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벌의 반대말이 무엇인가?”
“남벌 아닙니까?”
“북학이네.”

이현세 만화에 푹 빠져 지내던 청년 시절, 선생님과 주고받은 대화 이후에 방대한 열하일기를 처음 읽었다. 쉬운 글을 어렵게 옮긴 고루한 학자들에게 실망하며 읽었다. 열두 해 전, 북한의 리상호가 연암 서거 150주년에 옮겨 놓은 글을 50년 만에 접하고 대체로 만족하며 읽었다. 며칠 전 김혈조 선생의 5년의 역작 돌베개 판을 병독하고 그 정성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기 1780년 음력 6월 24일 오후에 280여 명의 조선 사람들이 압록강을 건넜다. 조선 정조 4년이던 그 여름에 청나라 건륭 황제의 일흔 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외교사절단이 출발한 것이다. 영조의 부마도위로 임금의 고모부 박명원이 선두에 섰고, 뒤따르는 사람 중에 한량 박지원도 있었다. 자칭 ‘껄껄 선생’이라던 마흔넷 호탕한 사나이는 황해도 연암에 은둔하며 조용히 지내다가 자신을 탄압했던 홍국영이 실각하자 오랜만에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팔촌형 박명원의 부름을 받고 공식적인 직책 없이 북경 여행길을 따라나선 것이었다.

모든 일정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더라면 결코 ‘열하일기’라는 제목을 가질 수 없었던 기행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해외여행 한 번 나서지 못한 조선 최고의 지식인이 책으로만 학습한 이론을 대륙에서 현장실습하고 검증하며 기록한 선진문화의 보고였다. 과시를 위한 관념적 글이 아니라 나라의 존망을 걱정하며 미래지향적인 대안을 찾아가는 애국심이 돋보이는 폭넓은 지식의 백과사전이었다. 압록강을 넘어 3개월의 여정으로 출발했는데, 도중에 사정이 생겨 예정에 없던 열하의 피서산장까지 다녀오면서 더욱 풍성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바야흐로 벼슬이 올라갈 때는 한 등급, 반 계단씩 올라 남에게 뒤처질까 봐 남을 밀치고 앞을 다투다가, 마침내 몸이 숭고한 자리에 이르면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고 외롭고 위태로워 앞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뒤로는 천 길 낭떠러지로, 붙잡거나 도움 받을 희망마저 끊어져서 내려오고 싶어도 내려올 수 없게 된다. 천고에 모든 것이 그러했을 터이다.” - 제1권 356쪽, ‘일신수필’ 중에서

당시 집권 세력인 노론 명문가 출신임에도 벼슬에 뜻이 없었던 연암은 기득권층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죽을 때까지 늙은 종 하나를 뒀을 만큼 청백리로 이름을 날린 조부 박필균의 영향이 컸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형님 내외를 부모처럼 생각하며 가난하게 자란 연암은 글공부에 얽매이지 않으며, 집안의 늙은 종을 통해 옛이야기를 들으며 민중 속에서 성장했다. 열여섯에 장가들었는데 사위가 까막눈임에 놀란 장인어른 형제가 3년간 집중 과외를 시켜 천재성을 다듬었고 뒷심 있게 전국에 이름을 떨쳤지만, 과거시험을 거부하며 권력을 멀리했다.

조선중기 봉건 지배세력은 왜란과 두 차례의 호란을 겪으며 스스로의 무능을 만천하에 드러냈지만 별다른 반성 없이 당파 싸움에 여념이 없었다. 외부의 침략자들에게 꼼짝도 못하고 도망 다니면서 왜구라고 오랑캐라고 말로만 업신여겼고, 백성들이 피와 땀으로 되찾은 나라와 복구된 경제 상황을 부끄러워하는 일부 양심적인 양반들이 그나마 실학의 선구자들은 주로 남인 야당들이었다. 연암은 자신의 뿌리인 집권 노론세력과 관계를 멀리하며 ‘양반전’, ‘허생전’ 등의 소설로 그들을 조롱하며 재야에 머물렀던 것이다.

