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雨水), 눈이 녹아 봄비를 부른다는 그 날 강원도 출장을 갔다. 동계올림픽이 한창인 곳답게 여전히 춥고 얼어붙은 산길은 거칠었다. 한적한 오르막 눈길에서 자동차 바퀴가 깊은 눈구덩에 박혀 꼼짝 못하는 위기에 빠졌었다. 트렁크 속 자잘한 도구들을 활용해 굳은 눈을 파내고, 기계식 4륜 구동으로 후진과 전진을 거듭한 끝에 겨우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대낮이었지만 전화도 잘 터지지 않는 깊은 산속에 홀로 있자니 두려움이 엄습했고, 무의식중에 흥얼거리던 노래가 반가웠다. 이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확실한 독고탁 세대다.

“천왕봉아 눈떠라~♪ 내가 왔도다~♬ 호서방에 보여봐라~♩ 내가 왔단다~♬”

우수고 독고탁. 1971년생 독고탁은 ‘주근깨’라는 작품에서 처음 등장했다. W가 가슴에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축구장을 질주하는 꿈과 용기의 상징이었다. 힘겨울 때나 민망할 때 저 노래를 우렁차게 부르던 독고탁을 생각한다. 독재자의 부인과 딸이 대를 이어 발행한 잡지라는 이유만으로, 학살자 시대의 3S에 농락당하는 철없는 열광이라고도 지적하는 까칠함도 어찌할 수 없는 희망의 노래다. 자라나던 새싹들에게 이념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독고탁과 어깨동무가 선물한 꿈과 희망은 우리 시대의 자부심이다.

평창동계올림픽 주경기장을 둘러보며 독고탁 시대에는 상상 조차 벅찼던 스포츠 강국이 된 우리의 위상에 자부심을 느꼈다. 많은 경기를 고화질 TV로 안방에서 지켜보며 목이 쉬도록 응원했다. 무엇보다도 여자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이 유럽의 강호 스위스, 스웨덴에 연달아 8-0으로 패하며 예선 탈락하고, 순위 결정전 포함 모두 5번의 경기에서 28골을 내주며 완패한 것은 가장 아쉬운 대목이었다. 예선 탈락 뒤 일본에게서 첫 골, 스웨덴과의 마지막 7~8위 결정전에서 한 골을 넣은 것은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서구의 우월한 신체 조건과 높은 수준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내부의 정치적인 공세로 힘겨웠던 상황에서 결성된 팀의 완패라 안타까웠다. 여러 가지 패인이 있겠지만 독고탁 시리즈의 도입부를 그대로 갖다 써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현상이었다. 이상무 화백의 2주기를 맞아 두툼한 세 권의 만화로 복간된 <울지 않는 소년>은 서독의 한 프로팀과 친선 경기에서 4:0으로 참패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오 감독이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서 시작된다. 서독이란 국가 명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은 사라진 냉전 시대의 유산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대한축구협회 김석원 이사는 회장을 설득하여 오래전에 협회가 외면하고 내쳐버린 풍운아 독고룡을 새 감독으로 데려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회장의 승인을 받은 김 이사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강원도 깊은 산골로 물어물어 독고룡을 찾아간다. 시대와의 불화로 가정도 지키지 못한 독고룡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와 헤어져 젖먹이 아들 하나를 품에 안고 속세를 떠났으니 십여 년 동안 그의 행방을 제대로 아는 이 하나 없었다. 그 깊은 산속에서 무엇을 했더란 말인가?

“난 이 산골에 들어와 내 나름의 무기를 만들었소.” 위독한 독고룡의 움막에서 하룻밤을 보낸 김 이사는 고민만 커졌다. 고작 몇 마디 대화만 나눴을 뿐인데 도대체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만 남기고 숨을 거둔다. 뒤늦게 나타나 아버지의 죽음을 대하는 독고탁은 도대체 슬픈 기색 하나 없이 아버지의 죽음 앞에 의연한 이상한 소년이었다. 독고룡의 고독한 죽음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던 김 이사는 산속에 홀로 남겨진 소년을 데리고 한없이 무거운 마음으로 하산한다. 문제를 해결하려다 고민만 깊어진 것이다.

독고룡의 죽음으로 마땅한 대안이 찾지 못한 대한축구협회는 김 이사에게 국가대표 감독직을 제안한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수락할 수밖에 없게 된 김 감독은 국가대표전용축구장에 독고탁의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팀의 재건에 집중한다. 국가대표팀을 새롭게 구성하고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초고교급 선수 김준은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르고, 도대체 내세울 것 없는 땅꼬마 독고탁은 국가대표 선수들을 조롱하며 세상에 적응해 나간다. 비교적 단조로운 줄거리는 숨 가쁘게 해피엔딩을 향해 달려간다.

