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만해도 햇살 좋은 날이면 집안의 이불을 내다 걸고 하루 종일 햇살향기를 이불에 담았다. 풀 먹인 빳빳한 홑청이 아니더라도 햇살 배인 이불을 덮을 수 있는 호사가 좋았다. 그러나 요즘은 미세먼지로 창문조차 활짝 열 수 없어 그러했던 날들이 그립다.

미세먼지 농도가 높지 않은 화창한 이른 아침, 향기에 이끌려 양평의 세미원을 찾았다. 행정구역 상 세미원은 양수리(兩水里)에 속한다. 남한강과 북한강의 물이 합쳐지는 곳으로 드라마, 영화 촬영장소로 알려진 예전의 나루터 ‘두물머리’와 가깝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용진리와 석장리, 벌리 일부가 합쳐져 형성되었다고 한다.

필자의 기억으로, 세미원이 개원하자마자 처음 방문한 것은 2004년 여름이다. 쏟아지던 비를 뚫고 찾았던 세미원의 연꽃 온실 안은 눅눅한 공기와 함께 꽃향기가 가득했다. 당시 놀라웠던 장면은 연꽃을 도화지에 담고 있던 나이든 화가의 모습이었다. 취미로 그리고 있지만 매일 찾아온다는 그분의 수줍은 웃음이 기억난다. 장대비를 맞으며 바람에 흔들리는 온실 밖의 거대한 연잎파도도 인상적이었다.

세미원의 노랑어리연꽃
세미원의 노랑어리연꽃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아침 일찍 꽃을 피운다는 연꽃을 보러 세미원을 다시 찾는다. 그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경기도로부터 자금을 지원 받아 조성된 수생식물공원이라고 할 수 있는 세미원은 면적 18만㎡ 규모에 백련지, 홍련지 등의 연못 6개와 아기자기한 테마 공간을 조성하였다. 연꽃박물관에서는 연꽃문화체험교실과 다도체험 등을 운영하고 있다.

세미원(洗美苑)은 ‘물을 보며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며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觀水洗心 觀花美心).’는 의미를 담고 있다. 더운 날씨이긴 하지만 연꽃이 개화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기이다. 성격 급한 필자가 ‘혹시’하는 마음에 먼저 찾아보았는데 다행히 부지런한 연꽃들이 꽤 피어있다. 쾌청한 하늘에 섬세한 연꽃들이 향기 좋은 한 폭의 수채화를 피운다.

세미원의 연못 전경
세미원의 연못 전경

거대한 홍련지를 지나 세한정을 둘러보면 두물머리로 향하는 배다리로 갈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관람객의 발길이 드문 귀한 아침 시간을 만끽하기 위하여 구석구석의 연못을 더 둘러보았다. 그 중 정원 만들기에 애착을 보이며 250여점의 수련그림을 남긴 ‘모네의 정원’에 마음이 간다. 그곳으로 가려면 한강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세심로(洗心路)’를 지나야 한다. 길목의 왼편에 서있는 커다란 바위에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빨래판 길 위에서 호호 양양하게 흐르는 한강물을 보며 한 발 한 발 마음을 깨끗이 빨아보세요.”라고. 그래서인지 세심로의 바닥은 돌로 만든 빨래판이 조밀하게 깔려있다. 재미있는 생각이다. 가까이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을 동시에 바라 볼 수 있는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물을 깨끗하게 정화하는 특성이 있는 연꽃과 세심로의 빨래판을 보며 ‘조향(調香)’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연꽃의 향기는 깊고 향기로워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연차(蓮茶)를 마시는 이들이 많다. 맑고 깨끗한 물에 연꽃을 띄워 서서히 우려 나는 향을 즐기는 방법도 있고 말린 연꽃잎을 종이에 담아 마시는 방법도 있다.

세미원의 모네의 정원
세미원의 모네의 정원

중학생 때였던 것 같다. 국어선생님께서는 어느 여름 날 연꽃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청나라에 살았던 심복의 자서전을 읽어 주셨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았던 심복이라는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아내 운(芸)이가 있었다. 그녀는 지혜롭고 현명하였는데 매일 밤 자기 전에 차주머니를 연꽃에 넣어두었다가 이른 아침 연꽃이 개화할 때 찻봉지를 꺼내어 남편에게 향기로운 차를 내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부생육기(浮生六記)」라는 심복의 회고록에 담긴 이야기이다. 중국문학에서는 삶의 아름다움을 견고하고 아름답게 표현한 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어린 나에게는 책의 의미보다 연꽃의 향기를 얻는 ‘운부인의 지혜와 낭만(浪漫)’이 감동적이었고 요즘 말로 ‘심쿵’했다고 할까.

