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또 시작이다. 어김 없이 오후 4시만 되면, 그녀는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그 초롱초롱하면서 애처로운 눈망울로 뚫어지게 나를 쳐다본다. 조금이라도 피하는 낌새를 알아차리면, 그 즉시 다가와 가늘지만, 짧고, 영향력 있는 목소리로 항변한다. 이것도 안 먹히면, 쉬는 틈을 주지 않고, 다리 사이를 부비며 걷기 시작한다. 한번 시작하면 포기하는 법이 없다.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그녀는 지칠 줄을 모른다. 안타깝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방으로 들어가서 그녀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다. 그대로 두면, 내 바지는 온통 캡틴의 흔적으로 가득해진다. 그녀의 디너 타임! 보호자가 없으니 나는 그녀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그녀의 이름은 캡틴(Captain)이다. 이 집의 보스이자 올해로 17살쯤 된 암컷 고양이. 함께 산 지 오래라 정확한 나이를 그녀의 보호자가 모른다. 언제는 17살이라 했다가 또 언제는 18살이라고 하니 말이다. 인간 나이로 치면, 대략 아흔 살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호주 캔버라를 다시 찾으면서 의문이 들었다. 과연 이곳의 반려동물들이 나를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8개월만의 재회에 고맙게도 그들은 단숨에 나를 알아봤다. 그리고 습관처럼 8개월 전과 똑같이 대한다. 마치 내가 하루만 집을 비운 것처럼.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단 한 녀석만이 부산을 떨며 열심히 경계한다. 올해 들어온 새 식구 원지(Wongi). 천방지축 날뛰는 이 아이까지도 캡틴은 조무래기 취급하며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다. 무시하는 건지, 관심이 없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캡틴은 다른 녀석들이 무엇을 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녀를 건드리는 경우도 거의 없다.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먹고 자는 것뿐이라도 여전히 그녀의 펀치는 날카롭고, 그녀의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내가 이 집의 보스’라는 위엄이 있다.

지금까지 보호자 외에 아무한테도 관심을 갖지 않던 캡틴이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처음부터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내가 있는 방으로 따라들어 오거나 심지어는 방문 앞에서 기다리기까지 한다. 결코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던 반응이라 그녀의 보호자도 어떨떨해 하며 '별일’이라고 신기해했다. 한번은 녀석이 내 침대에서 버젓이 잠을 자고 있지 않던가! 나는 허락하지 않았는데, 캡틴은 여기 저기 '나는 보스’라고 흔적을 남기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 이유가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캡팁은 언제나 내가 부르면 쳐다봤고, 내 주위를 곧잘 맴돈다. 그녀는 나를 친구로 여기고 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어떤 동물에게도 친구가 되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다시 호주 캔버라를 찾으면서 한국에서 그리워하던 라니(Rani)보다는 어쩌면 캡틴이 처음부터 내 친구였을 꺼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둘만 집에 남으면, 그녀는 언제나 내 뒤를 마치 강아지처럼 쫓아다닌다. 한번은 방문 긁는 소리가 나길래 나가보니 캡틴이었다. 궁금증이 발동해서 문을 다시 닫고 가만히 있어보니 다시 한번 더 방문을 긁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녀의 호의를 놓치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나가서 조용히 그녀 곁에 있어 주었다. 식사 시간도 아니고 그녀가 좋아하는 히터를 켤 만큼 추운 때도 아니었는데, 캡틴은 그저 내 곁에 있고 싶어 한다.

캡틴은 처음부터 보스였고, 지금도 이 집의 보스다. 그녀는 정확히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으며, 그대로 행동한다. 즉, 이 작은 집에서 다른 반려동물 중에서 보스였을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자기 스스로가 보스임을 확신하고 그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특히 식사 시간과 한 겨울 히터를 켜는 일만큼은 귀찮을 정도로 요구하며 물러서지 않는다. 의도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잠시 포기하고,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자세로 등을 돌려 앉아 자신의 언짢은 감정을 드러낸다. 그러나 대놓고 화를 낸다든지, 엉뚱한 행동을 한다든지 하지 않고 다시 돌아와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끊임없이 시도를 한다. 충분히 감정을 드러내고, 여유롭게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시간을 들여 불쾌함을 드러내었고, 충분히 다스렸기 때문에 다시 시도하는 데 있어 어떠한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또 원하는 바를 위해 요구를 한다. 즉, 다시 시작한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자신의 과거 불쾌함 따위는 안중에 없는 것이다.

보호자와의 유대 관계가 깊은 탓이겠지만, 캡틴은 가끔 귀찮게 구는 개들에게 먼저 성내거나 펀치를 휘두르는 법이 없다. 단 한 번도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을 본 적도 없다. 마치 무소의 뿔처럼 누구도 흔들 수 없는 단단한 심지가 그녀의 마음에 자리 잡은 듯 보인다. 하는 일이라고는 자고 먹고 하는 기초적인 생리에 의한 행동 뿐으로 여겨지지만, 그 와중에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보스의 자리를 꿰차고 있으며 돌아가는 집안 사정을 누구보다 훤히 꿰뚫고 있다.

캡틴은 대단히 독립적이지만 적당히 호의를 베풀 줄 안다. 단,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다. 자신의 영역에 속한 대상에 한해서다. 보고 관찰 수 있는 대상이 캡틴이 유일하기 때문에 다른 고양의 습성이 그런지는 전혀 모르겠다. 독립적이지만 사교성도 갖춘 캡틴을 보면서, 적당함의 경계에 대해 생각이 오래도록 머문다. 식사마저도 사실 때가 없다. 신선한 식사 제공 시간은 오후 4시이지만, 그것을 하루 종일 나눠 먹는다. 폭식하는 법이 없다. 개들은 자기 밥그릇을 불과 몇 초만에 비우느라 바쁘지만, 캡틴은 적당히 먹고, 적당히 자고, 또 적당히 먹고, 적당히 쉬는 '적당함’에 최적화된 일상을 유지한다.

이 경우, 적당함은 균형의 또다른 표현이다. 행동과 말, 생각의 적당함은 안과 밖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캡틴처럼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하고 싶은 것을 때맞춰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수많은 조건 속에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캡틴과 같은 진정한 보스는 그러나 내 안의 진정한 울림대로 항상 행동한다. 그래서 캡틴은 언제나 보스이다. 캡틴, 캡틴, 오 마이 캡틴!

장윤정 eyjangnz@gmail.com 컴퓨터 전문지, 인터넷 신문, 인터넷 방송 분야에서 기자로, 기획자로 10여년 간 일했다. 출판 기획 및 교정을 틈틈히 하면서 글을 쓰고 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살면서 본 애보리진과 마오리족의 예술, 건강한 사회와 행복한 개인을 위한 명상과 실수행에 관심이 많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넥스트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