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적인 삶을 위해 열정을 양보하지 않았나요? 잊지 마세요. 당신은 원래 가슴 뛰는 사람이었음을···” 출근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CF 내레이션이 에디뜨 피아프의 샹송 ‘후회하지 않아(Non, je ne regretted rien)’와 함께 심금을 울렸다. 방향을 잃고 고심에 빠진 날 들려오는 묘한 자극에 귓불이 떨렸다. 이럴 때는 앞뒤 따지지 않고 밀양에 계신 선생님을 찾아뵙고 싶어진다. 고향 선영에 말없이 누워계신 선생님 만날 생각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열네 살 강진 소년 황상은 유배 온 다산 정약용을 스승으로 모신 후, 평생 농사꾼으로 살면서도 다수의 문집과 시를 남겼다. 서른한 살 에커만은 일흔네 살의 괴테를 찾아가 십 년 동안 그 위대한 목소리를 생생한 기록으로 남겼다. 열아홉 까미유 끌로델은 마흔세 살 로댕의 연인이자 제자로서 새로운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여섯 살 헬렌 켈러는 스무 살 앤 설리번을 만나 장애를 극복하고 반전과 인권, 여성 사회운동가로 역사에 이름을 새겼다. 스무 살 박지성은 벽안의 히딩크를 통해 세계적인 축구선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 당신의 스승은 누구인가?

스승을 찾지 못한 사람에게 발전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발전이란 대부분 영향력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일가를 이룬 뒤에 제자가 없는 사람 또한 안타까운 존재일 뿐이다. 관계가 두절된 상태에서 어떤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으며 그 성과도 그저 한 순간의 영광에 지나지 않는다. 스승과 제자의 만남은 아름다운 것이며, 복 받은 인생은 좋은 사제의 인연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제자가 사랑받는 것도 아니며, 스승을 욕되게 하는 제자도 많다. 이 책은 위대한 스승과 훌륭한 제자의 만남에 관한 자전적 기록이다.

“데카르트의 수학적 분석에 영감을 준 무지개의 특징이 뭐였다고 생각하나?”
“물방울 단 하나를 생각함으로써 무지개가 분석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라고 봅니다.”
“자네는 이 현상의 핵심적인 특징을 놓치고 있군.”
“네? 그럼 그의 이론에 영감을 준 것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의 영감의 원천은 무지개가 아름답다는 생각일세.”
“잊지 말게, 재미있어야 하네.”
- 159쪽, 무지개를 바라보던 파인만과의 대화

1981년, 칼텍에 정착한지 30년째 긴 백발의 바짝 여윈 노인은 잿빛 시멘트 건물 사이를 조용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1918년 뉴욕 태생으로 MIT에서 학부를 끝내고, 스승의 권유로 프린스턴 대학원에 진학하여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로스앨러모스와 코넬대에서 경력을 쌓았다. 1951년에 이곳 캘리포니아공대(Caltech)로 와서 1965년 양자전기역학 이론을 정립한 공로로 노벨물리학상도 받았다. 첫 번째 아내와 사별했고, 거듭 결혼에 실패한 뒤, 세 번째 아내와 사이에 칼과 미셸이라는 어린 자녀를 둔 그는 리처드 파인만이다.

1980년, 버클리의 한 청년이 원자물리학의 수수께끼 몇 개를 푸는 논문 두 편으로 스타가 되었다. 이듬해 청년의 방법론이 유망하다고 판단한 칼텍이 특별연구원 자리를 제안했다. 올리브나무 가득한 새로운 일터로 찾아온 혈기왕성한 젊은이는 불과 며칠 만에 양쪽 뇌에 관한 연구로 칼텍에 스무 번째 노벨상을 안겨준 로저 스페리에 압도당한다. 그의 연구실 바로 옆방에는 쿼크의 발견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카리스마 넘치는 물리학자 머레이 겔만이 있었고, 복도 끝에는 물리학계의 살아 있는 전설 리처드 파인만이 있었다.

