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密陽). 정월의 두 번째 주말은 볕이 촘촘한 당신의 언덕에서 보냈다. 대중교통은 난감하고, 서울에서 승용차로 4시간을 훌쩍 넘기는 먼 곳이라 주저하는 이들의 초행길을 안내하는 기쁨으로 운전대를 잡는 곳이다. 공식 추도회는 가묘가 있는 성공회대학교에서 진행하기 때문에 당신의 언덕은 작년처럼 한산했다. 잔설과 결빙을 밟고 조심스럽게 오른 영취산 산마루에 주차를 하고 영탄과 영재, 정민이 함께 천 걸음의 산책로를 걸었다. 본디 그 땅의 주인인 노루와 까치들이 반기는 아름다운 곳이다.

가는 동안 영화 <1987>을 소재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톱스타들이 조연과 단역으로 적소적재의 매력을 발산한 명작이었는데, 그중 설경구가 열연한 재야인사 김정남의 뒷얘기에 벗들이 귀 기울였다. 당신의 장례식장에서도 영화처럼 등장했던 그이는 한 번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정치권에 기웃거리지도 않고 30년 넘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킨 현대사의 자부심이다. 이 나라 민주화의 중요한 고비마다 핵심 기획자로 활동했던 그이는 숨은 보석 같던 당신을 세상에 알린 고마운 사람이다.

영화가 보여준 그 여름의 성공은 불과 반년 만에 야권단일화의 실패로 군사정권을 연장시켰지만 그럼에도 역사는 진일보했다. 이듬해 봄, 은둔의 생활을 접고 주간 ‘평화신문’의 창간을 주도했던 그이는 우연한 기회에 당신의 엽서를 읽고 전율했다고 한다. 가족들이 보여준 정갈한 옥중 편지의 감동과 울림을 그대로 담아둘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엽서에서 집자한 글씨로 제호를 구상했고, 7월부터는 아예 신문에 연재하며 당신의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것이다. 독자들은 반응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작년 여름 비로 다 내렸기 때문인지 눈이 인색한 겨울이었습니다. 눈이 내리면 눈 뒤끝의 매서운 추위는 죄다 우리가 입어야 하는데도 눈 한 번 찐하게 안 오나, 젊은 친구들 기다려 쌓더니 얼마 전 사흘 내리 눈 내리는 날 기어이 운동장 구석에 눈사람 하나 세웠습니다. 옥뜰(獄)에 서 있는 눈사람. 연탄조각으로 가슴에 박은 글귀가 섬뜩합니다. 「나는 걷고 싶다.」 있으면서도 걷지 못하는 우리들의 다리를 깨닫게 하는 그 글귀는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 이마를 때립니다.”
- 388쪽, 1988년 1월 30일 '계수님께' 보낸 편지 부분

마흔여덟 번째 음력생일에 어머니는 흥분된 표정으로 접견실에 나타났다. 88올림픽을 앞두고 세상이 많이 변했고, 신문을 통한 구명운동도 좋은 결실을 얻었다고 했다. 20년 전 음력생일에 간첩 누명을 쓰고 끌려온 당신이 이틀 뒤 광복절에 특사로 풀려난다는 희소식이었다. 몹시 기쁜 일이었지만 같은 방 죄수들을 생각하면 미안하고 착잡한 마음에 말도 못하고 만감이 교차하는 시간을 보냈다. 전주교도소 2192번 무기수였던 당신은 정태춘의 ‘떠나가는 배’로 환송을 받으며 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맹세도 없이 그렇게 평화의 땅을 찾아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출소 첫 날은 아버님이 입원해 계시던 중앙대병원에서 밤을 새웠다. 지금은 흑석동과 남태령으로 각각 옮겨 갔지만, 군사독재시절 악명 높은 수도방위사령부 취조로 시작된 옥살이가 끝나는 날에 바로 그 자리에서 첫 밤을 보낸 드라마틱한 사연이다. 햇빛출판사를 운영하는 아동문학가 윤일숙 사장은 미리 준비하고 있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전국의 서점에 깔았고, 세상은 당신을 환영했으며 기쁨은 배가 되었다. 익명의 서문은 물론 제목을 정한 사람도 신독헌(愼獨軒) 김정남이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 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 329쪽, 1985년 8월 28일 '계수님께' 보낸 편지 부분

당신의 ‘여름징역살이’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대표작이다. 자기의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하여 키우는 ‘부당한 증오’가 없이 사는 사람들의 도덕성과 인성을 비난하는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성찰의 명문이다. 계수님에게 보낸 엽서라 얼핏 동생 부부를 향한 따뜻한 위로일 수도 있지만 무심코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존재의 이유들을 깊이 생각하게 하는 사회적 메시지였다. 철심에 먹물을 발라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또박또박 적어낸 그 정갈함도 가히 예술이다. 억압된 환경에서 그렇게 맑은 영혼을 유지할 수 있었음에 독자들은 감동했다.

