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보편적으로 일본을 싫어한다. 세계 3대 경제 대국으로 배울 점도 많은 그 나라는 우리의 자주적 근대화의 길을 폭력적으로 막아 버린 가깝고도 먼 나라다. 한반도 분열의 근본 원인도 일본 탓이며, 남북 갈등과 그 존속을 바라는 것도 일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독도와 위안부 문제는 물론 매사 그렇게 스트레스를 주는 일본인들 중 일부가 혐한을 부르짖는 것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특히, 과거에 대한 책임이 없는 일본의 젊은이들은 우리를 편협하다고 비난한다. 도대체 일본인이 생각하는 한국은 어떤 나라일까?

한국의 학자들이 한국을 연구하지 않은지 이미 오래다. 때문에 일본뿐만이 아니라 여타 외국인들이 궁금해 하는 한국에 대한 연구 자료는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초고속으로 세계의 중심부로 진입한 한국에 대해 외국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여 왔던가? 무례한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티호노프가 ‘박노자’란 필명으로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통해 마구잡이로 욕설을 퍼붓듯 우리의 치부를 들쑤시며 밥벌이 했다.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다니엘 튜더, 베르너 사세 등도 한국에 대한 논평을 책으로 엮었지만 어림없었다. 보다 진정성 있고 냉철한 분석이 필요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노골적으로 욕망(人欲)이 방치되어 있다. 자기 집 대문 앞에 더러운 쓰레기를 대놓고 버리는 것을 보라. 강렬하고 왕성한 욕망이 얼마나 적나라하게 방치되어 있는가! 그러나 이것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한국 사회에서 질서, 도덕, 규범이 없기 때문에 거리의 욕망이 강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리’가 강하기 때문에 욕망이 방치된다. 그렇기 때문에 거리는 더러워진다. ‘리’를 신봉하는 한국인은 보편을 신봉한다. 보편을 신봉하기 때문에 잡다한 것을 싫어한다. 잡다한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무시한다. 그래서 거리는 점점 더 잡다해진다. 잡다한 것은 경멸할 만한 것이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 66쪽

찬탄과 비판을 겸비한 오구라 기조(小倉紀藏)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는 지금껏 세상에 나온 그 어떤 외국인의 시선보다 날카롭고 예리했다. <韓國は一固の哲學である>라는 일본 서적을 원제 그대로 번역했는데, 찬탄은 철학(哲學)에, 비판은 하나(一固)에 담았다. 부제는 ‘理と氣の社會システム(리와 기의 사회 시스템)’으로 다양한 사회 현상을 주자학의 ‘리(理)’와 ‘기(氣)’로 철저하게 해석했다. 우리나라의 특성을 이렇게 체계적이고 철학적으로 잘 풀어낸 책은 일찍이 없었다. 저자가 일본인이라는 것도 귀를 쫑긋하게 한다.

형식은 1983년부터 무려 23년간 조선일보에 연재된 ‘이규태 코너’를 생각나게 하는 짧은 글의 모음이다. 타계하기 이틀 전까지 민족 예찬에 할애한 이규태 선생의 글과 달리 날카롭고 명쾌한 비판이 뼈대를 이루며, 모든 현상을 리(理)와 기(氣)로 설명한다. 대상 독자는 일본인이며, 핵심은 한국을 우습게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1988년부터 무려 8년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유학했던 일본인 대학원생이 본국으로 돌아가 어떤 잡지에 기고한 것을 한 출판사가 출간을 제안하며 시작된 2년의 역작이다.

“이방에서 온 이 탁기(濁氣)의 ‘놈’은 연구실 한쪽 구석에서 벌레처럼 몸을 웅크리면서 오로지 주자학에 침잠하고 있었다. 주자학은 책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 전체가 주자학이었다. 한국인의 일거수일투족이 주자학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주자학적 세계관에 의해 철저하게 하위(下位)로 폄하되는 탁하고(濁) 치우치고(偏) 막히고(塞) 비천하고(卑) 악한(惡) 일본인이었다.” - 252쪽

철저하게 친화적으로 접근했던 한국에서 몸소 겪은 경험은 쓰라렸다. 외국인들이 가장 쉽게 접하는 한국의 거리에서 마주치는 평범하고 정 깊은 문화는 주로 기(氣)의 세계다. 그 배후에 지극히 준엄한 리(理)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들은 한국의 만만함에 긴장을 풀어버린다. 눈에 거의 들어오지 않는 ‘리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여행자나 단기 체류자가 ‘기의 세계’만을 엿보고서 “한국은 느슨하고 너그럽고 편하다”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한국인도 잘 모르는 한국의 특징은 그렇게 발견되었다.

