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임기를 시작하면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시민들 사이에서 기대감도 큰 편이다. 언론도 대통령이 시민과 가깝게 지내기 위해 파격적 행보에 관심이 많다. 연일 뉴스에서 쏟아지는 새로운 정부의 정책적인 측면에서도 경제, 외교, 교육, 그리고 환경 관련한 정책 실행에 대한 준비들이 시작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41% 로 당선된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여론 조사에 따르면 지지율이 득표율보다 거의 두 배가 높은 80%로 기록했다.

탄핵 끝에 당선되고 경제와 외교적인 측면에서 해결해야 할 난제가 쌓여 있어 상대적으로 문화정책에 대해서는 관심이 그리 높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문재인 대통령 시대의 문화 정책을 생각하기 전에 문화 정책 그 자체가 필요한 것인지, 필요하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새 정부의 문화 정책을 생각하면서 필자는 몇 년 전에 도쿄의 일본민예관에서 한 전시실에서 관람객을 안내하는 큐레이터의 말을 떠올려 본다. “박물관은 세 가지 측면이 중요하다. 첫째는 설립 이념이다. 설립 취지가 분명해야 한다. 둘째는 그 취지를 잘 반영하는 유물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 유물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후에 다른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면 이 말이 가끔 떠오르곤 한다.

그 큐레이터가 했던 말을 문화정책에 대비해 볼 수 있다. 문화 정책을 고려할 때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그 정책의 이념이다. 즉, 무엇을 위한 정책인지,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를 깊게 생각해야 한다. 이념이 명확해지면 정책의 자세한 내용을 선정할 수 있다. 그다음은 그 내용의 구체적 활용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면 문화 정책에 어떤 이념이 적합할까? 지금까지 한국의 문화 정책을 보면 크게 두 흐름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민족주의’이며 또 하나는 ‘글로벌주의’다. 민족주의적 문화 정책은 20세기 전반기 일제 강점기의 억압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 이념은 ‘민족주의’이며 내용은 ‘우리 문화’이며 활용 방법은 ‘민족 자존심’을 높이기 위한 정부 주도적이다. ‘글로벌주의’는 1990년대의 세계적으로 퍼진 신자유주의와 같이 등장하면서 ‘우리 문화’를 브랜드화해서 문화적 상품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이는 ‘민족 자존심’보다 ‘경제적 이익’에 중심을 둔다.

그런데 21세기가 거의 5분의 1이 지나가는 현재로서 이 두 이념은 맞지 않는다. 민족주의의 배타성과 내재화 파시즘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고 글로벌주의의 시장 지배는 공공성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새로운 문화 정책의 이념이 뭐가 적합할까? 민주주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1987년의 민주화 항쟁으로 민주화가 시작했고 그 과정은 오늘날까지 진행되고 있다. 세상에 완벽한 민주 국가가 없지만, 한국은 계속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지키려는 노력은 대단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사건도 바로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순조롭게 파면하고 후임 대통령을 선출한 것도 민주주의가 좀 더 발전된 것이다.

민주주의가 문화 정책의 이념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선 단원적 민족주의와 공공성이 약한 글로벌주의와 달리 여러 가치관을 인정하는 공공성이 짙은 다원적 정책이 필요하다. 다원적 정책은 정해진 내용보다 시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에 중심을 둔다. 즉, 내용면에서 자유가 중요하다.

다원주의 이념, 시민이 자유롭게 정하는 내용이라면 어떤 구체적 방법이 있을까? 시민의 활동을 지원하는 방법이 있지만, 문제는 정부가 시민의 활동을 평가하는 입장이 되기 때문에 시민들과 갈등의 소지가 있다. 그리고 정부는 정치 상황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정부의 지원은 장기적 답은 아니다.

대신에 정부가 직접 문화 시설에 투자하는 방법이 있다. 문화 시설은 시장성이 떨어지지만 공공성이 높다. 예를 들면 문화 예술 센터 또는 박물관은 수익은 없기 때문에 ‘기업’이 투자하지 않는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자산가는 개인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 문화에 투자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범위가 한정되어 있고 후손들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지도 보장할 수 없다.

서울은 비슷한 수준의 대도시에 비해서 문화 시설이 아직 부족하고 한국의 지방 도시는 더욱 그렇다. 그리고 독재 시대에 지은 문화 시설 중에 불편한 장소와 대중교통이 불편한 곳에 있다. 서울의 예술의 전당과 국립현대 미술관은 대표적 사례이지만, 지방에 있는 국립박물관은 거의 도시 외곽에 있다.

그래서인지 한국인은 런던, 뉴욕, 파리, 도쿄와 같은 도시에 가면 서울보다 문화적이라고 느끼는 것 같다. 이들 도시는 20세기 초까지 지리적으로 크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문화 활동은 도시의 한복판에서 이뤄졌다. 20세기의 철도와 자동차의 영향으로 지리적으로 커졌지만, 문화 시설은 여전히 원도심에 남았다. 그리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원도심에 새로운 문화 시설을 만들었는데, 런던의 ‘바비컨 센터’, 뉴욕의 ‘링컨 센터’, 파리의 ‘조르주 퐁피두 센터’, 그리고 도쿄의 ‘도쿄 오페라 시티’와 ‘국립신미술관’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한국은 서울에 대부분 집중되어 투자되는 편이라 빈약한 지방 도시에 투자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문화 시설이 도시와 소통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 런던, 뉴욕, 파리처럼 집중도가 중요하다. 아무리 산이 아름답더라도 교통이 불편하고 주변이 식당, 카페, 술집이 없으면 도시와 단절이 된다.

도시 속의 문화, 문화와 소통하는 도시는 많은 시민이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기 때문에 민주주의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 속에 문화 시설에 투자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투자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시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시민의 요구에 맡는 것도 민주주의적이다. 1989년 미국 영화 《꿈의 구장》에 나온 명언인 “지으면 올 것이다”를 빌려 “문화 시설을 지으면 시민이 활용할 것이다”. 문화 시설은 시민을 위한 진정한 문화 민주주의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로버트 파우저 robertjfouser@gmail.com 전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 미시간대에서 일어일문학 학사 및 응용언어학 석사, 아일랜드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에서 응용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와 일본 교토대에서 영어와 영어교육을 가르쳤고, 일본 가고시마대에서 교양 한국어 과정을 개설해 가르쳤다. 한국 사회를 고찰하면서 한국어로 ‘미래 시민의 조건’, ‘서촌 홀릭’을 출간했다. 취미는 한옥과 오래된 동네 답사, 사진촬영으로 2012년 종로구 체부동에 ‘어락당(語樂堂, 말을 즐기는 집)’이라는 한옥을 짓기도 했으며, 2016년 교토에서 열린 ‘KG+’ 국제 사진전시회에 사진을 출품했다. 현재 미국에서 독립 학자로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어로 ‘외국어 문화사’를 집필 중이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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