“옥에 흙이 묻었으니 가는 이 오는 이가 다 흙이라 하도다?”, 독고탁의 진짜 실력을 몰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그저 웃던 김 감독의 표정은 참으로 여유롭다. 국수 한 그릇에 200원하던 시절 풍경과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서울운동장 축구장, 당시에는 비현실적이던 8만 관중의 브라질 경기장이 배경으로 상상력을 극대화 시킨다. 한 글자 이름을 애용했던 작가가 희성 ‘독고’를 선택한 것도 탁월했다. 당시 어느 인터뷰에서 고독한 주인공의 모습을 부여하기에 ‘독고’만큼 좋은 성이 없었다던 작가의 고백이 떠오른다.

“바보 녀석, 울지 말고 뛰어라. 눈물을 보이는 건 아빠를 욕되게 하는 거야. 마음이 응어리지고 답답할 땐 그렇게 뛰는 거다.” 힘겨울 때마다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눈물의 역설과 같다. 냉정하고 예의 없는 모습 뒤에 감춰진 깊은 슬픔이 제목으로 자리 잡은 이유이기도 하다. 김 감독 딸 숙이를 짝사랑하는 모습이나, 그녀의 관심을 받는 초고교급 스타 김준을 향한 질투의 삼각관계도 재미있다. 그 질투의 이면에는 출생의 비밀과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녹아있는데, 독고룡의 숨겨진 무기가 갖는 아킬레스건과도 같다.

‘탁은 오늘은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찼던 탁입니다. 엄마에 대한 따뜻한 사랑으로 가슴 부풀었던 탁입니다.’ ‘탁은 울고 있습니다. 결코 울지 않겠다던 탁이가 울고 있습니다.’와 같은 잔잔한 감정 해설이 흐른다. 작가의 표정처럼 친절한 내레이션이 보다 객관적 잔상으로 뭉클하게 남는다. 아버지 품에 안겨 산속으로 들어가 세상 물정 모르고 축구공만 다루며 성장한 탁이다. 어머니 얼굴도 모르고 자란 소년의 말 못할 그리움을 애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기법이 아닐 수 없다.

하산 직후, 더벅머리로 자유롭게 시내를 활보하던 독고탁은 학교에 가기 위해 까까머리로 변신해야만 했다. 교복을 입고 짧은 머리카락이 부끄러워 모자를 푹 눌러쓴 학생 독고탁은 같은 처지의 김준을 까까머리라 놀리는 모순된 모습으로 주변인을 황당하게 한다. 등장인물 그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짧은 머리를 유독 부끄러워하는 독고탁의 괴로운 마음은 작가 자신의 더벅머리에 대한 애착을 넘어 군사독재시절 획일적 문화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은근히 녹여낸 부드러운 저항이 아니었을까.

종반부에 이르러 밝은 표정으로 두발자율화를 언급하는 김준의 미소는 이 나라의 진일보를 증명하는 과정의 역사다. 1898년 배재학당으로부터 시작된 학생의 두발과 교복 통제 조치를 85년 만인 1983년에 이르러서야 풀어준 내막은 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한 신군부의 위선이었을지언정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 일대의 사건이었다. 까까머리에 대한 독고탁의 끊임없는 불평이 제 5공화국의 실세들에게 영향력을 끼치지 않았으리란 보장도 없지 않다. 인기 캐릭터의 심리전으로 이후의 세대들에게 자유로운 헤어스타일을 보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합숙소 수위 영감과 함께 생활하며 주고받는 엉뚱한 대화들,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는 국수집에서의 알 수 없는 행동,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장난치는 독고탁의 기행은 오래된 독자들의 죽어가는 동심을 자극한다. 국수로 입술을 돌돌 말아 준과 숙의 데이트를 방해하는 썰렁함도 현실에서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즐거움이다. 우연히 알게 된 출생의 비밀에 흥분해 경기장 화장실 거울을 주먹으로 치는 준의 고통스런 분노는 곱절의 고통으로 남았다. 냉전시대 한반도와 함께 또 다른 분단국가였던 독일의 통일 또한 예측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유럽의 강호 서독팀과의 경기로 시작된 만화는 종반부에 이르러 차붐을 연상시키는 차봉근 선수와의 조우로 뜨겁게 달궈진다. 당시 우리 축구 수준은 그야말로 바닥 중에 바닥이었고, 우리의 국력은 독고탁의 외모처럼 작고 보잘 것 없는 시대였지만 긍정적인 세뇌효과가 있었다. 서울올림픽을 1년 앞두고 종간된 어깨동무는 새소년, 소년중앙과 더불어 꿈과 용기를 심어준 고마운 잡지다. 요새 어린이들보다 그들의 부모가 더 행복할 수 있는 이유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독고탁이 활약하던 그 멋진 잡지들의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독고탁 정신은 독고준 정신과 극단적인 듯 일맥상통한다. 이상을 추구하느라 가정에 소홀했던 아버지와 남편의 꿈을 이해하지 못한 어머니의 불행이 어린 두 아들의 성장기에 큰 아픔이 되었지만, 형제는 나름의 방식으로 강하게 자랐다. 격동의 시대에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영웅이었고,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과 같은 기백을 제대로 보여줬다. 당시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월드컵 본선 4강전에 태극기가 등장하고, 독고탁·준 형제는 강력한 파괴력을 보이며 대표팀에 합류한 차봉근과 더불어 환상의 콤비로 세계를 향해 질주한다.

