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미국에 돌아온 지 3년이 되었다. 29년 만에 미국에 돌아왔을 때 만감이 교차했다. 물론 여름 방학 때마다 미국을 방문하고 뉴스도 꾸준히 봤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투표했고 매년 세금 보고서를 국세청에 보냈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은 점점 멀어지는 모국이 되었다.

그래서 지난 3년 동안 멀어졌던 모국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특성인 여러 문화사이의 차이에 익숙해졌다. 그 중에 가장 신기한 것은 거리를 걷다가 행인과 눈이 마주치면 ‘하이’로 인사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자연스러워졌다. 인내심을 갖고 노력하면 어디에서든지 일상생활에서 문화적 차이를 쉽게 극복할 수 있다.

그런데 여전히 낯선 것이 있다면 미국 정치이다. 필자가 미국에서 중앙정부 뿐만 아니라 주와 지역 정치에 참여한 것은 1980년 전반이었다. 당시 대통령은 로널드 레이건이었고 소련과 긴장이 팽팽했던 냉전시기였다. 그때도 민주당과 공화당이 있었지만 양당 안에 있는 극단 세력은 약했고 중간 세력이 힘이 있었다. 주 쟁점은 경제와 외교였는데, 그 중에 경제가 가장 중요했다. 경제와 외교가 동시에 약하면 집권당은 크게 패했지만 둘 다 좋으면 크게 이겼다. 1980년에 경제가 어려운 상황이었고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 발생해 지미 카터 대통령은 선거에 크게 패했다. 반대로 1984년 경제가 회복되고 미국이 소련에게 단호하게 대응하자 레이건 대통령이 압승으로 재선됐다.

주와 지역 정치의 이슈가 달랐지만 소수의 지역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주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이 번갈아가며 집권당을 차지했다. 집권당 세력의 변화와 경쟁을 통해서 다수가 만족한 정치가 가능했다. 그러한 정치가 타협의 정치였는데 다수가 만족할 만한 정치를 찾는 것은 당시 만해도 미덕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역에는 부패가 덜하고 정부의 기능이 더 효율적으로 작동했다.

그런데 미국을 떠나 살았던 29년 사이에 타협의 정치가 미덕이라는 생각이 거의 사라졌다. 올 2월 7일 이 신문에 실었던 칼럼(http://www.nextdaily.co.kr/news/article.html?id=20170206800058)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의 지지 기반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실 지지기반이 변해서 타협의 정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새로 형성된 지지 기반으로 한 당이 압도적 힘을 갖지 않은 한 예전처럼 타협은 할 수 있다.

오랫동안 미덕이었던 타협의 정치가 사라진 이유를 생각해보면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미국 언론은 잘 지적하지 않지만 가장 큰 이유는 20세기 중반에 미국은 내부적으로는 위기였고 외부에는 적이 많았다. 1929년에 시작했던 대공황으로 경제적 불안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경제 개혁을 주도하면서 안전망을 구축했다. 1941년에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고, 1945년에 종전하자 소련과 냉전이 시작됐다. 이후에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고 세계 ‘경찰국’ 역할을 했다.

외부적으로 계속된 전쟁과 냉전의 긴장 때문에 내부적으로 전후에 중산층을 확대하는 경제 정책과 1960년대에 흑인 인권 개혁이 가능했다. 동시에 미국은 고속도로 건설과 같은 인프라, 대학 교육과 기술과학 분야에 투자를 많이 했다. 외부의 적에 강해지려면 다수가 만족한 정책과 나라의 후진 부분을 개혁하기 위해 타협의 정치가 잘 작동했다.

그런데 1960년 말에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운동과 그 후에 패전 때문에 외부의 적에 대한 공감대가 약해져 내부에서 갈등이 고조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을 외부의 적으로 세워 강한 미국 건설이라는 명목아래 갈등을 어느 정도 덮었지만 1991년 소련 붕괴로 외부의 적이 없어지자 1990년대에 내부적인 문제가 다시 표면에 드러났다.

큰 적이 없는 새로운 상황은 1990년대에 디지털 혁명과 글로벌 경제의 등장과 함께 하면서 레이건 대통령 시대에 덮였던 갈등이 표면에 나타났다. 이 갈등의 핵심은 변화에 대한 의견 차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강한 보수주의자로 변화보다 옛날로의 회귀를 원했기에 보수적인 기독교 세력은 그를 열심히 지지했다. 반면에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으로 세를 확장했던 진보주의자는 변화를 더욱 원해서 보수 세력과의 갈등은 1990년대부터 계속 악화했다.

이것은 예전에 민주당과 공화당이 정부의 사회적 개입에 대한 논쟁과 다른 것이다. 예전엔 세금을 부과해 정부 차원에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을 펼칠 것인지 아니면 사회의 자발적인 해결을 기대하고 세금을 줄일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었다. 즉, 큰 정부와 작은 정부에 대한 논쟁이었다. 이것이 필자가 기억했던 미국 정치이다.

그렇다면 타협의 정치를 회복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쉬운 방법은 다시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이지만, 9·11 테러 이후 그렇게 하려고 했지만 전쟁의 상대와 목표가 분명하지 않아 냉전처럼 영향력이 없다.

다른 방법이 있다. 보수와 진보도 아닌 온건파가 많고 온건 보수와 온건 진보를 합하면 온건파는 강한 보수와 강한 진보보다 훨씬 많다. 그리고 이 넓은 중간 지대에 있는 세력은 시대의 변화에 따른 합리적 정책을 원한다.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책임감이 있는 인도적 정부를 원한다.

이 커다란 온건파들이 이 시대의 ‘침묵하는 다수’이며 선거를 통해서 극단적 정치가들을 정당을 가리지 않고 현직 대통령을 포함해 낙선시켜야 한다. 이런 점에서 현재 한국에서 부자 증세와 복지의 확대에 대한 논의가 더 의미있는 정치라고 여겨진다. 미국이 안고 있는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책과 국익 중심으로 정치적 논의가 많이 이뤄졌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 소망이다.

로버트 파우저 robertjfouser@gmail.com 전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 미시간대에서 일어일문학 학사 및 응용언어학 석사, 아일랜드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에서 응용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와 일본 교토대에서 영어와 영어교육을 가르쳤고, 일본 가고시마대에서 교양 한국어 과정을 개설해 가르쳤다. 한국 사회를 고찰하면서 한국어로 ‘미래 시민의 조건’, ‘서촌 홀릭’을 출간했다. 취미는 한옥과 오래된 동네 답사, 사진촬영으로 2012년 종로구 체부동에 ‘어락당(語樂堂, 말을 즐기는 집)’이라는 한옥을 짓기도 했으며, 2016년 교토에서 열린 ‘KG+’ 국제 사진전시회에 사진을 출품했다. 현재 미국에서 독립 학자로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어로 ‘외국어 문화사’를 집필 중이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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