조선시대의 통치이념 주자학은 성리학(性理學)과 동일한 말인데, 도덕적으로 완벽한 선이라는 성선설(性善說)의 철학이다. 인간은 본래 하늘로부터 100%의 도덕적이고 선한 ‘리(理)’를 부여 받았고,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기(氣)’의 탓이라고 본다. 사기에서 출발하고, 공자와 맹자가 계승한 유교 사상이 주자학으로 이어져 조선으로 건너와 600년간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발견했다. 서양의 세계관으로 도배질한 한일 아카데미즘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된 성찰이었다. 동양의 원형을 공부한 사람들이 현실에 관심이 없어서 안타까웠다고 했다.

원래는 찬연히 빛나는 일체화된 하나의 ‘리(理)’가 서구의 영향을 받아 진리·원리·윤리·논리·심리·생리·물리 등으로 분쇄되고 세분화된 것을 발견했다. 그 발견을 바탕으로 일반화의 오류에 함몰되지 않고 한국을 일격에 아웃시키겠다는 오만한 마음가짐으로 시작된 연구였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쓸 필요가 없는 그런 한국에 대한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나이를 한 살이라도 더 먹어야 대접 받는 ‘어른 공경(理)’과 나이를 먹을수록 청춘에서 멀어지는 강한 아쉬움의 ‘젊음 예찬(氣)’이 공존하는 한국은 참으로 신기한 나라였던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윗사람으로 힘이 있어도 도덕성이 결여된 ‘님’들은 국회의원놈, 사장놈, 부자놈, 검사놈, 교수놈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반미투쟁이 성행했던 때 미국은 ‘미국놈’이었다. 어디에선가 ‘님’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에 매료되어 다가가 본다. 그러자 거기에는 무서운 ‘놈’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179쪽

한국은 도덕 지향성 국가다. 가수가 노래만 잘하면 된다든가, 운동선수가 경기 성적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으로는 한국에 적응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얼마나 도덕적인가를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설명하고 이해를 구한 뒤에야 비로소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 한국에서 도덕의 최고 형태는 그것이 권력 및 부와 삼위일체 된 상태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현실에서 도덕이 권력이나 부와 결합되는 과정에서 거의 모든 도덕이 상처를 입는다. 욕망과 현실만을 강조했다가는 부도덕하고 비천한 존재로 분류될 수도 있다.

도덕 지향성 국가지만 모두가 도덕적으로 살고 있다는 의미도 아니다. 대표적으로 한국의 권력 투쟁은 기득권 세력을 향한 부도덕성 폭로의 역사를 담고 있다. 영남학파 이퇴계는 마지막 사화에 휘말린 뒤 고향에 칩거하며 리의 철학을 건립했고, 기호학파 율곡 계와 쌍벽으로 조선 후기를 주도했다. 이러한 도덕지향성이 바로 유교의 역동성으로 축복이자 저주가 되기도 한다. 민족중흥, 정의 사회 구현, 국민 행복시대와 같은 실제와 무관하게 도덕성을 강조한 암투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야당인 사대부는 여당인 양반의 도덕을 공격한다. 그들의 도덕 내용 자체, 그리고 권력, 부와의 결합 관계에 비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 공격이 멋지게 성공하면 양반 세력은 전복되고 사대부가 정권의 중추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핵심 권력과 부를 손에 넣은 사대부는 쉽게 귀족화, 보수화 되어버린다. 사대부의 양반화인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새롭게 등장한 사대부가 이번에는 신양반을 위와 같은 이유로 공격하게 된다. 그리고 공격이 성공하면 신양반 세력은 무너진다. 새로운 사대부가 또 신신양반이 된다. 유교 정치는 이것의 반복이다.” - 137쪽

조선시대로부터 이어진 유교적 전통에 의해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도덕쟁탈전은 현대 정치에 그대로 적용된다. 저자는 조선시대 리(理) 계층의 가치를 양반(=도덕+권력+부), 사대부(=도덕+권력), 선비(=도덕)로 구분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선비는 항상 핵심권력의 밖에 몸을 두고, 양반과 사대부의 도덕을 싸잡아 공격한다. 그들은 정권을 잡을 생각이 없고 그 도덕이 상처와 흠집이 없다. 매월당 김시습이나 김삿갓에서 알 수 있듯이 선비 중에서 실패자와 좌절자들은 그 도덕성이 지나칠 정도로 찬사를 받기도 한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적당히 체념하는 데 반해 한국인의 출세 지향은 끊임없는 인정욕구를 갈망한다. 한국의 급성장은 이런 열망 때문에 가능했지만 스스로를 끊임없이 괴롭히며 살아가고, 열망이 좌절되고 리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기의 무대로 옮겨가 칠정의 카니발(喜怒哀樂愛惡欲) 속에서 독특한 정서 ‘한(恨)’을 품는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더라도 상대를 ‘님’과 ‘놈’으로 구분하고, 그에 맞는 대접을 하는 냉정한 사회다. 첫 만남에서 나이부터 묻고, 명함의 지위나 혈연·지연·학연에 의해 서열이 정해진다.