압록강을 건너 하루에 80리~120리를 행진하는 동안 날씨와 겪은 이야기와 농담 한 마디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챙겼다. 만주족 늙은 여인, 한족 미녀들, 남의 밭을 침범한 돼지가 총에 맞아 죽은 이야기, 노처녀 딸을 도적년이라 부르는 관점 등 민초들의 말투·표정·옷차림을 섬세하게 기록했다. 곤장 대신 뺨을 치는 형벌 장면에 당황했고, 낙타 구경을 거푸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 결혼식·장례식, 서당·사당, 편액과 도서 목록까지 낱낱이 기록하고 살피며 전진했다. 야밤에는 측간에 간다고 뻥치고 나가 친구를 사귀었고, 말이 안 통해도 필담과 음주가무를 즐겼다.

“중국의 풍부한 재화와 물건이 어느 한곳에 막혀있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져 옮겨 다닐 수 있는 까닭은 모두 수레를 사용하는 이점 때문이다. (중략) 사대부들이 평생 읽는다는 글은 ‘주례’라는 성인의 저술인데, 거기에 나오는 거인(車人)이니 윤인(輪人)이니 여인(輿人)이니 주인이니 하는 용어를 말하고 있지만 그저 입으로만 외울 뿐이요, 정작 수레를 만드는 법이 어떠한지 수레를 부리는 기술이 어떠한지 하는 연구는 없다. 이는 소위 건성으로 읽는 풍월일 뿐이니, 학문에야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오호라! 한심하고 기막힐 일이다.” - 제1권 286쪽 ‘일신수필’ 중에서

용도별로 다양한 종류의 수레를 상세하게 관찰하며 낙후된 조선이 나아갈 길도 제시했다. 벽돌 쌓는 법과 벽돌 가마의 구조적 장점, 중국의 캉과 조선의 온돌방을 비교하여 쓰임을 고민했고, 시장 점포와 무지개다리의 유용성에 탄복했다. 장거리 여행에서 고생하는 마부들을 관찰하며 조선의 전형적인 말몰이가 위험한 8가지 이유도 조목조목 적어뒀다. 장맛비로 꼼짝을 못할 때는 투전으로 소일했고, 심양 하늘을 날아다닌 잠꼬대까지 기록하는 등 한 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안시성에 대한 오류도 잡아내고 옛글도 되살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음력 5월 25일에 임금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한양을 출발해서 평양을 찍고, 근 한 달 만에 압록강을 넘었다. 7월 9일 심양에 도착하기 까지 도강록(渡江錄), 7월 14일까지 심양에 머무는 동안 성경잡지(盛京雜識), 7월 23일 산해관까지 일신수필(馹迅隨筆), 8월 4일 북경까지 관내정사(關內程史)라는 소제목으로 기록을 남겼다. 노숙 끝에 도착한 심양에서 수난과 사기도 당했으며, 호행통관 쌍림의 횡포도 다스렸다. 맹강녀의 전설 현장을 살펴보며 여유롭게 도착한 북경의 자금성에 황제는 없었다.

8월 5일 새벽, 생일잔치 전까지 열하로 오라는 황제의 엄명에 우왕좌왕 정신이 없었다. 돌발 상황에서 인원수와 짐을 대폭 줄여 최정예만 출발했다. 북경에 남을 마두 장복이와 눈물로 이별했고, 강행군에 지친 견마잡이 창대가 걸어가면서 잠꼬대하는 장면이나 말발굽에 밟혀 다친 것을 안타깝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8월 9일 열하에 도착하기까지 눈도 제대로 붙이지 못하는 닷새 동안의 긴박한 일정은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에 고스란히 남겼다. 이후 닷새 동안 열하에 머물며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도 남겼다.

“해와 달은 오른쪽으로 돌아 마치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는 것 같아, 그 궤도가 크고 작은 것이 있고, 돌아가는 속도가 더디고 빠른 것이 있어서, 해가 1년이 되고 달이 그믐이 되는 것이 모두 정해진 법도가 있습니다. 해와 달이 왼쪽으로 돌면서 지구를 두른다고 말한다면 우물 안에 앉아서 하늘을 보듯 지나치게 좁은 식견이 아니겠습니까? 지구의 본체는 둥글고 허공에 걸려 있어 사방도 없고 또 위와 아래도 없으며, 또한 자기의 위치에서 마치 문의 돌쩌귀가 돌아가듯 해서 태양과 처음으로 마주치는 곳이 아침에 먼동이 트는 지방이겠지요? 지구가 점점 돌면서 처음 태양과 마주치는 곳에서 점점 어긋나고 멀어지면서 정오도 되고 해가 기울기도 하여 낮과 밤이 되는 것이겠지요?” - 제2권 75쪽 ‘태학유관록’ 중

