신 전 재산을 상속시켜준 부자 나무다. 석송령 앞에만 서면 팽목항에서 4.16km 떨어진 곳에 300여 그루의 은행나무로 조성된 ‘세월호 기억의 숲’이 연상된다. 우리 모두의 부모이고 우리 모두의 자식인 나무를 생각한다.

이 책이 전하는 ‘석송령’의 전설은 마을 이장님을 통해 전해들은 사연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감동은 달라지지 않는다. 100년 전 이름 ‘이수목’이 노인의 이름인지, 노인의 잃어버린 아들 이름인지 등 사실과 진실의 오묘한 차이만 있을 뿐 참으로 진솔하다.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디딤돌과 디딤목에 의지하는 석송령의 겉모습은 지팡이를 든 나약한 노인을 바라보는 듯 가슴 아프다. 10,000여 평의 주변 땅도 함께 소유했기에 재산세도 납부하고, 이 마을 출신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지급하는 부자 나무에 대한 이야기는 듣고 또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예천 땅에는 ‘석송령’으로부터 30분 거리에 또 하나의 부자나무가 있다. 1939년 2월, 마을의 공동재산을 등록해 일제의 수탈로부터 지켜낸 수령 500년의 팽나무로 용궁면 금남리의 당산나무 ‘황목근(黃木根)’이다. 황목근은 420평의 토지와 1,000만원이 든 정기예금 통장과 600만 원쯤의 일반통장으로 이 마을 출신 중학생에게 한해 30만원씩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고 한다. 재산이 있는 팽나무 ‘김목신 나무’의 고사는 안타깝다. 재산 유무와 상관없이 태풍과 벼락에 수난을 당하거나 병들어 죽어가는 나무들의 사연을 읽노라면 마음이 아프다.

신라 패망의 한을 담고 선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강화 전등사 은행나무 및 강릉 장덕리 은행나무, 성균관 문묘의 은행나무, 인천 신현동 회화나무, 제주 평대리 전설의 비자나무 숲, 제주 성읍마을 팽나무, 상주 상현리 반송, 합천 화양리 소나무, 의령 백곡리 감나무, 보은 어암리 백송, 봉화 청량사 고사목, 쌀밥처럼 아름다운 진안 평지리와 순천 평중리의 이팝나무, 조광조의 전설과 함께하는 나주 송죽리 금사정 동백나무, 익산 신작리 곰솔, 전주 삼천동 곰솔의 희로애락이 흐른다. 소개되는 나무마다 독자들의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이 필요해 보인다.


“이 땅의 큰 나무들에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나무도 사람처럼 살아서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분명한 생명체인 까닭이지요. 그러나 나무가 건네주는 이야기를 알아듣는다는 건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한 일입니다. 나무 곁에 머물러 그의 속내를 가만히 바라보는 데서부터 나무 이야기를 듣는 일은 시작됩니다. 그를 심어 키우며 그의 속살을 오랫동안 어루만졌을 그곳 사람들을 찾아보는 일은 당연한 다음 순서입니다. (중략) 나무가 서 있는 아름다운 마을을 찾아가고, 그 마을에서 오래 살아온 노인들을 찾아뵙고 이런저런 나무 이야기, 혹은 마을 살림살이 이야기를 듣는 건 빠뜨릴 수 없습니다. (중략) 결국은 사람 이야기인 셈입니다.” - 4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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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 선생은 감나무처럼 살고 싶다고 했다. 풀과 나무는 지구의 모발이고 사람은 이나 벼룩에 지나지 않는다는 놀라운 통찰을 보여준 조선 후기 실학자 홍대용 선생 말씀을 인용하며, 세상 모든 눈, 비, 바람 다 맞고 버티는 나무처럼 살 자신은 없지만 감나무처럼 살고 싶다고 했다. 살아 있는 동안 특별히 드러내지 않고 평범하고 조용하게 그저 주어진 삶에 충실하며 나무를 사랑했던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나무가 늙으면서 아름다운 것은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이겨낸 뒤에 얻어낸 초월과 해탈이라는 글을 읽고 마음이 숙연해졌다.

평생을 나무처럼 살았고, 고향 언덕 소나무 아래 영면하신 선생님으로부터 나무 사랑을 배웠고, 나무처럼 멋지게 살고 싶다고 다짐했던 날들을 생각한다. 한없이 자유롭기를 바라는 나약한 존재인 내가 어디 가당키나 한 결심인가 싶어 부끄러워졌다. 황사바람 속에서 이 책의 첫 장에 소개된 반계리 은행나무를 찾아가 세상의 온갖 오염과 황폐화에 저항하는 800년 묵은 주름과 유주, 그 깊은 표정을 지긋이 바라보며 더 좋은 사람이 될 것을 다짐했다. 나무처럼 살겠다는 위선보다는 그저 나답게 흔들림 없이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나무처럼, 나처럼…

[안중찬의 書三讀] 고규홍의 ‘한국의 나무 특강’ - 나무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안중찬 ahn0312@gmail.com
블라디팜 총괄이사 /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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