대개는 진지하지만 계수님을 향한 글은 비교적 경쾌하고 친근한 유머 코드가 녹아 있었다. 고통을 풀어내는 웃음의 행간에 숨어 있는 고뇌가 발견될 때마다, 교도소는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진 곳이 아니라 사회모순과 직결된 공간이며 사회를 향하여 활짝 열려 있음을 깨닫게 된다. 흔들리는 이빨을 실로 묶어 뽑아 들고 다니다가 15척 담장 밖으로 집어 던지며 일부의 출소라고 선언한다거나, 대전교도소의 고양이 ‘꽃순이’가 사실은 솔방울만한 불알이 달려 있는 늠름한 수컷이라는 그림 딸린 엽서를 읽노라면 얼굴 한 가득 웃음이 터져 나온다.

총각 시숙이 계수님께 연정을 담아 보낸 것 아니냐며 짓궂게 물어오는 사람들이 흔했을 만큼 당신의 편지는 애틋했다. 엽서 원본에 찍혀 있는 ‘검열필’ 도장을 봤더라면 금방 풀리는 그런 의문인데 말이다. 형제보다 그들의 배우자를 대상으로 쓰는 글이 편했던 것이다. 단순한 소식도 혹시나 검열에 걸릴까 고심하며, 하고픈 말을 다하지 못한 채 매우 정화된 내용의 소식을 보내야 했던 자기검열의 나날이었다. 때문에 당신은 훗날 이 책의 속편을 만들게 된다면 그 제목을 <다시 쓰고 싶은 편지>로 하겠노라 공공연히 이야기하곤 했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 313쪽, 1984년 11월 29일 '형수님께' 보낸 편지 부분

발신은 언제나 당신의 한글 이름이었고, 시절에 따라 ‘대전시 중촌동 1번지’ 혹은 ‘대전시 중구 대정동 36번지’, ‘전주시 평화동 3가 99번지’라는 주소가 붙었다. 그에 비해 수신자 이름은 한자로 늘 깍듯했는데, 형수님의 경우도 ‘黃○○ 귀하’와 같았다. 계수님만큼은 동생의 옆자리를 의미하는 ‘申榮碩 옆’으로 친밀감이 느껴졌다. 시절 문화가 새겨진 겉봉에서부터 계수님께 보낸 편지와 달리 형수님께 보낸 편지는 상대적으로 무겁고 이성적이다. ‘관계의 최고 형태’라는 당신의 핵심 철학도 1984년 늦가을 형수님과의 교감을 통해 완성된 명문이다.

이 책은 당신의 일방적 편지로만 구성되었지만 주고받은 내용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평소와 달리 힘든 현실을 드러낸 형수님의 편지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는 답장도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한 달에 한 번뿐인 접견을 거르지 않았고, 꾸준히 주고받은 편지 속에 녹아든 사랑과 우애는 절망에 빠진 당신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밀양 선영에 당신을 모시고 돌아오던 날, 흙비에 젖은 옷을 털어주시던 카리스마 넘치는 계수님과 구석에서 조용히 말 걸어 주시던 형수님의 미소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형님의 결혼은 저에게도 무척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다만 한 장의 엽서를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 한 장의 엽서를 앞에 놓고 허용된 여백에 비해서 너무나 많은 생각에 잠시 아픈 마음이 됩니다. 이 아픔은 제가 처하고 있는 상황의 표출인 동시에 또 제가 부상해 볼 수 있는 기쁨의 상한이기도 합니다. 이는 형님의 결혼식에 결석한 동생이 뒤늦게 엽서를 적음으로써 처음으로 느끼는 그런 아픔이 아닙니다. 이것은 서울의 외곽, 비탈진 세가를 살아오면서도 내내 격려하고 격찬해 주시던 일체의 배려에 생각이 뻗칠 때마다 ‘형’이라는 일상의 ‘이미지’를 넘어서 농밀한 감정을 비집고 올라오던 뜨거운 회한인 것입니다.”
- 69쪽, 1971년 5월 25일 '형님께' 보낸 편지 부분

스스로 닮고 싶은 인간상이 ‘데미안’이라고 고백했던 당신의 초기 편지들은 보다 관념적이다. 초판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총 306쪽으로 1975년 6월 이후의 글만 실렸는데, ‘저자와의 협약으로 판권 생략’을 명확히 인쇄한 불평등한 에세이였다. 출소와 동시에 부랴부랴 만들어진 책이라도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고, 아직 다른 죄수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던 시절의 창백한 편지가 실리지 않았던 것이다. 당신이 그토록 강조했던 ‘머리→가슴→발’ 먼 여행의 관점으로 보면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 시절이 생략된 책이었던 것이다.