시카고 출신의 젊은이는 본래 화학자가 꿈이었는데, 8년 전에 예루살렘 근처의 한 도서관에서 우연찮게 발견한 파인만의 ‘물리법칙의 특성’을 읽고 설레는 경험을 시작했다. 이후 전공을 물리학으로 바꿔 입자물리학 박사가 되어 칼텍에 입성한 것이다. 칼텍의 교수로 경력을 시작한다는 것은 겉으로는 성공이 보장된 삶이었다. 이미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기대와 위축 속에서 여러 가지 마음속에 정리되지 않은 고민들이 넘쳤고 스스로 잘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레너드 믈로디노프였다.

물리학과의 리더인 겔만은 독특한 발음이나 경직된 태도가 늘 불편했다. 겔만의 비호 하에서 흔들림 없이 끈이론을 파고드는 우직한 존 슈워츠, 10년 뒤, 물리학계의 일인자로 부상한 에드워드 위튼, 분자생물학의 창시자인 막스 델브뤼크, 컴퓨터 연산의 천재 콘스탄틴 등 흥미로운 만남이 가득했다. 토론으로 먹고 사는 물리학자들의 생활을 지켜보며 그들의 이화수분(異花受粉)에 감동하지만 한 편 끊임없이 자신의 길을 고민한다. 시청 청소부 레이와 어울려 대마초를 태우며 일상의 권태와 양심의 가책을 날려버릴 수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허전했다.

파인만의 연구실을 노크한 것은 잘한 결정이었다. 그는 나이 보다 더 늙어보였고 불치병과 싸우는 힘겨운 모습이었지만 눈에서 섬광이 번뜩이는 열정의 과학자였으며, 자신이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활동은 부지런히 피해 다녔다. 그는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명랑하고, 장난스럽고, 짓궂고, 호기심 많고 게다가 항상 재미를 잃지 않고 있었다. 퉁명스럽고 짜증을 잘 부리기도 했으나, 첫 만남 이후 그 자리에서 느꼈던 애정을 평생 잃지 않을 만큼 끌림이 있었다. 파인만에게는 가슴 뛰는 삶이 있었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마음은 설레나니
나 어려서 그러하였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거늘
나 늙어서도 그러하리다.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내 생애의 하루하루를
자연에 대한 경외심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 무지개, 윌리엄 워즈워스

“자네는 어렸을 때 과학을 사랑했나? 그게 자네가 열렬히 좋아하던 것인가?” 거미수집가인 학부생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 엉뚱한 교훈은 우연찮게 드러난 무지개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어진다. 성공적인 과학자로 살아온 원동력이 그의 천재성이나 다른 목표의식에 앞선 가슴 뛰는 삶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들뻘 젊은 연구원에게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를 생각나게 하는 파인만의 실천적인 삶을 통해 젊은이는 본인의 무지개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파인만은 큰 소년이었다. 그 자신은 물론 상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놀라울 정도로 정직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별다른 애정이 없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주말의 캠퍼스에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결혼식장에 찾아가 넉살 좋게 물리학과를 대표해서 뷔페를 즐기는 여유가 있었다. 철창에 갇힌 침팬지가 막대기를 이용해 멀리 떨어진 바나나를 집어 먹는 이야기를 들으며 “원숭이가 발견을 할 수 있다면 자네도 할 수 있다.”는 촌철살인을 들려주는 익살꾼이었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문제를 풀 가능성이 약간 더 높다고 생각해야만 되네. 나도 그 마음속에서 그 이유가 엉터리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아. 그리고 내가 택하는 방법은 다른 사람들도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상관없네. 나는 나 자신을 속여서 나에게 더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지. (중략) 나는 이것이 싸우러나가는 아프리카인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북을 쳐서 사기를 돋우는 거야. 나는 이 문제는 나의 방법으로만 다룰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은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스스로를 설득하네. 다른 사람들이 풀지 못하는 이유는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나는 다른 방법으로 한다는 거야. 나는 나 자신을 그렇게 설득하고, 그래서 의욕을 갖게 되지.” - 88쪽

어떤 문제를 대하는 파인만의 자세는 특별할 것이 없지만 황당무계할 만큼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친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으로 누구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재능이 나에게 있다고 믿는 것, 문제를 바라보는 어떤 특별한 눈이 나에게만 있어서 멍청한 다른 사람들은 이런 놀라운 방식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신념, 항상 스스로를 가장 유리하다고 믿으며, 늘 새로운 방법으로 시도한다는 생각, 그리고 진짜로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는 것. 다른 사람들한테는 기회가 없다는 과장된 생각으로 그렇게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이다.

