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담 (login@naver.com)

또 엉덩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 뜨거웠던 여름엔 제주도에 들어가 커피동굴과 여러 마켓을 다니면서 커피를 내리느라 바빴고, 가을이 시작되면서 다시 육지로 올라왔다. 지난 9월 일산 DMZ영화제에 필자가 출연하는 ‘바람커피로드’ 다큐멘터리가 출품되어 상영이 되었다. 커다란 화면에 내 얼굴이 나오는 것이 영 낯설었지만 그래도 1년 넘게 촬영한 결과물이 관객들에게 첫 선을 보인 자리다. 다행히도 영화를 본 관객들은 무척 재미있게 봤다면서 내게 악수를 청하고 같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

그때 즈음 채지형 여행작가와 함께 몇 년에 걸쳐서 작업을 한 ‘제주맛집’ 책도 출간이 됐다. 처음 제주에 들어가면서부터 생각을 하고 있던 책이었지만 10년이 넘어서야 결과물이 나온 것이다.

10월에는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서울커피앤티페어 전시장에 커피트럭이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기도 했다. 얼마 전부터는 중앙일보에 연재가 되는 허영만의 ‘커피 한 잔 할까요?’에 필자와 커피트럭 풍만이가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시작되었다.

올해는 이래저래 얼굴이 많이 알려지는 해가 된 것 같다. 2013년 여름 출발한 커피트럭 여행이 벌써 4년째다. 올 가을은 천천히 움직이기로 했다. 그 동안 매번 사람들과의 만남을 진행하면서 여행을 했는데 그것이 참 힘들었다. 많이 움직여야 할 때가 있으면 가만히 있어야 할 때도 있다.

다행히 11월에는 큰 행사가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나만을 위한 여행을 하고 싶어졌다.

경주, 그리고 순창
11월 중순, 커피트럭에 짐을 챙겨서 경주로 출발했다. 12월초가 되면 추위 때문에 밖으로 다니기 힘들어진다. 이번 가을 여행의 계획은 경주부터 시작해서 남해안을 따라 움직이다가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로 들어가는 것이다.

경주에 도착하니 다행히 단풍이 아직 남아 있었다. 경주역 앞 성동시장 근처에 있는 ‘‹K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이곳의 권오민 사장과는 벌써 몇 번의 만남이 있어서 형동생하는 사이가 됐다. 내게 숙박비는 공짜다. 하지만 그날 게스트하우스 손님들에게까지 커피를 내려주기 때문에 커피값만 생각하면 오히려 내가 손해다. 그래도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커피가 인생의 커피가 될 수 있어서 즐겁게 커피를 내려서 같이 마신다.

경주는 우리가 잘 알면서도 사실은 아는 게 별로 없는 곳이다. 대부분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휙 돌아보고 난 후에는 한참 동안 다시 찾지 않는다. 단체로 우르르 몰려가 불국사, 안압지, 경주국립박물관, 대릉원 같이 유명한 관광지를 보고 허접한 숙소에서 허접한 음식을 먹어서 좋은 기억을 가질 수가 없는 곳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유명하지 않지만 가보면 좋은 곳들을 몇 군데 추천 받아서 갔다.

은행나무가 예쁜 도리마을에는 아쉽게도 은행잎이 많이 떨어져 있어서 그 정취를 즐기기에는 조금은 늦어버렸다. 하지만 천도교의 성지인 용담정은 그 계곡 사이로 쏟아지는 가을 햇빛에 반짝이던 붉은색 단풍잎을 잊을 수가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천천히 걷고 일찌감치 숙소로 돌아와서 게스트하우스 주인장과 맛있는 안주에 술을 마시고는 늦은 아침까지 푹 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에는 1층 로비로 나가 간단하게 토스트와 계란으로 아침을 만들어 먹고는 같이 있는 게스트들과 커피를 내려서 나눠 마셨다. 자전거를 끌고 나가서 제법 멀리 있는 서출지까지 자전거를 타다가 돌아왔다.

