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시간을 누비며 바쁘게 살아간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시간들은 매순간 새롭고 경이롭고 때때로 황당하고 어이없고 억울하게 다가온다. 당신의 의미 없는 가벼운 시선이 누군가에게 묵직한 부담으로 꽂힐 수도 있고, 당신의 무거운 마음이 한없이 가벼운 언어가 되어 타인의 귀를 간지럽힐 수도 있다. 수많은 관계 속에서 상대적으로 해석되며 한없는 오해와 이해의 출렁임 속에서 하루하루 죽어가는 당신을 위해 밀란 쿤데라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만 있는 것이며, 한 번만 있는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당신은 매사 매순간, 난생 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치는 모든 사건들을 겪으며 죽어간다. 단 한 번뿐인 까닭에 특정한 시점에서 특정한 사건과 만난 당신에게 왜 그래야 하느냐고 묻는 것도 어리석은 질문이다. 당신의 삶과 국가의 운명, 세계와 우주의 역사는 그 어리석은 질문들과 함께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존재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옳고 그름의 시선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무척 꼰대스럽다. 당신과 나는 가벼움과 무거움이 충돌하고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때로는 에로틱하고, 때로는 숭고한 감동들이 뒤섞인 지적인 언어로 된 감성서를 통해 새롭게 해석되어야한다. 보다 아름답게 소통해야한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과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지는 않는다. 역사도 개인의 삶과 마찬가지다. 체코인들에게 역사는 하나뿐이다. 토마시의 인생처럼 그 역시 두 번째 수정 기회 없이 어느 날 완료될 것이다.” - 357쪽

첫 번째 결혼생활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프라하의 외과의사 토마시가 있다. 그는 사랑과 섹스는 서로 다른 세계라고 주장하며 고정 애인 하나하나를 긴 간격을 두고 만나는 거침없는 존재다. 어느 날 아름다운 보헤미아의 처녀 테레자가 운명적으로 다가와 그의 10년 지론을 흔든다. 테레자보다 열 살 많은 사비나는 토마시를 너그럽게 이해하는 에로틱한 우정의 산증인으로 자신을 에워싼 정치 사회적 속박을 거부하는 화가다. 사비나의 애인 프란츠는 빈 출신 어머니와 프랑스 출신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유럽의 화신으로 매사 진지한 과학자이다.

마치 송진으로 방수된 바구니에 담겨 강물에 버려진 아기처럼 다가온 테레자. 테레자의 고통을 잠재우기 위해 그녀와 결혼한 토마시는 강아지 한 마리를 선물하며 그녀가 처음 찾아왔을 때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 착안해 ‘카레닌’이라 이름 붙인다. 우연한 열차 사고로 남녀가 만나고, 달리는 열차에 몸을 던지는 여인의 최후로 끝나는 완벽한 대비 구조의 그 소설은 신분상승을 꿈꾸며 프라하로 입성한 테레자에게 가짜신분증 같은 책이다. 냉정한 쾌락주의자가 두꺼운 소설 책 한 권을 들고 무작정 자신을 찾아온 진지한 여자로 인해 흔들렸다. 그것을 삶의 오류라 지적한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깃털처럼 가벼웠던 한 남자의 삶이 조국의 묵직한 역사 속에서 변신과 헌신으로 무거워진다. 사랑과 섹스, 역사와 이념의 세월 속에서 존재의 모순과 관계의 저울들이 요동친다. 아내를 위해 해외로 망명하여 정착하지만 본성은 달라지지 않는다. 제네바에 있는 사비나와의 관계가 그렇고, 사비나와 프란츠의 사랑이 그렇고, 프란츠의 어린 애인 또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에로틱한 양념으로 뜨겁다. 자유롭고 발랄한 사랑, 묵직한 책임과 진지함의 대비가 존재의 한계들을 들춰내고 파헤친다. 테레자를 사랑하고 그녀에 얽매여 보낸 7년인데 우울한 이별의 왈츠도 울려 퍼진다.

