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대 소식을 접한 지 불과 며칠만에 서울의 낮기온도 제법 내려갔다. 외출 전에 날씨를 확인하지 못한 까닭에 찬바람에 온 몸이 식었다. 다행히 점심 약속이라 '콩나물 국밥’으로 찬 몸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날씨 영향도 큰 듯, 국밥집은 '뜨거운’ 국밥을 찾는 손님들로 붐볐다. 속을 따뜻하게 든든히 채우고 나니, 얼마 동안은 추위 앞에 쪼그라들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한 끼를 대충 '때울’ 수도 있고, 재대로 '섭취할' 수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닌 경우도 있다. 영양학적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심리적 만족을 위해 먹는 음식들 말이다. 솔 푸드(Soul food)라고 하면 적당할까? 가끔 일체 음식과 물조차 거부하고 공기 호흡만으로 사는 호흡식가(Breatharian)들이 부럽기도 하지만, 경이로운 그들의 삶보다 '솔 푸드’와 함께 하는 보통의 내 삶에 지극히 만족한다.

솔 푸드는 미국의 남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전통 음식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우리가 보통적으로 아는 의미로 사용했다. 즉, 지친 영혼을 달래는 주는, 그리운 음식, 치유의 음식 말이다. 호주에서는 컴포트 푸드(comfort food)라고 한다. 한 호주 친구는 엉뚱하게도 '캔디’를 '컴포트 푸드’라고 하는데, 알고 보니 아무 캔디가 아니고 어릴 적 추억과 관련돼 있는 특정 브랜드의 특정 제품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도 서너 가지의 컴포트 푸드, 솔 푸드가 있다. 어떤 것은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부터, 또 어떤 것은 우연하게 마음에 딱 들어앉아 버렸다. 우뭇가사리 콩국과 장어국, 우거지된장국이 그것인데, 올드한 입맛이라며 옆에서 아무리 핀잔을 줘도 투박하지만, 향수 진한 이 음식들이 참 좋다.

경상도에서는 우뭇가사리묵을 얇게 채 썰어, 콩국에 말아 먹는다. 마치 수정과나 식혜처럼 음료의 개념으로, 더위에 지치는 여름에 길거리 음식으로도 즐겨 마신다. 콩국의 시원함과 고소함이 매끈한 우뭇가사리묵과 함께 목젖을 타고 몸으로 쭉 빨려 들어가면, 모든 것이 정화되는 느낌이 든다.

장어국은 전라도의 추어탕과 달리 붉지 않고 맑은 국이다. 그 위에 얹어 내는 방아잎이 한 수다. 장어국이 솔 푸드가 된 데에는 순전히 방아잎 때문이다. 비위가 약한 내게 딱 맞는 허브였다. 독특한 향이 고수처럼 거북하지 않았으며, 잦은 소화 불량도 방아잎을 먹으면 해결되곤 했다. 장어국을 만드는 과정은 아름답기는커녕 끔찍하다. 살아있는 장어를 참기름 두른 뜨거운 솥에 그대로 넣어 조리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알기에 몸 속 에너지가 제로인 상태가 되면 '약선’으로 생각이 난다. 상경한 이후 2번밖에 먹지 못했으나 마음 속에 여전히 솔 푸드로 남았다. 호주에서 타이 바질(Thai basil)을 얹은 쌀국수를 먹던 날을 잊을 수 없다. 방아잎과 맛과 향이 비슷해 호주의 향과 맛에 지친 내 몸을 위로할 수 있었다.

이들 솔 푸드를 통해 느끼는 감정은 각각 다르다. 우뭇가사리콩국은 '정화', 방아잎 얹은 장어국은 '모정', 우거지된장국은 '안심’이라는 서로 다른 코드를 담고 있다. 그것들이 내게 주는 의미가 그렇다. 이 세 가지가 심신과 연결된 모든 감정들을 아우르진 못해도 범용적으로는 그러한 대표적인 코드를 통해 온전히 먹고 쉬는 시간을 쉴 수 있었다. 매끈한 우뭇가사리가 콩국과 함께 목으로 부드럽게 넘어가는 그 순간에 집중했고, 방아잎이 입에서 콧구멍까지 그 향기가 전해지는 순간에 집중했고, 우거지를 천천히 씹어서 구수한 된장국과 넘기는 순간에 집중하니 생각을 잊고, 감정을 잊었다.

소울(疏鬱)하다는 답답한 마음을 풀어헤치는 것이다. 누군가는 캔디의 달콤함이 혓바닥에 닿으면서, 또 누군가는 쌉싸름한 차 한 잔을 넘기자 마자 엉키거나 복잡한 마음을 잠시나마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뒤로 잠시 물러서서 나를 보게 된다. 먹거나 마시면서 약간 물러서는 시간, 여유를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솔 푸드, 컴포트 푸드이고 소울하는 것이다.

장윤정 eyjangnz@gmail.com 컴퓨터 전문지, 인터넷 신문, 인터넷 방송 분야에서 기자로, 기획자로 10여년 간 일했다. 출판 기획 및 교정을 틈틈히 하면서 글을 쓰고 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살면서 본 애보리진과 마오리족의 예술, 건강한 사회와 행복한 개인을 위한 명상과 실수행에 관심이 많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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