한국은 산자와 죽은 자의 공동체 즉, 혼의 공동체라는 주장도 통계청의 인구발표를 무색하게 한다. 대다수가 각자의 조상을 양반이었다고 주장하는 양반지향성도 그렇다. 조선왕조 이후 당파 싸움이나 동학의 기원 등 역사들의 서술과 구조를 명쾌하게 설명하는 것도 짧고 깊다. 이제마의 사상의학을 한국인 보다 더 잘 이해하고, 연암의 양반전과 같은 고전에 대한 지식도 해박하다. 영화 ‘서편제’의 본질을 한국인 보다 더 가슴 아프게 꿰뚫어 보고, “아이고!”라는 탄식에서 우리 고유의 한을 읽어내는 저자에게 경외감이 든다.

이럴 수가! 한국인들은 20년 동안 이 책의 존재도 모르고 있었다. 모든 한국인이 몰랐던 것도 아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주체사상 이론가 황장엽도 감명 깊게 읽었다고 했다. 그동안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민감한 한일 간의 정서 때문에 일본인이 쓴 한국의 비판 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다른 한국에 관한 외국인과 비교했을 때 훨씬 깊이 있고 애정이 넘치는 글임에도 우리는 일본인의 시선을 늘 한수 아래로 보기 때문이었을까? 오죽하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본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한국인이란 농담이 있을까.

“위대한 문자라는 의미의 한글이란 말은, 조선이 일본의 압박에 시달리던 근대시기에 민족주의의 고양과 보조를 같이하여 새롭게 만들어진 명칭으로, 그 이전까지는 ‘언문(諺文. 천한 백성의 문자)’이나 ‘암글(암컷의 문자, 여성 문자)’ 등으로 불리면서 비하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일본이라는 타자에 의해 민족이 억압받자, 한글 보급 운동이 마른 벌판에 불 붙듯이 전개되었다. 즉, 조선시대에는 ‘중화리(理)의 문자’인 한자(眞書)에 대해 ‘기의 문자’로 멸시되던 한글이, 일본이라는 탁기에 대항하기 위한 민족주의의 고양과 함께 재발견되어, 찬란한 ‘민족리(理)의 문자’로 승격된 것이다.” - 104

한글의 오염도 리기적 역사관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비단 한글뿐이던가. 원래 일제와는 전혀 무관했던 생활의 고통을 읊조리거나 잔치를 흥겹게 하던 소박한 민중의 민요로 조선인들의 정이 결집된 ‘기(氣)의 아리랑’도 마찬가지다. 일제 강점기 관통하면서 고난의 민족사를 상징하는 노래가 되어, 독립운동가들의 저항의 노래이자 ‘민족리(理)의 아리랑’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은 뼈아픈 지적이다. 저자의 유학시절 한국의 상아탑에서 출처도 불분명한 외래어가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했다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약관의 정현이 2018 호주오픈 테니스 대회 남자 단식에서 4강에 오르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불필요한 이념대립으로 갈라선 나라를 다시 하나로 똘똘 뭉치게 한 아름다운 사건이었다. 비인기 종목이면서도 사치스러운 취미 생활 정도로 평가받던 테니스는 이제 더 이상 기(氣)의 스포츠가 아닌 리(理)의 스포츠로 민족의 중심부에 우뚝 섰다. 박찬호, 박세리, 김연아의 뒤를 잇는 스포츠 영웅의 탄생도 이 훌륭한 지침서를 통해 해석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책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나침반이 아니라는 것도 인식해야 한다.

오구라 기조는 이 훌륭한 책을 통해 한국을 하나의 철학이라고 규정했고, 등잔 밑이 어두운 한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지만 결코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주자학과 대립했던 양명학파의 후예 서여 민영규 선생은 진정한 지식인의 자세를 떨리는 지남철에 빗대지 않았던가?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이 떨림을 멈추는 순간 그 쓰임이 다하듯이 우리의 존재와 관계에 대해서 끊임없이 성찰하는 역동성의 바늘 끝을 오구라 기조가 아직 ‘모를 리(理)’도 없다. 우리가 오로지 하나의 철학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은 우리들 스스로가 증명하면 되는 것이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블라디팜 총괄이사 /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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