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안중찬의 書三讀] 신영복 ‘담론’ - 당신의 바다를 꿈꾸는 먼 여행

발행일시 : 2017-08-25 00:00
[안중찬의 書三讀] 신영복 ‘담론’ - 당신의 바다를 꿈꾸는 먼 여행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당신의 수업을 청강했던 일은 즐겁고 유익했으나 2014년 가을은 침울했다. 당신은 위태로움을 숨기고 수업을 강행했고, 마지막 잎새를 바라보는 숙연함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청강생 수가 늘었던 것도 진풍경이었고, 알만한 출판사의 편집자도 끝까지 자리를 지킨 평화로운 가을이 무겁게 지나갔다. 겨울이 찾아오고, 어느새 학교의 전통이 된 종강콘서트에서 한 마디 말도 없이 목례만으로 돌아선 당신의 뒷모습은 참으로 슬펐다. 그렇게 당신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몇 주 뒤, 송년회가 있었던 마리스타수녀원에서 당신은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선언했고 눈물의 바다를 보았다. 절망의 눈보라 속에서 해가 바뀌고 겨울의 끝자락에 기적이 찾아왔다. 아직 임상실험 중인 먼 나라의 신약 처방이 당신의 몸에 넓게 퍼진 암 덩어리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비록 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인사동 처마끝에서 밝은 표정의 당신과 재회했을 때 하염없이 목이 잠겼다. 당신은 전보다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만났고, 출판을 앞둔 원고를 회수해 최종 교정도 마쳤다.

[안중찬의 書三讀] 신영복 ‘담론’ - 당신의 바다를 꿈꾸는 먼 여행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세계는 내가 살아가는 터전이고 나 또한 세계 속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란 세계와 나 자신에 대한 공부입니다. 자연, 사회, 역사를 알아야 하고 나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공부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키우는 것입니다. 세계 인식과 자기 성찰이 공부입니다.”
- 18쪽, 1부 1장 ‘가장 먼 여행’ 중



‘담론’은 부제가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로 2014년 2학기에 기획되었다. 정년퇴임 이후 석좌교수로서 진행한 ‘인문학 특강’ 청강생들이 개인적으로 녹취한 오래된 자료가 보태져 구성이 더 탄탄해질 수 있었다. 책이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떠날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 집필된 책이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당신은 새 책을 들고 독자 앞에 설 수 있었다. 위태로운 건강 상태를 무릅쓰고 출판사의 강연 요청에 임하는 당신의 목소리와 눈빛은 80년 전 혼신의 힘으로 매일매일 최선을 다하며 황혼을 불태웠던 루쉰을 닮아 가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매일 40명씩 자살하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으며, 극단적인 스트레스와 불신 속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갑질들, 살충제 달걀 사태나 위해성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가습기 살균제, 부작용 생리대, 믿을 수 없는 먹거리, 묻지마 폭행까지 매일매일 신경이 곤두서 있다. 당신은 맹자 곡속장의 ‘이양역지(以羊易之)’를 사례로 만남과 관계의 소중함을 고민하라 말했다. 관계의 시선으로 사람과 사회현상을 바라보면 무엇인가 해답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당신의 생각을 이해하는 지름길이 ‘관계’ 속에 있음을 깨달았다.

당신은 자기를 중심으로 존재성을 강화해나가는 서양 근대사회의 기본 패러다임을 비판했다. 자본주의와 맥을 같이 하는 그 논리는 1,2차 세계대전과 같은 근대사회 여러 가지 문제의 근본 원인일 수 있다고 말했다.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최고의 사회적 윤리 ‘똘레랑스’ 마저도 타자를 바깥에 세워놓는 수준의 존재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세계가 불변의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오늘날의 양자 물리학이 입증하고 있다며, 세계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은 뉴턴 시대의 세계관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깜짝 놀랐다.

당신은 똘레랑스를 넘어 노마디즘으로 가라고 했다. 진정한 공부는 머리-가슴-발로 이어지는 먼 여행인데, 가슴에서 멈추면 낡은 생각을 깨뜨리고 탈문맥으로 향하는 애정과 공감의 수준에 머물 뿐이라고 했다. 인식과 성찰로 끝나지 않고 실천과 변화로 연결시키려면 다시 가슴에서 발까지 먼 여행을 떠나라고 했다. 세계를 변화시키고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이 진정한 공부라고 했다. 자기 변화는 최종적으로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바뀜으로써 완성된다고 했다.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자기변화의 길을 찾아가라던 당신의 미소를 생각한다.

