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글쓰기 좋은 계절인 만큼 ‘외국어 문화사’에 대한 책을 즐겁게 쓰고 있다. 내용이 흥미롭고 방대해서 외국어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가 되었다. 그러던 중 필자가 안타깝게 생각했고 불만을 가졌던 한국의 언어 교육 정책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필자가 가졌던 불만의 핵심은 한글 전용과 영어 일극(一極)이다.

한글 전용은 일제 강점기의 억압을 반대하기 위해 나타난 발상이다. 일제가 한국의 민족성을 없애려고 했던 상황에서 한글을 지키는 것은 민족성을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남북한이 분단되어 두 나라가 세워졌을 때 한글 전용 정책이 시행된 것도 그러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북한은 출발부터 100% 한글 전용을 시행했고 남한은 한글 전용이 기본이지만 한자를 혼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한자 사용이 급격히 감소하고 지금은 일반 언론과 출판물에 한자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필자는 한글 전용 정책 자체에 대한 문제보다는 그 정책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한국이 ‘일제 강점기’라는 아픔을 겪었기에 한글 전용은 한글의 존중과 애국이라는 면에서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한글 전용이 한자 교육에 미치는 영향이다. 1970년까지는 한자를 필수 과목인 국어 시간 안에 가르쳤고 국어 교과서에도 한자를 괄호 안에 표기했다. 그런데 1970년 후에 한자를 국어 시간 안에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자 1972년부터 한문이라는 선택 과목으로 한자교육이 명맥을 잇고 있다.

그렇다면 필수 교육에서 사라진 한자 지식의 습득이 왜 필요한 것일까? 한자 교육을 지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문화적 지식과 인성의 함양에 있다. 또한 한국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쳤던 유교 사상에 대한 존중 때문이다. 유교 사상에 근거해 한문으로 쓰인 문화와 철학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문화적으로 높은 소양을 쌓을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의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유교 사상을 전근대적인 것으로 치부했다. 그래서 어쩌면 한자에 대한 집착은 한글 전용에 대한 의무감과 같은 민족주의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한자 지식은 국어 지식을 높일 수도 있다. 이것은 유럽과 미국에서 라틴어 교육을 중요시하는 것과 같다. 서양 각국의 언어에 따라 라틴어에 어원이 있는 단어의 비율이 다르지만, 많은 나라의 언어들이 라틴어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학문과 관련된 소위 ‘고급 단어’나 전문적인 단어일수록 라틴어의 영향이 크다.

한국어는 한자에 어원이 있는 단어, 이른바 ‘한자어’의 비율이 아주 높고 ‘고급 단어’나 전문적인 단어들 많다. 또 순수한 한글보다는 한자의 비율이 높아 이에 대한 반발로 한글 전용, 즉 국어 순화의 움직임이 컸다. 그러나 어느 정도 국어 순화가 성공해도 서양 언어들이 라틴어를 배제 못하듯이 한자도 비율이 여전히 높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자어에 대한 이해가 좀 더 필요하며 이를 위해 한자 교육이 필요하다.

또 다른 의미가 있다면 언어를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은 한자를 사용하므로 한자를 잘 배우면 중국어와 일본어를 쉽게 배울 수 있다. 영어는 상업, 외교, 그리고 학문적인 면에서 국제 공용어가 되었지만 한국에 오는 관광객은 영어 실력이 높지 않은 중국인과 일본인이 많이 오고 관광 이외도 이 두 이웃나라와 인적 교류가 많다. 중국은 한국의 가장 큰 외교 상대이자 이 관계는 오래 지속될 것이다.

그래서 중국어와 일본어의 수요는 영어만큼 아니라도 한국인에게 여전히 중요한 언어일 것이다. 이 언어에 사용되는 문자를 일찍 배우면 그 언어 학습에 활용할 수 있는 지식 기반이 된다. 이를 위해서 초등학교 1학년부터 한자를 위한 교과 시간을 따로 마련하는 것보다 국어 교과에 일정 부분 한자 교육을 포함하면 훨씬 효과적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중·고등학교에 올라가도 간단한 한시와 한문을 배울 수 있어서 교양도 넓힐 수 있다.