1982년 제12회 스페인월드컵, 1986년 제13회 멕시코월드컵을 조합한 가상의 경기가 브라질 월드컵으로 표현된다. 8강전에서 남미의 강호 아르헨티나를 누르고 본선 4강전에 진출하는 장면은 당시에 마냥 불가능한 꿈이었지만, 20년 뒤 서울에서 실현된 당당한 우리의 가능성이자 아름다운 미래가 되었다. 아시아 선수 최초로 미국 프로야구 월드시리즈에 진출했고 우승도 경험했던 우완 언더핸드 투수 김병현은 그 작은 체구에 변화무쌍한 신비한 투구 때문에 ‘독고 탁’이라는 영광스러운 별명도 얻었다.

주인공들의 개인기 중심이라는 점은 팀워크의 관점에서 쉽게 납득할 수 없지만 당시의 우리 스포츠 수준이나 어린 독자들 입장에서는 최선의 구성이었을 것이다. 국가대표팀의 의사 결정 과정은 물론 많은 행정적인 절차가 시대상을 잘 담고 있다. 장례식이나 편입학 과정, 호적 문제 등 제대로 검증되지 않는 불완전한 요소들은 오락가락 실수를 거듭하지만 독자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모순 많은 오래 전 만화를 현대식으로 복간한다는 것은 노력에 비해 티가 나지 않고, 노력이 적으면 금방 티가 나는 참으로 어려운 프로젝트가 성공했다.

“난 모든 걸 가질 테야. 엄마의 사랑도 아빠의 영광도, 그때까지는 난 결코 울지 않아.”

1965년, 고향 김천농고를 졸업한 후에 상경한 박노철은 스승 박기준 화백이 이상무라는 필명으로 월간 여학생에 연재하던 ‘노미호와 주리혜’를 그대로 이어받아 데뷔했다. 창작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던 시절에 검열의 밭을 무난하게 통과했고, 첫 작품을 20년 동안 연재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실력을 인정받는 것은 물론 필명이 본명보다 더 유명해졌다. 축구, 야구, 골프 등 다양한 스포츠 만화를 통해 키 작고 부끄럼 많은 작가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굳건하게 다져진 캐릭터 덕분에 ‘독고탁의 아버지’로 불렸다.

스포츠는 이념을 넘어 긍정의 힘을 보여주는 세계다. 88서울올림픽이 억압된 우리 사회를 세계에 알리며 민주주의 발전을 앞당겼던 것처럼, 2002년 월드컵은 경제위기와 더불어 패배 의식에 찌들어 있던 우리를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세워줬다. 그 위대한 스포츠대회들이 한반도를 뜨겁게 달구는 동안 수많은 스포츠신문들이 전성기를 달렸고, 남녀노소 불문하고 소시민들은 행복한 기억으로 가득했다. 이상무 화백은 떠났지만 불멸의 독고탁을 남겼다. 생활에 지쳐가는 오랜 벗에게 <울지 않는 소년>을 선물하며 말했다. “지운아, 독고탁 정신으로 달려!”

우수의 오후, 평창올림픽플라자를 거닐며 평화로운 번창을 상상했다. 남북이 힘을 합쳐도 세계의 높은 벽에 속절없이 무너지던 여자아이스하키 팀을 생각했다. 단일팀을 조롱하는 언론과 정치 세력들이 마치 자살골을 남발하는 선수들처럼 한심하게 느껴졌다. 경기장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오대산 상원사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개막식에서 세계를 감동시킨 위대한 동종 앞에 서서 이상무 화백을 추모했다. 수호랑 반다비 함께 평창의 곳곳을 누비는 독고탁을 상상했다. 아버지는 떠났지만 독고탁은 영원할 것이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블라디팜 총괄이사 /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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