[안중찬의 書三讀] 신영복 ‘담론’ - 당신의 바다를 꿈꾸는 먼 여행

“도시는 자본주의가 만들었습니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존재 형태가 도시입니다. 그리고 그 본질은 상품교환 관계입니다.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가 상품교환이라는 형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입니다. 얼굴 없는 인간관계, 만남이 없는 인간관계란 사실 관계없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유해 식품이 만들어질 수 있는 구조입니다. 우리 시대의 삶은 서로 만나서 선線이 되지 못하고 있는 외딴 점點입니다. 더구나 장場을 이루지 못함은 물론입니다.”
- 109쪽, 1부 7장 ‘점은 선이 되지 못하고’ 중



당신은 상품과 자본이라는 두 가지 관점으로 근대사회를 바라보며 성찰했다. 증식이 본질인 자본의 속성 때문에 모든 것이 증식되고 성장하며, 불필요하고 과다한 소유가 끝을 모르는 이런 사회의 미래가 어떻게 지속 가능한지 의문을 제기했다. 당신은 수업이 끝나는 마지막 5분 동안 그날의 강의 핵심을 적어보라 했다. 그것을 맹자에서는 설약(說約)이라고 하는데, 복잡한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시적인 틀에 담을 수 있는 지식이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된다고 했다. 몇 개의 단락으로 당신의 방대한 담론을 설약하고 싶다.

전체는 모두 1부 11장과 2부 14장 총 25장으로 구성되었는데, 반드시 순차적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1부 ‘고전에서 읽는 세계 인식’은 고전을 통해 인간이 중심이 되고 자기성찰을 하는 시간을 갖게 만든다. 1장 ‘가장 먼 여행’에서는 사람과 삶을 통한 세계 인식과 골턴의 소를 통한 함께의 가치, 서삼독의 중요성, 창조 공간으로서의 변방 등을 이야기 한다. 2장 ‘사실과 진실’에서는 이름 붙지 않았던 베토벤 심포니 5번과 처음부터 ‘비창’이라 이름 붙였던 차이콥스키 심포니 6번의 대비, 감옥에서 허세 부리던 노인의 뒷모습, 시(詩)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3장 ‘방랑하는 예술가’에서는 초사를 통해 남방 문학의 낭만과 변방의 창조성을 이야기 했다. 이후로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들을 통한 관계론의 정수가 펼쳐지는데, 4장 ‘손때 묻은 그릇’에서는 주역을, 5장 ‘똘레랑스에서 노마디즘으로’와 6장 ‘군자는 본래 궁한 법이라네’에서는 논어를, 7장 ‘점은 선이 되지 못하고’에서는 맹자를, 8장 ‘잠들지 않는 강물’에서는 노자를, 9장 ‘양복과 재봉틀’에서는 장자를, 10장 ‘이웃을 내 몸같이’에서는 묵자를 통한 겸애와 반전 평화론을, 11장 ‘어제의 토끼를 기다리며’에서는 한비자를 통해 세계 인식의 담론을 이야기했다.

[안중찬의 書三讀] 신영복 ‘담론’ - 당신의 바다를 꿈꾸는 먼 여행

“득위의 비결을 소개하겠습니다. '70%의 자리'가 득위의 비결입니다. '70%의 자리에 가라!" 자기 능력이 100이면 70의 역량을 요구하는 곳에 가는 게 득위입니다. 반대로 70의 능력자가 100의 역량을 요구하는 자리에 가면 실위가 됩니다. 그 경우 부족한 30을 함량 미달로 채우거나 권위로 채우거나 거짓으로 채울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맡은 소임도 실패합니다. '30%의 여유',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여유가 창조성으로, 예술성으로 나타납니다.”
- 63쪽, 1부 4장 ‘손때 묻은 그릇’ 중



2부 ‘인간 이해와 자기 성찰’은 그 동안 이야기하지 못한 감옥에서의 만남과 관계론의 형성 과정이 깊이 있게 펼쳐진다. 12장 ‘푸른 보리밭’은 청구회 추억의 배경과 사형수로서 당신이 겪은 임상 체험에 관한 소름 돋는 이야기다. 13장 ‘사일이와 공일이’는 실천 없는 독서의 인격체로 감옥에서 자신만 몰랐던 왕따의 5년을 고백한다. 노인 목수 문도둑의 주춧돌 이야기나 똘레랑스의 한계, 기천불종합신자를 통한 자기개조 과정이 있다. 14장 ‘비극미’에는 심청이란 이름의 꽁초가, 15장 ‘위악과 위선’에서는 못난 사람들의 문신 속 깨달음이 범죄 사회의 모순을 이야기한다.

