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배미애의 아틀리에 풍경] 설치조각가 정혜련의 사유적 공간드로잉 ‘추상적 시간’

발행일시 : 2017-06-20 00:00
[배미애의 아틀리에 풍경] 설치조각가 정혜련의 사유적 공간드로잉 ‘추상적 시간’

머릿속을 떠다니는 수많은 생각을 시각적 혹은 청각적, 또는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여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지는 예술가들의 재능에 우리는 감탄을 금치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을 관찰하고 탐구하여 이를 예술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자기성찰의 모티브로 삼는 예술가, 즉 예리한 관찰력과 직관으로 삶의 ‘속살’을 올바르게 기술하고 설명하고 해석하여 자기 존재의 이유를 밝혀내는 작가는 흔치 않다. 작가의 나이가 어리다면 더욱이 쉬운 일이 아니다. 경험에서 오는 삶에 대한 지혜와 상황 대처방법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를 거슬러 우리 삶의 무게를 인식하고 적절한 문제제기를 통해 법칙과 규칙을 발견하고 거의 정답에 가까운 해석으로 삶을 관조하는 탁월한 작가들이 있다.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십대 초반의 젊은 여성 설치 조각가 정혜련이 나에게 있어서는 그런 작가이다.

정혜련 작가는 자신이 기억하고 상상하는 ‘세계’의 풍경을 선과 면으로 그려내고, 이를 입체화하는 일종의 ‘드로잉 조각’, 즉 공간드로잉을 펼친다. 시간의 무상함과 존재의 불확실성을 표현한 불규칙한 형상의 공간드로잉을 통해 시각언어가 지닌 내러티브를 모색한다. 불특정의 가변적인 장소에 펼쳐놓은 작가의 공간드로잉은 작가와 우리가 동시에 살아가는 세상의 구조에 대한 불확실한 연계성을 나타낸다. 작가는 이와 같이 존재와 관계, 그리고 사유와 공존을 설명하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삶을 지탱해 온 무형의 규칙과 에너지를 인식하고자 한다. 사실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이 공간은 매우 추상적이고 불확실한 대상이다. 작가가 이 공간 속에 3차원 입체 드로잉이라는 형식을 추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연결해 주고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함이다.

Abstract-Time,-90x70cm,-mixed-media,-2012,-갤러리이배-제공 <Abstract-Time,-90x70cm,-mixed-media,-2012,-갤러리이배-제공>

자유로운 선이 만들어내는 조형적 집중과 확산, 시각적 긴장과 이완으로 구성된 ‘Memory of Fantasy 판타지의 기억’은 구체적인 대상을 지시하거나 재현하기보다 동력에 의한 움직이는 다수의 원으로 구성된 시지각적 작품이다. 작품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에 의한 일루전과 드로잉효과를 극적으로 도입하여 시선을 현실세계로부터 자신의 심리 속으로 돌려놓으며 심상지도를 형태로 전환했다. 실재와 그림자의 경계가 애매한 이 작품은 벽에 부착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공간에 떠 있는 형태가 자유롭게 운동을 하는 듯한 시각적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기억을 밑거름으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불확실한 세계와 불완전한 자신의 관계성을 밝히려고 작동되는 비가시적인 마음의 상태를 움직이는 시각적 형태로 보여주고자 하는 이 작품은 이후 전개되는 ‘Abstract Time 추상적 시간' 시리즈의 단초가 된다.

Memory-of-Fantasy-1,-공간-내-설치,-mexed-media,-2011,-갤러리이배-제공 <Memory-of-Fantasy-1,-공간-내-설치,-mexed-media,-2011,-갤러리이배-제공>

작가는 작업하는 행위를 기억을 생산해 내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기억을 소환하는 의식의 흐름을 시각적 장치를 통해 공간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는 단절된 듯하고 일관성이 결여된 듯 하지만 실제 구조적으로 연결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정형화된 장치를 활용한다. 완만하게 미동하는 장치는 기억을 소환하는 움직이는 마음,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이 작동되지 않으면 기억도 굳어 버린다. 되돌릴 수 없는 기억의 세계는 실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시공간이 된다. 이 지점에서 작업의 모티브로 설정한 기억과 연계된 추상적 시간성은 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개념화된 추상적 시간을 시각화하기 위해 작가는 작품 속에 ‘운동’, 즉 움직임을 도입하고 있다. 마치 시계바늘처럼 느리게 돌고 있는 여섯 개의 원반은 시간의 흐름을 암시한다. 작가의 작품 속에서 시간은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시공간을 흡수하면서 원심을 향해 수렴되는 느릿한 선들의 운동만이 존재할 뿐이다.

