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웠던 마법의 성이 실제로는 착각의 모래성이었다는 점을 알게 해 준 두 멘토가 있다. 그들은 붓다나 예수, 공자와 같은 성인도 아니며, 앨빈 토플러, 빌 게이츠, 아인슈타인과 같은 유명인도 전혀 아니다. 작고하신 외할머니와 호주의 코라가 그들이다.

"조약돌처럼 살거라"

외활머니의 말씀이다. 적어도 나는 이를 어느 철학자나 유명인의 명언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 어릴 때부터 따지기 좋아하고, 꼬장꼬장한 내 성격을 외할머니는 진즉 아셨나보다. 초등학교무렵부터 들었던 걸로 기억하니 외할머니는 꽤 오랫동안 '조약돌’처럼 살라는 이 말씀을 잊을 만하면 한번씩 들려주셨다. 아쉽게도 반복적이면서 자상한 이 가르침을 한동안 받아들이지 못했다.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야 나만을 위한 맞춤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지만, 가슴 속에 울화가 치밀거나 억울함에 부르르 떨 때, 내 기준에 거슬리는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조약돌’이라는 단어가 가슴 속에 훅하고 밀려오기 시작했다. 전혀 새로운 것이 등장한 마냥 '조약돌’이라는 단어가 가슴 속을 차지하고, 그때 그 시절의 외할머니와 내 모습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점차 거세지던 감정의 출렁거림이 이로 인해 일시 정지된 상태로, 잠시 멍해진다. 완벽한 솔루션은 아니지만, 제풀에 꺾이듯 거친 감정의 출렁임이 '조약돌’로 인한 '일시 정지’라는 효과로 말랑말랑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귀한 이 학습의 효과가 더뎠던 이유는 순전히 자아 성찰이 부족했던 탓이다. 어렸을 때는 한 귀로 흘러 들었고, 그 이후에는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전전긍긍 적응하면서 사느라 까맣게 잊어버렸다. 컴퓨터 전문지 기자로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 거의 매일 사람을 만나고, 글을 쓰면서 그들과 글을 통해 스스로를 재인식하는 시간들이 늘어났다. 그러자 어느날 외할머니의 '조약돌’이 가슴 속에서 살아 꿈틀대기 시작했다.

나는 참 뾰족했다. '부정성(否定性)’은 판단과 자의식의 기준점이었다. 내 존재와 가치에 대한 자괴감이 이런 비약적인 사고 방식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또한 내 판단에 잿빛인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방어 수단이라고 은연중에 합리화했을 지도 모르겠다. 외할머니는 이런 나를 어릴 때부터 제대로 보고, 단순하지만 핵심적인 단어를 평생 유산으로 남겨주셨다.

"So what?"

호주에 머무는 동안, 쉐어하우스의 집 주인인 코라의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충격이 컸다. 물론 이 말이 아니라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 온도가 극히 다르다는 것을 체험했다는 뜻이다. 끙끙 앓고 있는 문제가 있어 조언을 구하면, 십중팔구는 "So what?"이라며 한순간에 문제를 문제 아닌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100도로 끓고 있던 물이 순식간에 0도가 되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인간의 가시각은 보통 170도라 한다. 그런데 "So what?(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 말이면, 즉시 내 가시각이 360도가 된다. 다른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고정된 사고의 틀, 그 완전했다고 여긴 어설픈 세상에서 빠져나와 마치 갓 부화한 병아리처럼 온통 새로운 것을 만나는 기분이다. 내가 안고 살아가는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도, 애써 고민할 필요가 없다 것을 일깨워주니 문제라 여겼던 것들과 이별하고, 피로만 가중하는 불필요한 소모전에서도 물러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의 어떤 유명인의 명언보다도 더 귀한 그들의 가르침 '조약돌’과 'So what?'. 때때로 감정에 휘둘리는 마음이라는 불량 학생과 가면을 쓰고 괴롭히는 가짜 문제를 객관적이면서 분석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더없이 훌륭한 조합이 아닐 수 없다.

장윤정 eyjangnz@gmail.com 컴퓨터 전문지, 인터넷 신문, 인터넷 방송 분야에서 기자로, 기획자로 10여년 간 일했다. 출판 기획 및 교정을 틈틈히 하면서 글을 쓰고 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살면서 본 애보리진과 마오리족의 예술, 건강한 사회와 행복한 개인을 위한 명상과 실수행에 관심이 많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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