1988년 초판본 책은 10년이나 스테디셀러의 지위를 누렸지만 두 번의 원고료 외에 아무런 금전적 보상이 없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당신의 순수한 마음이 이렇다 할 계약서도 없이 5년 뒤 자동 계약 연장되며 최저 인세만 받았던 것이다. 소주 상표로 명성을 얻은 당신의 붓글씨 ‘처음처럼’도 별도의 저작권료 수익이 없었지만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행히 낯선 감옥에서 조화롭게 파고들지 못한 청년 시절 당신의 편지는 새로운 출판 계약과 함께 세상 밖으로 공개될 수 있었고 저작권 문제도 해결될 기회가 찾아왔다.

출판인 한철희는 당신과 함께 지금은 사라진 첫 번째 출판사에 동행했다. 그 무렵 당신의 신분도 사면복권 되는 겹경사가 있었다. 출소 10년 만에 진정한 민주정부의 등장으로 세상이 더 따뜻해졌고, 교육자 이재정과 기업가 김승연 등 여러 사람들의 노력에 어정쩡하던 신분도 정교수로 안정을 찾았다. 개정증보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박재동 화백이 표지를 그렸고, 내용적인 면에서도 ‘쇠귀 신영복’ 문학의 걸작이라 할 수 있는 ‘청구회 추억’을 전면에 내걸었을 뿐만 아니라 모두 230여 장의 엽서로 매우 풍요로워졌다.

“벽에 기대어 앉을 때 저는, 결코 벽에 기대어 앉으시는 일 없으신 아버님을 생각합니다. 간결한 대화, 절제된 감정으로 그 짧은 접견 시간마저 얼마큼씩 남기시는 아버님의 접견은 한마디라도 더 실으려고 마지막까지 매달리는 여느 사람들의 접견과는 대조적으로, 흡사 여백이 넉넉한 한 폭 산수화의 분위기입니다. 한국의 근세를 읽으면서 저는, 가혹한 식민지의 시절을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 사셨던 아버님의 고뇌와, 지금은 기억조차 불가능한, 다섯 살의 저에게 항일을 가르치던 아버님의 지우들의 고뇌까지도 함께 읽게 됩니다.”
- 168쪽, 1980년 12월 15일 '부모님께' 보낸 편지 부분

벽에 기대어 앉을 때마다 당신은 ‘사람은 부모보다 그들의 시대를 닮는다.’던 선친을 생각했다. 매 편지마다 ‘아버님의 하서와 보내주신 책 잘 받았습니다.’란 되풀이 되는 문장으로 자상한 옥바라지를 그려볼 수 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생활의 구석구석에서 어머님을 만난다는 고백 속에서도 불효자의 설움이 베어 나온다. 밥 때는 물론이고 빨래를 하거나 걸레질을 할 때에도 은은하게 밀려오는 사모곡이 처연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당신의 서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글씨가 기여하는 과정도 잔잔한 희망으로 기록되었다.

당신의 친필로 ‘개교 100주년 기념비’가 세워진 밀양초등학교 교정을 걸었다. 그곳에서 시작된 20년의 학교생활, 감옥에서 보낸 20년의 진짜 학교생활, 강단에서 보낸 20년의 학교생활로 당신의 일생이 저물어 갔다. ‘감옥이란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은 갇히지 않았다는 착각을 하게 하는 정치적 공간이다.’라고 했던 미셸 푸코의 선언처럼 감옥이 곧 학교였고, 학교가 곧 감옥이었다. 혼돈과 깨달음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냇물처럼, 강물처럼, 바다처럼 속절없이 떠나간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나는 그곳에서 30여 분 떨어진 ‘쇠귀의 언덕’에 오른다.

일주일 앞서 밀양에 다녀왔다는 사모님의 기별이 있었다. 서울에서 있을 2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여럿이 함께 할 것을 권장하시는 그분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드린다. 그곳 성공회대학교 추모공원은 진짜 당신이 잠들어 있는 언덕만큼 편하지 않아 주저하는 못난 제자를 용서 바란다. 첩경(捷徑)과 행운에 연연해하지 않고, 역경(逆境)에서 오히려 정직하며, 기존(旣存)과 권부(權富)에 몸 낮추지 않고, 진리와 사랑에 허심탄회한, 그리하여 스스로 선택한 우직함이야말로 인생의 무게를 육중하게 한다던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그 산길이 좋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블라디팜 총괄이사 /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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