태학관에서 청나라 사람 곡정 왕민호와 조선 출신의 귀주 안찰사 기풍액 등 여러 친구를 사귀게 되는데, ‘달에도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면, 달에서 우리 지구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감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연암의 일상적 상상력이 그들을 압도한다. 드넓은 우주의 원리를 깊이 공부한 연암이 사람들이 함부로 담지 못하는 지동설을 기반으로 끝없는 이야기를 펼쳤다. 물론 지구가 스스로 돈다는 것 정도만 이해하고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것은 몰랐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견해였다. 세상 모든 원리를 신이 아닌 과학적 관점으로 해석한 선구자였다.

스스로를 공무수행에서 비껴난 한가한 유람객으로 규정한 연암은 황제와 주변 인물의 동향을 자유롭게 관찰하고, 곤란한 명령에 괴로워하는 사신들을 바라보며 엉뚱한 상상으로 즐겁다. 만약 사신이 황제의 명령을 거부한다면 얼마간의 명성을 날리겠지만 틀림없이 아주 먼 운남과 귀주로 유배를 갈 것이고, 자신은 의리를 핑계 삼아 서촉이나 강남 유랑도 가능하겠다는 낭만에 빠진다. 중국인 친구들과의 다양한 이야기는 곡정필담(鵠汀筆談), 천애결린집(天涯結隣集), 경개록(傾蓋錄) 등에 더 자세히 나오는데, 창대의 시선을 통한 동성애 목격담은 가히 파격적이다.

열하일기는 시간의 흐름에 충실한 기행문이지만 북경으로 되돌아가는 8월 20일까지 엿새 동안의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이 마지막 일정이고 후반부는 사건이나 주제별 기록이다. 양고기 맛을 잊게 한 음악 이야기 망양록(忘羊錄), 요술놀이에 관한 환희기(幻戱記), 라마교에 대한 황교문답(黃敎問答), 사행과 관련된 행재잡록(行在雜錄), 공자 사당을 참배 후 알성퇴술(謁聖退述), 다양한 종교에 관한 앙엽기(盎葉記), 장성 밖 구외이문(口外異聞), 북경의 황도기략(黃圖紀略), 의약 처방인 금료소초(金蓼小抄) 등이 자유롭고 풍요롭게 펼쳐진다.

“청나라가 처음 일어났을 때는 한족을 포로로 잡으면 잡는 대로 반드시 머리를 깎았다. 그러나 정축년의 회맹에 따라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리는 깍지 않기로 하였다 ······ ”조선은 본시 예의의 나라라고 불리니, 그들은 머리칼을 아끼는 것을 자신의 목을 아끼는 것보다 더 심하게 한다. 지금 만약 그들의 사정을 무시하고 강제로 깎게 한다면 우리 군대가 철수한 뒤에 반드시 본래의 상태로 되돌릴 것이니 차라리 풍속을 따르도록 해서 예의에 속박시켜 버리는 것만 못할 것이다.“ ······ 저들의 계산을 따져 본다면 다만 우리나라를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아주 문약하게 길들이려는 속셈일 것이다.” 제3권 521쪽 ‘동란섭필’ 중에서

연암은 중국인 친구 황포 유세기로부터 구리로 만든 난초 한 포기를 빌려다 거처에 두었다. 그 방 이름을 임시로 동란재(銅蘭齋)라 하고, 거기에 머무는 동안 쓴 글을 동란섭필(銅蘭涉筆)로 엮었다. 한나라 때 조선 사람 곽리자고가 남긴 공무도하(公無渡河)를 살펴 옮겨 적는가 하면, 건륭황제의 최측근이던 화신의 욕심이 과해 훗날 반드시 응징을 받을 것이라는 예언을 남겼는데 훗날에 적중하여 스스로 혜안임을 증명한다. 변발을 강요하던 시절에 태종 칸이 병자호란 직후의 조선을 방치한 속셈에 대한 날카로운 논평도 지혜로운 지적이 아닐 수 없다.