1984년 발표된 이 소설은 4년 뒤 필립 코프먼 감독에 의해 다니엘 데이 루이스, 줄리엣 비노슈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져 호평을 받았다. 1968년 1월 정권을 잡은 개혁파 서기장 알렉산드르 둡체크가 주도한 짧고 달콤했던 7개월의 민주화 과정을 잘 표현한 이 영화는 ‘프라하의 봄’이란 한글 제목으로 개봉했다. 바로 그 격동의 시절에 소련군이 나약한 둡체크를 굴복시키는 과정 속에서 스위스 망명이 이뤄진 것이다. 토마스의 계속되는 바람기를 뒤로하고 프라하로 되돌아간 테레자와 그녀를 뒤따라온 토마스는 정치적 숙청에 따라 도시의 밑바닥 생활을 전전한다.

제국의 만행은 대부분 증거 없이 여러 국가에서 자행되었는데,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달랐다. 소련 탱크만 찍다가 잡지사에서 해고를 당해 변두리 바텐더로 밀려난 테레자의 추락도 그 일부였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갈망했던 그녀의 삶이 프라하의 봄을 관통하며 역사의 일부가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미성년자의 불편한 유혹과 시비를 거는 대머리, 키 큰 남자의 구원이 혼란에 빠진 그녀 삶의 무게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새벽 귀가 후 토마시의 머릿결에서 풍겨지는 시큼한 여자 성기 냄새가 불편하게 각인됐다. 참을 수 없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의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러나 묵직함은 진정 끔찍하고, 가벼움은 아름다울까? 가장 무거운 짐이 우리를 짓누르고 허리를 휘게 만들어 땅바닥에 깔아 눕힌다. 그런데 유사 이래 모든 연애 시에서 여자는 남자 육체의 하중을 갈망했다. 따라서 무거운 짐은 동시에 가장 격렬한 생명의 완성에 대한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 13쪽

끊임없이 가벼움을 추구한 사비나는 제네바에서 4년을 보낸 후 파리로 옮겨 가지만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힘든 존재로 살아간다. 부모, 남편, 사랑, 조국까지 배반할 수 있지만 더 이상한 배반할 존재가 없을 때 빠지는 상실감이었는지도 모른다. 파리에 정착한지 3년쯤 되었을 때 그녀는 여태 까맣게 잊고 살았던 토마시의 아들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소설의 절반이 지나기도 전에 두 주인공의 부고가 날아온 것이다. 시대를 앞 선 포스트모더니즘과 시간의 흐름을 파괴하는 서술 기법은 삶과 죽음의 인과 관계마저 사정없이 흔들어대지만 문체는 경쾌하다. 말 못할 고민과 소통 부재의 서로 다른 관점들이 상상력을 극대화시킨다.

어깨에 짐을 지고 견디거나 싸우며 살아가는 존재들의 인생은 무거움의 은유로 활기차다. 테레자는 자신이 떠나면 남자가 따라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부당했는지 후회하면서도 그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한 사랑의 감정이었노라 강변하고 싶을 거이다. 하지만 토마시는 테레자를 전혀 원망하지 않았고, 자신의 변화를 나락으로 여기지 않고 또 다른 자유로 받아들였다. 사비나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한 남자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그 후 버림받은 남자가 복수를 꾀하거나 그녀를 따라온 일은 없었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영혼과 육체가 균형을 이루는 바로 그 지점에서만 실존하는 불완전한 존재들의 가볍고도 무거운 이야기는 참으로 난해하다. 가벼움을 대표하는 토마스와 무거움을 상징하는 테레자의 만남이 옳았는지, 그들이 취리히로 떠난 것은 옳았는지, 프라하로 되돌아간 그녀의 결정은 또 얼마나 괴로운 일이었는지 끊임없이 사색하게 만든다. 불완전한 인간들의 참을 수 없는 가벼운 행동들은 오로지 가능성과 희망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죽음이 찾아올지언정 결코 슬프지 않은 낙관적인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지구에 사는 우리는 당연히 다른 행성에서 인간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막연한 개념밖에 지닐 수 없다. 인간이 더 현명해질까? 인간이 완숙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반복함으로써 이에 도달할 수 있을까? 비관주의자와 낙관주의자가 의미를 갖는 것은 이런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 속에서만 가능하다. 낙관주의자란 5번 행성에서는 인간 역사가 피를 덜 흘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비관주의자란 그런 것을 믿지 않는 자이다." - 360쪽

밀란 쿤데라의 이 명문은 고통을 누그러뜨리는 좋은 치료제다. 모든 고통이 사소한 일로 취급될 수 있을 만큼 마음을 맑게 해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죽음에 대해서 추상적으로만 인식하던 내가 더욱 낙관주의자가 된 것을 증명해 준 문장이다. 관혼상제(冠婚喪祭)의 구체성에 눈을 떠서 기뻤다. 언제나 실수와 후회를 반복하는 깃털처럼 가벼운 삶이지만 어제 보다 나은 하루를 마감하는 생활 속 작은 기쁨으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스스로가 낙관주의자임을 증명하는 것 같다.

