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라는 듀엣가수가 부른 ‘내 마음의 보석상자’라는 곡이 있다. 연인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노래한 곡으로 어떤 귀한 보석보다 더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마음이라는 ‘보석상자’에 영원히 담아두고 싶다는 내용의 가사이다. 사랑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감정조차 마음의 상자 속에 고이 간직하고자 하는 바람처럼 하물며 자신에게 있어 뭔가 특별한 물건을 마음이 아닌 실물의 상자 속에 담고자 하는 마음은 당연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독특한 디자인이나 색상의 상자에 각자에게만 특별하고 소중한 그 무엇을 담아 가끔씩 혼자 꺼내 보는 즐거움을 누린다. 더욱이 오랜 시간을 함께한 의미 깊은 물건들 앞에서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의 간극을 알아차리고 속절없는 상념에 휩싸이게 된다. 나를 또 돌아보게 하는 귀한 순간이다.

허미회 작가는 스스로가 느끼고 부대끼고 사랑했던 ‘시간과 공간’을 ‘상자 coffret' 속에 담는다. 살아오면서 충분히 몰두하고 교감한 특별한 장소, 그리고 그 소중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고스란히 상자 속에 담았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기만의 비밀, 추억을 담고 있는 보석 상자처럼 작가는 투명상자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신의 히스토리를 표현하고 있다.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에서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인간이 중심을 잡고 살아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세태에 휩쓸리지 않고 현재를 자각하는 것이다. 작가는 자기 탐색의 과정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불확실성과 불완전성을 수수께끼 같은 아크릴 상자 속에 서정적인 풍경과 같은 완전하면서도 안정적인 이미지로 대체하여 표현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소중했던 그 당시의 ’현재‘를 작가는 자신의 상자 속에 담아 삶의 흔적들을 정리하고 나열해서 지금의 ’현재‘를 살아가는 지침으로 삼는다. 작가가 만든 아크릴 상자는 삶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새롭게 인식하고 성찰하고자 하는 작가 자신의 삶에 대한 해석과 열망을 담고 있으며 작가는 이러한 열망을 ‘상자' 라는 매개체를 통해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따라서 작가의 작업에서 상자의 의미는 매우 각별하며 작가의 사생활과 기억을 담고 있는 밀폐된 내적공간인 동시에 그 투명성으로 인해 안과 밖의 구분이 모호한, 시각적으로 열린 공간이기도 하다.

작가는 시공간과 개연성을 지닌 문과 창, 사람, 풍경, 식물 등의 다양한 이미지를 차용해서 상념의 폭을 확대하려는 의도로 자신이 직접 경험했거나 현재 경험하고 있는 공간과 시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작품 전체가 작가 자신의 히스토리이며 개인적인 일기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다. 어릴 적 종이인형을 오리고 인형에게 옷을 입히며 인형놀이를 했던 것처럼 ‘상자’를 만들어가는 자신의 작업을 하나의 연극놀이에 비유하며 자기 자신과의 유희작업을 전개한다. 즉 작가는 일상의 경험과 상념을 투명한 공간에 기록하고 수집하면서 자아를 탐색하는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 '나'라는 인물은 소재, 오브제가 되기도 하며 작가 자신은 연기자, 예술가로서도 존재한다. 작가는 ‘Elle’라는 작가의 예술적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현실적 개연성을 지닌 가상의 인물을 통하여 마치 스스로의 기록에 대한 증인처럼 작가 자신의 본연 혹은 변형된 모습 속에서 은밀히 자신의 자아를 해체해 보려 시도한다. 이는 자아와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하나의 접근방식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삶의 불완전성과 불확실성이 드러내는 모순과 자아와의 연관성을 더욱 분명하게 유추하는 방식으로 삶에 대한 더욱 심도 깊은 통찰을 가능하게 한다.

파리1 소르본느대학의 Jacques Cohen 명예교수는 허미회 작가의 작업에서 현실의 시적인 불확실성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관람자들은 작가와 작가의 분신인 ‘Elle’를 통해 이미지와 글로 나타난 메시지를 읽고, 또 필사본과 타자본이 어우러진 미로에 반사된 그림자들과 디지털화된 그림자들이 어우러진 가운데 흩어져있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아름다움이 배어있는 모습 한가운데에서 흩어진 단편들의 반짝거림을 통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시적인 불확실성을 발견하게 만든다고 평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상자들이 담은 작가의 숨결인 베인 공기와 빛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또 다른 ‘나’와 조응하기를 기대한다.

허미회 작가는 투명하지만 빛과 조명의 반사에 따라 아주 선명하지 않은 모호한 이미지를 연출하는 아크릴이라는 재료의 특성을 살려 이미지들의 중첩으로 인해 나타나는 여러 간극 간의 경계 허물기 같은 유희를 즐긴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반영된 투명상자 속의 이미지들은 서로 겹치면서 안과 밖, 현실과 허구, 이미지와 물체, 글씨와 형상, 나와 타인의 경계를 유동적으로 만든다. 거기에는 일기의 단편들이 쉽게 공개되는가 하면 일상의 이미지들이나 과거의 경험이 ‘그랬던 것’으로서 ‘현재’를 만난다.

사진의 입체 효과를 극대화함으로써 회화 같은 사진, 사진 같은 회화라는 새로운 양식의 기법을 보여주고 있는 작가는 필름에 전사된 사진이미지, 텍스트, 일상적 오브제를 투명한 아크릴 상자에 붙이거나 조합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중첩되어 나타나는 다양한 이미지들은 서로 반사되어 매우 입체적인 작품으로 표현된다. 작품내용에 따라 상자모양이나 크기가 달라지며 보다 디테일한 작업인 경우 직접 손으로 작업해야 하기 때문에 작업과정이 결코 간단하지 않다. 필름지를 아크릴에 붙이는 것은 높은 난이도의 숙련된 수작업이 요구되어 마치 동양화의 배접과정과 동일하다.

배미애 geog37@nate.com 갤러리이배 및 이베아트랩 대표, 전 영국 사우스햄톤대학교 연구원 및 부산대학교 연구교수. 지리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강의와 연구원 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 직업에서 배우는 성찰적 태도에 깊이 공감하면서 평소 미술작품과의 막역한 인연으로 50세에 정년에 구애 받지 않는 새로운 직업으로 갤러리스트를 택했다. 미술사의 맥락을 짚어가며 일년에 약 10번의 전시를 기획하며 주로 우리나라의 보석 같은 작가들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차세대 한국 미술계를 이끌어나갈 신진 작가 발굴에도 힘쓰고 있다.

(*이 칼럼은 Nextdaily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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