한가을 북경에서부터 눈발이 날리던 초겨울 한양에 복귀하기까지 후반부의 여정을 생략했음에도 불구하고, 4년간 집필한 분량이 어마어마하다. 당시 백성들에게 널리 읽히며 빠른 속도로 전국에 전파된 것은 그 만큼 다양한 버전의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 제자이자 동학인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이 일부 오류를 바로잡으며 필사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소견을 덧붙이지 않았을 리도 없다. 연암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마다 내용의 차이 때문에 혼란도 불가피했다. 연암 사후에 100년 넘게 금서였던 책이니 만큼 오역 논란도 꾸준히 되풀이될 수밖에 없었다.

북경에서 열하로 떠나는 모험의 주요 장면인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는 ‘하룻밤에 강물을 아홉 번 건너며’로 번역되어 있는데, 일각에서 구도하(九渡河)라는 지명을 이유로 오역의 대표 사례로 지적한다. 시간에 쫓기는 상황에서 그 초인적이고 황당한 묘사가 살짝 의심스럽지만 여러 고증을 통해 오늘날 북경의 식수원인 밀운수고(密云水库)라는 주장이 정설이다. 이 책의 초고본이 2009년에 출간될 때 3년, 2017년 개정신판이 다시 2년을 투자한 역작이라 그러한 1차원적인 오류는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옮긴이의 서문을 보면 학자로서의 고민도 고스란히 읽혀졌다.

“멀리 봉황산을 바라보니 흡사 순전히 돌로 만들어 땅에서 우뚝 뽑아 올린 것 같았다. 손바닥 위에 손가락을 세운 듯, 부용이 반쯤 피어 있는 듯, 하늘 끝에 여름 구름인 듯, 빼어나게 깎아 세운 모양은 이름 짓거나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경관이지만, 다만 맑고 윤택한 맛이 없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나는 언젠가 우리 한양의 도봉산과 삼각산이 금강산보다 낫다고 말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금강산은 골짜기가 모여 있어서 소위 일만이천 봉우리라고 불리어, 기이하고 높고 웅장하고 (중략) 그러나 그윽하고 침침하며 아득하고 컴컴하여 마치 귀신 소굴로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제1권 63쪽 ‘도강록’ 중에서

책문에서 바라본 봉황산 감상평이 인상적이다. 오늘 날 서울 사람들이 북한산국립공원의 아름다움을 과소평가하고 있으며,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금강산에 대한 관점 또한 묘한 공감대로 다가왔다. 청돈대에서 뜬금없이 동해의 ‘총석정 해돋이’를 낭송한 것도 되새기니 적절했다. 연암의 거룩한 미학적 시선은 난하에서 배를 타고 가던 중 옆 사람이 ‘강산이 그림같이 아름답다’고 말할 때에도 빛을 발한다. 강산이 그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림이 강산에서 나왔다는 점을 들어 조근조근 설명하고 사례들을 나열하는 명문장에서 글맛과 글멋이 느껴졌다.

길거리 농부와 시골 훈장에게도 격의 없이 다가가 말을 걸며 청나라를 배웠고, 똥거름 한 더미, 외양간 하나에서도 배울 점이 없나 살펴보던 북학파 선비에게 고국의 사대부들은 언제나 시기와 질투를 감추고 품위 없다, 상스럽다로 공격했다. 한반도 위기시마다 북한과의 전쟁을 불사하는 타락한 수구 정치세력들의 입처럼, 말로만 북벌을 논했던 못난 사람들이 지배하던 조선의 한계였다. 귀국 후에 자신만으로 지식으로 남겨둘 수 없어 꼼꼼하게 기록하고 널리 전파하고 싶었지만 오랫동안 금서일 수밖에 없었던 연암의 안타까운 꿈들이 아쉽다.

천하에 정말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에게는 여한이 없을 것이라며 유리창 서점거리에서 고뇌하던 북경의 연암을 생각한다. 한때는 우울증으로 고생했던 천재의 시대를 앞선 비운의 철학이 1,688쪽의 정성만으로 온전히 전해질 리는 없다. 위기의 시민으로서 그저 역사적 자부심으로 연암을 읽었다. 당파싸움의 최전선에 나가지 않고 혁명에 앞장서지도 않았다는 이유로 연암을 비판하는 강경한 진보세력의 틈바구니에서 나는 언제까지 연암을 숭배하는 어용 독자로 행복할 수 있을까? 저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한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사교적인 생활인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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