16장 ‘관계와 인식’에서는 가진자의 입장에서 계급을 뛰어 넘은 혁명가였던 프란츠 파농, 체 게바라, 저우언라이, 마오쩌둥을 이야기하고, 17장에서는 ‘함께 맞는 비’와 하방연대, 18장 ‘증오의 대상’에서는 여름징역살이의 아픔, 19장 ‘글씨와 사람’에서는 붓글씨의 스승인 정향 선생님과의 만남 등 쇠귀체의 형성과정을, 20장 ‘우엘바와 바라나시’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인 철학으로 승화된 ‘춘풍추상’과 발상의 전환으로 미화된 콜롬부스 달걀의 잔혹함을, 21장 ‘상품과 자본’에서는 아름다움과 모름다움이라는 가치를 다룬다.

22장 ‘피라미드의 해체’에서는 일해:만해, 압구정:반구정의 대비가 있고, 23장 ‘떨리는 지남철’에서는 위당 정인보의 사사를 받아 조선 양명학 강화학파의 맥을 잇던 서여 민영규 선생의 글을 통해 지식인의 자세가 날카롭게 제시된다. 24장 ‘사람의 얼굴’에는 추체험, 양동 창녀촌의 교훈이 있고, 마지막 25장 ‘희망의 언어 석과불식’에는 자기의 이유를 찾아가라는 자유의 메시지를 비롯해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라는 마지막 인사로 마치 준비된 작별 인사처럼 애틋하게 마무리된다.

[안중찬의 書三讀] 신영복 ‘담론’ - 당신의 바다를 꿈꾸는 먼 여행

“사람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그 사회를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 일입니다. 사람은 다른 가치의 하위 개념이 아닙니다. 사람이 '끝'입니다. 절망과 역경을 '사람'을 키워 내는 것으로 극복하는 것, 이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입니다. 최고의 인문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욕망과 소유의 거품, 성장에 대한 환상을 청산하고, 우리의 삶을 그 근본에서 지탱하는 정치·경제·문화의 뼈대를 튼튼히 하고, 사람을 키우는 일 이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이고 희망의 언어입니다.”
- 423쪽, 2부 25장 ‘희망의 언어 석과불식’ 중



신영복의 ‘담론’은 독자에게 마치 “당신은 자유인인가?”를 묻고 있는 책이다. 과연 나는 자유인인가? 자존감이 화두인 이 시대에 과연 내가 나 자신의 자유를 지킬 수 있을까? 당당한 자존감, 긍정적인 자신감을 잃고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선택된 노예의 길을 가는 것이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를 찾는 과정에서 발현되는 것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함정일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신영복의 ‘담론’은 철저하게 나를 찾아가는 여행의 책이다. 나를 상품화시키지 말고, 부단한 노력으로 사회화·개인화로부터 지켜내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사회와의 관계를 잘 만들어가라는 시대의 지침서다. 엄청난 대상 앞에 자기를 복속시키지 않고 스스로를 어떻게 주체화할 것이며 관계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한다. 특정한 스승을 찾아 가르침을 받고 일방적으로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끊임없이 고민하고, 방황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먼 여행의 길라잡이다.

신영복의 ‘담론’은 이 시대에 어른이 없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는 책이다. 적대적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현실에서는 사표가 용납되지가 않는다며 당대의 한계를 변호했다. 한 시대가 지나가면 보다 객관적인 역사적 평가가 가능하고 그것이 옳았다는 것을 나중에야 이해한다는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 다산 정약용도 당시엔 죄인이었고, 가까운 예로 노무현이 있다. 그만큼 우리가 그 시대를 뛰어넘는 게 어렵다. 지금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사표들은 지나간 시대에 대한 자부심이고 위로다. 저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한다.

2년 전, 당신의 일흔다섯 번째 생신에 오드리 헵번 사진집 ‘Beauty beyond beauty'와 함께 초판본 ‘담론’을 선물했다. “내 책을 왜 내게 선물하느냐?”고 황당해 하던 당신은 책을 펼치며 몹시 기뻐했다. 출간 후 100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두 권의 ‘담론’을 가방 속에 넣고 다니며, 140여 명 독자의 서명을 받아뒀던 것이다. 한 권이라도 혹시나 젖을까 찢어질까 조심하며 앞쪽 면지에 조심스럽게 두 번씩 서명을 부탁했던 까다로운 추억의 기쁨이다. 나머지 한 권은 나의 서가에 머물며 더 많은 서명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언젠가 당신은 비구름에 휩싸인 운두령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오대산에 비가 내리면 무수한 빗방울이 계곡물을 이룹니다. 북쪽의 계곡물은 내린천으로 흘러 냇물이 됩니다. 냇물은 다시 소양강·북한강으로 흐르고, 두물머리에서 남한강과 만나 더 큰 강물이 되어 서울을 관통합니다. 한강물은 교하에서 임진강과 어울려 함께 바다로 갑니다. 바다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모든 물을 다 받아줍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 내 인생은 어디쯤 흘러가고 있을까? 더 맑고 좋은 물이 되어 천천히 당신의 바다로 찾아가고 싶은데······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사교적인 생활인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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