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이라는 단어는 왠지 아날로그 적인 느낌이 난다. '낭만'은 디지털에 더 익숙한 세대들에게는 낯설고 아날로그 시절의 향수가 짙은 필자와 같은 세대들이 공감하는 단어가 된 것 같다. 낭만이란 더벅머리 장발로 통기타를 치거나, 얼룩덜룩 스노우진 디스코바지에 빳빳히 세운 진지한 앞머리가 난감한, 젊은 시절의 사진 속에 갇혀 있어야 마땅할 듯한 쿨하지 못한 단어같다. 그러나 그 낡은 낭만 속에서 1세대 IT인들이 성장했다.

그랬다. 지금 우리나라의 IT 1세대는 주로 소위 386세대이다. 현재 나이 40을 거쳐 막 50을 넘기고 있다. 나라님이 개발 도상과 건설 입국을 외칠 때 유년과 소년시절을 거친 그들에게 어느 날 정보화의 역군 역할이 맡겨졌다. 그리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시절을 경험했다.

그들은 지금은 용어조차 낯선 괘지 리포트용지에 "프러스펜으로 써야 점수가 잘 나온대" 리포트를 쓰던 대학 시절을 보냈다. 기억이 전생처럼 가물가물하다. 졸업논문은 타이프라이터로 한 글자 한 글자 쳐냈었다. 겨우 손가락만한 흑백 화면에 두줄 텍스트가 종이에 인쇄되기 전에 보여지는 전동타자기가 나왔다. 마냥 신기했다. 88년 전후였다.

그 직후 드디어 나타나기 시작한 386 컴퓨터! 파랗고 흰 글씨의 화면에 띠…띠리리리릭~ 모뎀 연결소리. PC통신이라 불렸던 데이터 통신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 그리고 전화비 안내도 된다는 VoIP. 잠시 나타나 폭풍같이 휘몰아치고 사라진 삐삐. 드디어 웹과 윈도우즈. 포탈과 블로그와 까페. 어찌 이 단어들에게서 향수를 떨칠 수 있을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1세대를 의기양양하게 만든 것은 제조의 성공이었다. 우리의 휴대폰이 반도체 신화를 바탕으로 소니를 물리치고 노키아를 잡았다. 디바이스 시장에서 이룩한 쾌거에 1세대는 취할 만도 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다는 박인환의 시처럼 IT 1세대의 발전동력은 무에서 유를 처음 창출해 냈을 때의 흥분과 설렘이었다. '알라딘의 whole new world(완전 새 세상)를 ..이마 아이니 유키마스(지금 만나러갑니다)'..의 떨림이 1세대의 추진 동력이었다. 낭만이었다.

그럼에도 '기술'과 '새로운 것'이라는 떨림이 당시 통신스타일의 폐쇄형 비즈니스 모델을 떨쳐내기는 어려웠다. 그것이 1세대 IT의 현실이자 한계였을지 모른다. 폐쇄적 플랫폼을 기반으로 시장을 지배하려 했던 야후와 MS의 부침을 지켜보면서도 교훈을 실감하기는 어려웠다.

2000년대 들어오면서 이제 실무에서 벗어나 경영진의 자리를 차지한 1세대. 구글과 SNS들의 폭풍 같은 휘몰이 가운데, 서비스와 플랫폼의 본질에 대한 경험이 없었던 우리의 1세대들은 대기업 중심의 비즈니스 모델 매너리즘의 심각성을 느끼기엔 선천적으로도 후천적으로도 신경선이 무뎠다.

네이버 다음 카카오 그리고 엔씨소프트와 넥슨, 넷마블. 또다시 대기업 중심으로 도급 업체들 마냥 줄 선 업계. 그리고 중소 IT업체들의 SI 중심의 내일 없는 구조가 고착화되기 시작했다.

왜 시장의 자연스런 확대를 위한 생태계는 머나먼 정글 같은지. 뭔가 잘못 끼워진 단추일까. 기획자들은 조금씩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본주의 기술주의 탄력을 받은 시장은 돌아볼 여유를 주지 않았다. 통신과 인터넷, 모바일의 폭발적인 기술의 부침 속에서 쇼(비즈니스)는 계속되어야 했다.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유연한 플랫폼, 자생력 있는 서비스와 콘텐츠는 자꾸 미뤄졌다.

IT는 이미 그들만의 리그가 될 수 없다. 평범한 일상 생활 안으로 파고 들어와 개인을, 관계를 ,소비를, 모두 변화시키며 사고와 습관을 바꾼다. 이런 IT가 자본주의 한 구석에서 기업의 이윤추구의 형상에 따라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그런 영역이 된다면 무서운 일이다.

자본과 기술주의의 재앙에 허덕이는 편리하고 효율적인 지옥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의 새로운 가치를 정의하고 그 가치의 지향점을 추구하며 함께 행복한 사회. 그래서 지금 IT영역에서 가장 필요한 질문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이다. 어떻게 가는가 보다는. 그 근원적 질문에 제대로 답한다면 산업구조부터 서비스 UX까지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낭만의 1 세대여, 잠시 낭만을 접고 현실을 보자. 낭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분석해 내고, 바꿀 것을 바꾸고, 더할 것을 더해야 하는 시기이다. 이미 좀 늦었을지 모른다. 물론 뺄 것도 빼야 한다. 거기에 나의 과거의 낭만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아플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1세대가 나서줘야 한다. 그리고 끌지 말고 밀어주는 입장이어야 한다. 그것이 한 세대를 통한 낭만의 완성이다.

노수린 suerynnroh@gmail.com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 언론홍보 석사, MBN 기자, KTF 해외마케팅과 플랫폼 기획팀장을 거쳐, IoT스타트업 운영과 컨설팅 및 교육 강의를 해왔다. 현재 한림대 사회학과 겸임 교수로 재직 중이다. IT는 사람의 행복과 가치추구를 위해 서비스와 콘텐츠로 관계를 연결하는 장치라 생각하며,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용한 오픈 IT를 기반으로 사용자UX가 주권처럼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며 많은 이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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