육체와 영혼, 가벼움과 무거움, 의미와 무의미, 순차적 시간과 반복적 회고, 필연과 우연 속에서 다양한 질서와 질문을 만나는 장편 소설 하나에 삶의 태도가 바뀔 수 있다면 그것은 숭배받을 만한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운명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결정들과 우연한 사건들과 어쩌다가 받아들이게 된 구속들의 축적이 낳은 산물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죽음을 향한 그 꼬불꼬불한 길,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의 완만한 상호간의 파괴는 영원한 애매함을 드러내 보이려는 듯 어떤 내면의 평화를 다시 찾는 길이기도 하다.

“그녀는 나무를 껴안고 몸을 떨며 흐느꼈다. 그것은 나무가 아니라 그녀가 잃었던 그녀의 아버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 그녀의 증조, 고조할아버지, 거칠거칠한 나무껍질을 통해 그녀에게 뺨을 대 주기 위해 아득히 먼 시간의 심연에서 온 무한히 늙은 남자인 것 같았다.” - 246쪽

테레자는 자신의 욕망이 토마시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고 자책한다. 평화롭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며 존경받는 외과의사로 승승장구했을지도 모를 그가 모든 것을 잃고 인생의 밑바닥으로 내려가 건물 유리창이나 닦으며, 낡은 트럭이나 수리하며 짐을 실어 나르는 초라한 생활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하고 괴로워한다. 낯선 취리히에서 겨우 정착하고 자리를 잡았던 남자가 자신 때문에 흔들렸다. 집착과 바가지가 없었더라면, 자신이 프라하로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행복했을 것 같은 그의 인생이 물거품이 되었다고 자책한다. 참을 수 없는 사랑의 가벼움이여!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지적 허영심이 바탕에 깔려 있던 스무 살 무렵이었다. 사랑과 섹스에 관한 에로틱한 묘사가 매우 인상적이었고, 바람둥이 토마시에 대한 적대감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일으킨 불완전한 독서였다. 서른 즈음에 다시 펼쳐 본 이 책은 등장인물들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마흔 즈음에 같은 출판사에서 밀란 쿤데라 전집이 출간되자 별다른 고민 없이 구입했는데 30년 전 문법 개정 때 사라진 ‘간호원’이란 표현이 버젓이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텍스트의 영구성이 당황스러웠다. 마그리트의 그림을 각 시리즈별 특성에 맞게 적용한 하드커버 디자인은 앞쪽의 면지는 회색을 쓰고, 뒤쪽 면지는 짙은 푸른색을 썼을 만큼 사치스럽게 예쁘다.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십대에 생을 마감한 안네 프랑크와 초로에 세상을 떠난 오드리 헵번의 인생은 짧았으나 현대사에 묵직한 자취를 남겼다.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는 밀란 쿤데라는 그러한 여걸들과 동갑이나 두 사람이 존재했던 시간보다 더 많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체코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나 예술에 조예가 깊은 청춘을 보낸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서 두 번이나 추방당하는 젊은 시절을 겪은 뒤 프라하의 봄에 참여했다. 소련 체제를 줄곧 비판한 탓에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탄압을 받던 중 프랑스로 망명했으며, 6년 뒤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다.

한 남자가 있다. 한국전쟁 용사인 그는 살면 살수록 고통스러운 것이 인생이라는 지론을 이야기한다. 투철한 반공주의자로 젊은 시절 공화당 관리장으로 애국심을 불태웠던 그는 인생의 황혼에 이르러 다양한 민족주의자와 민주주의자들 이해하고 존경하며 사상적 변화를 완성시켰다.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오래도록 지켜보며 고생했던 한 여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는 아내에게 했던 많은 것들을 후회하며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데 삶은 오직 한 번만 있는 것이라 안타깝다고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벼워지는 그는 점점 무거워지는 나의 한번 뿐인 아버지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사교적인 생활인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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