Abstract-Time-1,-공간-내-설치,-mexed-media,-2012,-갤러리이배-제공 <Abstract-Time-1,-공간-내-설치,-mexed-media,-2012,-갤러리이배-제공>

거의 원에 가깝도록 휜 자작나무를 이용해 공간에 자유롭게 그린 입체 드로잉 '추상적 시간'에는 공간은 배제되고 ‘추상적인 시간’만이 존재한다. 어지럽게 엉겨있는 것처럼 보이나 한 부분이 열려있는 원으로 된 모듈이기 때문에 이어붙이는 방향에 따라 자유로운 ‘공간 드로잉’을 구현된다. 연속되는 굽은 호가 서로 뒤섞인 상태는 해독할 수 없는 심리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다른 한 켠에 매달려서 모터에 의해 미동하는 비정형의 가죽 띠 덩어리로 인해 이어붙인 공간 드로잉은 조금씩 흔들리며 수많은 어지러운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이와 같이 사물은 움직이되 시간이 정지되는 모순된 상황 설정을 통해 작가는 ‘추상적 시간’이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마음에 담아 놓은 시간의 덩어리와도 같음을 말하고자 한다. 이 작품 속에서는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의 속성은 사라지고 출발점이 곧 귀결점이 되는 구조적 형태만이 존재한다. 시간을 빌어 어지럽게 롤러코스트를 타다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마음의 상태를 그린 공간 드로잉이 바로 그것이다.

Abstract-Time,-공간-내-설치,-mexed-media,-2012,-갤러리이배-제공 <Abstract-Time,-공간-내-설치,-mexed-media,-2012,-갤러리이배-제공>

‘추상적 시간’ 시리즈에 이어 작가는 ‘연쇄적 가능성-행성 Serial Possibility-PLANET’시리즈를 통해 작가 개인적 기억과 인과관계에서 탈피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다 거시적이고 보편적인 접근방식을 추구하면서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한다. 즉, 인간의 자기규정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해답을 인간 삶 속에서 전개되는 우연적 움직임들에서 찾고자 한다. 지속되는 현실은 인과관계의 담론을 벗어 날 수 없으며 이 과정에서 발생된 에너지는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삶을 지속시키는 동력이 된다. 이 시리즈에서 작가는 물질의 생성과 변화, 개체간의 자율적이고 연속적인 상호작용에 주목하여 물질과 정신세계에 작동하는 원리를 유기적 형태로 시각화한다. 조형화된 작품은 움직이고 계속 변화하는 증식과 확장이 가능한 상태로서 표현된다. 강하면서도 부드럽게 휘는 흰색 폴리카보네이트 조각 수 백 개가 볼트와 너트로 서로 연결되어 상당한 길이의 비정형적 입체드로잉 형태로 증식된다. 이 작품은 문명과 인간의 상호작용, 기억과 상상을 시각적으로 재생함으로써 유기체적 생명체로서의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식하는 동시에 존엄성을 상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연쇄적-가능성--행성,-공간-내-설치,--mixed-media,-2015,-갤러리이배-제공 <연쇄적-가능성--행성,-공간-내-설치,--mixed-media,-2015,-갤러리이배-제공>

정혜련 작가는 1977년 부산출생으로 부산대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4년 성곡미술관 내일의 작가에 선정되면서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후 송암문화재단 신진작가 선정, 봉생청년문화상, 하정웅청년작가상, SEMA신진작가, 김종영미술관 올해의 젊은 조각가상을 비롯하여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해외레지던시부문 작가로 선정되는 등 꾸준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2002년 이후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여하였으며 매 전시마다 깊은 사유와 자기성찰을 동반한 새로운 시도로 자신만의 고유한 독창적인 작업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형이상학적 삶의 통찰을 관람객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작가의 끊임없는 도전과 창작정신은 평단의 큰 지지를 받고 있다.

배미애 geog37@nate.com 갤러리이배 및 이베아트랩 대표, 전 영국 사우스햄톤대학교 연구원 및 부산대학교 연구교수. 지리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강의와 연구원 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 직업에서 배우는 성찰적 태도에 깊이 공감하면서 평소 미술작품과의 막역한 인연으로 50세에 정년에 구애 받지 않는 새로운 직업으로 갤러리스트를 택했다. 미술사의 맥락을 짚어가며 일년에 약 10번의 전시를 기획하며 주로 우리나라의 보석 같은 작가들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차세대 한국 미술계를 이끌어나갈 신진 작가 발굴에도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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