파인만은 물리학자를 두 종류로 구분하곤 했다. 그에 따르면 질서와 통제를 중시하며 물리학계에서 리더의 역할을 수행하는 머레이 겔만은 그리스인이었다. 그리스인은 수학의 논리적 기제의 힘을 최대로 동원하여 자신이 개발하는 이론의 수학적 아름다움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반면 바빌로니아인은 상상력의 자유를 어느 정도 허용하는 것으로 엄격성이나 정당화를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자신의 본능이나 직관, 직감을 따라가는 존재라고 했다. 파인만은 철학 연구를 경멸했지만 스스로를 바빌로니아인이라 칭하며 물리학자의 세계를 철학적으로 분석했던 것이다.

“나는 자네한테 가르친 게 없는데.” 가르침에 대해 고맙다는 인사를 했을 때 자신이 대체 뭘 가르쳤는지, 모든 감사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한다. 자신은 결코 뭔가를 가르치지 않았고, 혹시 얻은 것이 있다면 그건 스스로 깨우친 것일 뿐이며, 진로에 대해서도 스스로 발견해야 되는 것이라며 단지 지금 하는 일이 가슴 뛰는지 묻는다. 인생은 스스로가 답을 찾아 점수를 매기는 시험 문제인데, 답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는 것이라고 했다. 고환암의 오진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우발적 사건도, 레이와 파인만의 유쾌한 대화도 모두 무지개 속에 녹아나고 있었다.

“내 규칙은 이거야. 불행할 때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라. 하지만 행복할 때는 생각하지 마라. 왜 행복을 망치나? 어쩌면 어떤 우스꽝스러운 이유 때문에 행복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것을 알면 행복을 망칠 뿐이야. 나는 아를린과 함께 있어 행복했네. 우리는 몇 년 동안 아주 행복했지. 그러다 아를린은 결핵으로 죽었네. 나는 결혼할 때 아를린이 결핵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네. 친구들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아를린이 결핵에 걸렸으니까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네. 하지만 나는 의무감 때문에 결혼한 것은 아니야. 아를린을 사랑했기 때문에 결혼했지.” - 209쪽

첫사랑의 이야기는 아무에게나 하는 고백이 아니다. 어느 날 느닷없는 아쉬움이 없느냐는 질문에 눈물을 글썽이며 늦둥이 딸 미셸이 크는 것을 볼 때까지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는 대답도 뭉클하다. 언제나 솔직했던 괴짜 과학자의 초연한 모습과 일상에 묘한 감동이 있다. 결국 물로디노프는 확신에 찬 꼰대들의 잔소리 하나 없이 방향을 가르쳐 준 그에게 감사하며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한다. TV 시리즈 ‘맥가이버’와 ‘스타 트렉’은 물론 스티븐 호킹과 공동으로 집필한 ‘위대한 설계’,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는 가슴 뛰는 새 삶의 성과물이었다.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었던 젊은 과학자는 칼텍에서 시작도 하기 전에 현실과 타협을 하고 있던 자신을 발견하고 갈등했었다. 자신이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 대해, 자신의 삶에 무엇이 의미를 줄 것인가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했다. 꽃길만 걸어온 것 같은 파인만에게 질투가 나기도 했지만 물리학과 비서인 헬렌을 통해 파인만도 가뭄 기간이 길었고, 다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늘 다시 일어섰음도 알게 되었다. 파인만의 애제자도 아니었고, 파인만을 통해 특별히 언급된 적도 없는 그저 스쳐지나간 평범한 제자였지만 그는 파인만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원제가 ‘파인만의 무지개(Feynman's rainbow)’인 이 책을 덮으며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는 논어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의 현실이 잘못 흘러가고 있음을 30년 전 세상을 떠난 파인만이 일깨워주었으니, 스승님을 찾아뵙고 나의 선택에 대해 마지막으로 여쭙고 싶어졌다. 밀양이 연일 최고 기온 기록을 갱신하던 날 신영복 선생님의 산소를 찾았다. 선영의 풀을 고르며 깊은 위로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답은 내가 찾아야 한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사교적인 생활인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넥스트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