향기에 대한 역사와 그 이야기는 셀 수 없이 많다. 향기는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고 해가 될 수도 있다. 현대인들은 환경으로부터의 정서적, 신체적 긴장상태가 지속되면서 스트레스의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한 해결법으로 개별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을 찾곤 한다. 음식으로 섭취하면서 맛과 향을 즐기거나 원하는 공간에서 공간에 대한 만족감과 향기로 지친 심신을 치유하기도 한다.

특히 근래에는 식·음료 분야에서 ‘보기 좋은’ 음식에, ‘좋은 맛’과 ‘좋은 향’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 소비자가 제품을 먹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느낀 좋은 향이 그 제품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홍보효과가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음료 분야의 향료는 인체의 유해성 여부까지 신중하게 고려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상황에 따라 향기치료방법을 선택하고 효과도 보고 있다. 긴장이 있는 날에는 청량감 있는 향수를 사용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중이 요구될 때는 허브차를 마신다. 공부방에는 허브식물을 놓아두어 생각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식물을 쓰다듬어 본다. 그렇다고 필자가 대단한 스트레스로 고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상을 행복하게 즐기는 개인적인 건강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향기를 만드는 조향사(調香士)들은 수천가지의 향을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같은 장미꽃의 향이라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향기가 달라질 수 있다. 즉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천연향료 외에도 다양한 화학물질의 성분을 이해하여 합성향료를 다루고 그 화학적 반응을 성분별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화학적 지식은 단시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향기를 만드는 사람을 ‘특별한 장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요즘은 대학에서 조향과 관련한 전공이 개설되고 향 교육을 진행하는 교육기관도 늘고 있어 취미로 향수를 만드는 사람들도 증가하고 있다. 전문가 중에는 후각은 오감 중 가장 예민한 부분이기 때문에 조향사는 체력과 인내심, 지구력이 필요한 직업이라고 이야기 한다.

현무암 천연방향제
현무암 천연방향제

직업 상 길을 가다가 새로운 가게가 생기면 호기심에 덜컥 문을 열고 들어간다. 운 좋게 그곳에서 향기를 만드는 젊은 조향사 김지영씨(moi대표)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아직은 조향사라고 불리는 것이 이르다며 손사래를 치지만 ‘향기 만드는 일’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갖고 있다.

“고객에게 제품 이미지를 설명하는 일이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하지만 누구나 갖고 있는 향기 말고, 사람의 인품에 어울리는 깊고 고급스러운 향기를 만들고 싶어요.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일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고객들 중에는 좋은 향수보다 가격을 먼저 생각하는 분들도 있어요. 단가를 낮추려면 인체에 해로울 수도 있기 때문에 고민되는 부분이죠. 요즘은 제주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현무암에 향기를 입히는 실험을 하고 있어요. 생각보다 고객들의 반응이 좋아 다행이에요.”

그녀는 직접 제작한 향수를 이해시키고 설득하기 위한 ‘향수의 향기 이야기’를 만들어가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그녀가 좋아하는 향은 라임과 바질을 조합한 향이라고 한다. 상큼한 여름의 향과 힌두교에서 신성한 향초로 소중히 여기고 있는 바질의 조합이라니, 향기가 그려진다. 반면 현무암의 향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바다가 아닌 오래된 숲의 향이었다. 현무암 천연방향제를 들고 눈을 감아본다.

푸른 제주의 깊은 숲, 바람소리와 함께 피아노 소나타가 들린다. 연꽃을 보며 먼 기억 속 「부생육기(浮生六記)」 의 아름다운 부인 ‘운(芸)’이의 차향기가 떠오른 것처럼.

서정화 fine0419@nextdaily.co.kr, fine0419@hanmail.net | 칼럼니스트, KBS방송국,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생물자원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에서 근무하면서 미디어와 박물관·미술관, 환경, 공예·디자인 관련 경험을 하였다. 현재는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이며 동화작가이다. 박물관교육학박사로 다양한 기획과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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