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 드립 커피를 머그에 내렸다. 머그가 적당히 깊고, 드립퍼와 입구가 잘 맞는지, 커피 방울이 도르르 떨어지는 소리가 맑고 청량하다. 1잔의 커피를 내리는 짧은 순간에 마치 타임 워프(time warp) 하듯 옛 기와집 대청 마루에 앉은 10살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마루 끝에 걸터 앉아 여름 소낙비를 만났다. 바닥을 치고 튕겨 들어오는 빗방울에 발등이 젖기 시작해도 비를 피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며 앉았다. ’시간’이라는 흐름이 완전히 멈춘 순간.

커피 방울의 연주가 끝날 때가 되었는지, 이내 커피향이 코끝에 부딪힌다. 잦아든 소낙비는 처마 끝에 알알이 맺혀 떨어지는 물방울이 되어 청아한 소리를 '순간’으로 남기며 소멸한다. 커피 방울은 '향’으로, 소낙비는 고요한 '시간' 속에 갇혀 침묵을 일깨우는 '죽비’로 남았다.

이런 소리 자극을 통해 잠깐이지만 시간이 멈춰지는 경험을 했으며, 곧이어 마음이 절로 편안해졌다. 특히 예상치 못한 소리를 통해 추억이 되살아나 짧은 시간 동안 어떠한 상념 없이 오롯이 쉴 수 있었다. '쉼’이란 '이런 거지' 하면서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무의식중에 휴대폰으로 오늘의 뉴스를 살펴보았다. 심란해지기 시작한다. 잠시 동안 맛본 고요한 순간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과거의 평화로운 순간으로 한번 회귀하고 보니, 의식하지 않은 채 벌어지는 일들이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원인이 됨을 알아차리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유익하지 않으나 오래돼 무의식중에 하게 되는 습관으로 인해 잠시의 평안을 깨고 보니, 좀더 세세하게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 볼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 마음이 산란해지는 요소들을 무의적으로 습관적으로 얼마나 어떻게 자주 하고 있는지 파악한다면, 잃어버렸던, 그리고 잊고 있던 행복으로 채워진 시간들을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휴대폰은 행복한 시간들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는 부적절한 도구였다. 커피를 내리는 시간과 커피 향, 그리고 빗방울 소리는 그 반대로 적절한 '쉼’을 통해 짧은 행복을 맛본 순간이었다. 누구에게나 스스로를 행복으로 이끄는 수단과 시간, 경우가 있을 것이다. 나에게 '바다’는 그런 의미에서 특별하다.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 보는 것만으로도, 거칠거나 부드럽게 파도가 치면서 들려주는 순간의 파도 소리를 눈을 감고 찰나 찰나 듣다 보면, 온전히 그 시간에만 집중할 수 있어 좋다. 그래서 매일 바다를 동경하며 노래를 부른다.
며칠 전 강릉에서 저 먼 수평선을 바라 보았을 때, 비가 오는 궂은 날씨였지만, 그런 외부적인 경계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온전히 내려 놓고 있는 내 자신이 보였다. 이것은 단순히 '행복’하다는 것과는 의미가 다른데, 기쁘나 넘치게 기쁘지 않고, 행복하나 기분이 들뜨지 않으며, 계속해서 내면으로 내면으로 내 의식이 머무르고자 하는 상태이다.

이렇게 '바다’를 봄으로써 몸과 마음이 원하는 것을 동시에 해결해 놓고 나니, 탐닉하던 것들로부터 조금 경계하는 마음이 생겼다. 손에서 떠나질 않는 휴대폰, 탄수화물에 대한 강한 욕구, 앉고 눕고 싶은 마음, 한 가지 생각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시간, 이러한 것들에 대해 알아차리면서 '경고’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가 내심 재미있기도 하다.

커피를 한 잔 내렸을 뿐인데, 예상치 않은 신선한 '경험’을 했다. 내일 다시 커피를 내린다고 해서 '오늘의 경험’이 되살아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내일은 오늘과 완전히 다른 날이라 내일의 경험은 내일이 되면 알게 될 것이다.

장윤정 eyjangnz@gmail.com 컴퓨터 전문지, 인터넷 신문, 인터넷 방송 분야에서 기자로, 기획자로 10여년 간 일했다. 출판 기획 및 교정을 틈틈히 하면서 글을 쓰고 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살면서 본 애보리진과 마오리족의 예술, 건강한 사회와 행복한 개인을 위한 명상과 실수행에 관심이 많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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