그렇다면 외국어 교육을 어떻게 개혁해야 할까? 현재 한국에서 영어는 필수 외국어이고 다른 외국어를 ‘제2외국어’라는 틀 안에서 가르치고 있다. 교육 과정에서 인정하는 제2외국어는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아랍어, 그리고 베트남어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학교에서는 중국어와 일본어를 주로 가르친다. 독일어와 프랑스어는 2000년대 초까지 가르쳤지만, 중국어와 일본어의 인기가 높아지자 이들 언어를 배우려는 학생 수가 현저히 줄었다. 그 외의 외국어 수업은 찾아보기 힘들고 아랍어와 베트남어는 거의 가르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런데 자세하게 보면 현재 한국의 외국어 교육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영어 교육을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까지 하고 있는데 소수의 엘리트 학생을 제외하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학생이 드물다. 학교에서 배운 영어 교육에 사교육 등의 추가적인 영어 학습이 더해져야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훨씬 많다.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 교육의 실효성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제2외국어는 더욱 심각하다. 중학교부터 시작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보통은 고등학교부터 시작하는데 수업 시간이 적어 인사말이나 몇 개의 기본적 문구, 즉 그 언어를 잠깐 맛보는 정도이다. 영어 이외 다른 언어를 접하는 것 그 자체가 교양이 될 수 있지만, 졸업하고 계속 그 언어를 사용하지도 못하고 사회에 나가 거의 다 잊어버린다면 교양이라는 명분이 약하다.

해결책이 뭘까? 학교에서 수업시간은 한정되어 있어 영어와 제2외국어 시간을 늘리기 어렵다. 시간을 통합하고 ‘외국어’ 과목을 마련하면 그 안에서 영어 또는 다른 언어를 가르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현재 필수인 영어를 선택으로 전환하게 된다. 사회적 요구 때문에 영어를 압도적으로 선택할 것이지만, 다른 언어를 배우고 싶은 학생은 집중적으로 그 언어를 배울 수 있다. 한국이 다문화 사회가 되면서 자기 뿌리와 관련한 언어를 배우고 싶은 학생이 생길 것이다. 그 이외도 개인적 호기심으로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배우고 싶은 학생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고등학교에서 늘어나는 다양한 외국어 수업을 위해서 교사 양성과 채용을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 또한 지역이나 학교의 요구에 따라 현재 교육 과정에 포함시키지 않은 외국어 수업을 시작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예를 들면 지역 교육청이 만든 교육과정을 교육부에서 인증을 받으면 그 수업을 진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재 국어/한문/영어/제2외국어의 틀을 국어/외국어로 간소화하고 그 안에서 국어, 한문, 그리고 외국어 하나를 공부하게 하는 것이다. 한문, 영어, 제2외국어를 겉핥기로 하는 것보다 한문이나 배우고 싶은 외국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졸업할 때 활용할 수 있는 지식과 능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한자 배제와 영어 일극은 미래의 사회적 요구에 대한 냉정한 분석 위에 만들어진 정책이라기보다 20세기의 민족주의와 여전히 존재하는 사대주의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21세기가 깊어가는 오늘날, 21세기 중반과 그 이후의 사회적 요구에 만족시킬 수 있는 언어 교육 정책을 생각할 때이다.

로버트 파우저 robertjfouser@gmail.com 전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 미시간대에서 일어일문학 학사 및 응용언어학 석사, 아일랜드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에서 응용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와 일본 교토대에서 영어와 영어교육을 가르쳤고, 일본 가고시마대에서 교양 한국어 과정을 개설해 가르쳤다. 한국 사회를 고찰하면서 한국어로 ‘미래 시민의 조건’, ‘서촌 홀릭’을 출간했다. 취미는 한옥과 오래된 동네 답사, 사진촬영으로 2012년 종로구 체부동에 ‘어락당(語樂堂, 말을 즐기는 집)’이라는 한옥을 짓기도 했으며, 2016년 교토에서 열린 ‘KG+’ 국제 사진전시회에 사진을 출품했다. 현재 미국에서 독립 학자로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어로 ‘외국어 문화사’를 집필 중이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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