어느 새 긴 머리가 거추장스러워져서 경주의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잘랐고, 밤 늦은 시간에 영화관에 가서 닥터 스트레인지를 보았다. 그 다음날은 좀더 멀리 양동마을에 가서 천천히 한 바퀴를 돌고, 운곡서원에 앞에 있는 찻집에서 떨어지는 은행잎을 바라보면서 쌍화차를 한잔 마시기도 했다. 커피를 좋아하지만 매번 커피만 마시면서 다니기는 힘들다. 늦가을이라 차가운 냉기가 흐르고 있어서 따끈한 쌍화차가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 가을은 점점 더 깊어졌다. 경주에 며칠 있다 보니 순창에서 호출이 왔다. 금산여관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아무리 편한 곳이라도 너무 한 곳에 오래 머무르고 있으면 안 된다. 경주가 편하고 좋았지만 조금은 먼 길을 떠나기로 했다. 경주에서 순창까지는 트럭을 몰고 가면 약 5시간 정도가 걸렸다. 금산여관은 벌써 몇 번이나 가려고 했던 곳이지만 일정이 맞이 않았는데 이번에야 처음으로 방문을 했다. 이름은 여관이지만 지금은 한옥 게스트하우스로 운영을 하고 있는 곳이다. 예전에 잘 나가던 금산여관은 세월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고 10여년을 비워져 있었는데 이년 전쯤에 지금의 주인장이 인수를 해서 게스트하우스로 꾸며 다시 개장을 했다.

입구에는 오래된 금산여관의 간판이 여전히 매달려있어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곳이다. 이곳 주인장인 홍대빵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랑 동갑이다. 처음 만났지만 어느 새 친구가 되었다. 금산여관 바로 옆에는 자그맣게 ‘방랑싸롱’이라는 카페가 있다. 여행 가이드 출신의 재영씨가 방랑 생활을 잠시 쉬고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곤로에 통돌이 로스팅기를 돌리면서 커피를 볶고 순창에서 나오는 과르네리 크래프트 맥주를 가져다가 팔면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는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술이 지겨워지면 커피를 내려서 마시기도 하면서 밤새도록 이야기를 하고 놀았다. 다음날 나는 방랑싸롱 한 켠을 차지하고 앉아서 하루 종일 커피 로스팅을 하고 재영씨에게 커피 로스팅의 팁도 알려주기도 했다.

저녁때는 새로운 손님들이 금산여관을 찾아왔고, 다음 날엔 또 먼 길을 떠났다. 같이 저녁을 먹고 커피를 내려 마시고 그 다음날 아침에는 근처에 있는 ‘농부의 식탁’에 가서 유기농밀가루로 만든 빵과 계란으로 브런치를 먹었다.

커피를 팔지 않아서 점점 은행의 잔고는 0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마음은 조급하지 않았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커피를 내려 마시면서 여행은 계속 되고 있다.

지금은 순창을 떠나서 포항과 부산을 거쳐서 마산의 어느 여관에 있다. 내일은 근처에 있는 어느 공장에 가서 그 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커피를 내려줄 것이고, 금요일에는 통영의 한 카페에 가서 커피를 주제로 토크 콘서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그리고는 천천히 남해안을 따라서 완도로 가서 배에 커피트럭 ‘풍만이’를 싣고서 제주로 들어가면 된다. 그렇게 2016년의 커피여행은 마무리가 될 것이고, 나는 제주의 동굴로 돌아가서 긴 겨울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이담 login@naver.com 커피트럭 여행자. 서울에서 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제주로 이주해서 10년 동안 산 경험으로 ‘제주버킷리스트 67’을 썼다. 제주 산천단 바람카페를 열어서 운영하다가 2013년에 노란색 커피트럭 ‘풍만이’이와 함께 4년째 전국을 다니며 사람들과 함께 ‘인생의 커피’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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