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자벨 위페르 주연의 ‘다가오는 것들’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50대 중반의 철학교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인생에 있어서 보내야 할 것과 다가오는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문제를 진지하면서도 품격 있게 묘사하였다. 유한한 인생을 물리적인 길(道)이나 서정적인 여정에 비유한다면 우리는 뒤돌아간다 해도 늘 무언가를 향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삶의 여정이 어디로 향하는 지, 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 깨닫지 못한다. 단지 각자가 지닌 다양한 가치관에 따라 어떤 사람은 좀 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또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게 한걸음씩 내딛고 있을 뿐이다.

길(道) 위의 인생은 인간에게 있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道’는 사전적 의미로는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서 삶의 ‘길’ 그 자체이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생활방식이다. 원래 ‘인생의 여로’라는 길의 의미였지만, 인간의 행위에 꼭 따라야 할 중요한 가치기준으로 인식되어 삶의 여정에서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에게 정신적 준거를 제공한다. 사람들의 행동은 사고가 지배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사고와 행위는 서로 분리되지 않은 이중성의 개념으로 이해하여야만 한다. 때로는 사고를 통해서, 때로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 만의 삶의 신념을 확인하려하는 자세가 바로 ‘道’의 자세이다.

손끝의 예민한 감각을 일깨워 지난한 삶을 되돌아보고 미래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작가, 이승희에게 ‘道’의 의미는 흙을 떠나서 존재할 수도 사유할 수도 없는 지점에서 발견한 사람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깨달음이다. 작가의 지인이 그를 일컬어 ‘길(道)에서 배우고 길에서 사는 사람이다’라고 했던가... 이런 점에서 그의 작품 제목이 그의 삶과 분리될 수 없는 ‘도(陶)’와 ‘도(道)`를 동시에 의미하는 ’TAO'인 것은 사뭇 의미심장하다.

반복적 동작으로 겨우 손끝으로 감지할 수 있는 두께를 지치지 않고 겹겹이 쌓아 올려 육안으로도 감지될 수 있는 부조를 만든 그의 작품 앞에서 숙연함을 피할 길이 없다. 예측할 수 없는 결과에 대해 오직 믿음으로만 하루하루를 견디는 일이 작가에게 있어서는 작업과정이자 삶의 과정이다. 이승희 작가와의 대화는 항상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나는 주로 대화의 줄거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정도지만 작가에게 있어 범사와 예술을 한 지평에 두고 서로 구분하고 옳고 그름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최순우 옛집 전시전경(2015년 10월)
최순우 옛집 전시전경(2015년 10월)

그의 작업방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전통적인 도자기법을 이용해 백토로 사각의 평판을 만든 후 흙물을 바른 뒤 말리고 다시 바르기를 약 3개월에 걸쳐 100회 이상 반복하면 흙판에 5~8㎜의 두께가 나타난다. 다음으로 티끌 높이보다 낮은 두께로 긁어내고 성형을 하면 곡선과 곡면이 주는 입체감이 생겨 표면과 이미지의 경계가 드러난다. 이미지 부분에 안료로 그림을 그린 후 배경 부분은 흙의 질감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유약을 바르지 않고, 도자기 부분은 유약을 발라 고전 도자기의 형태를 회화적으로 재현해낸다. 따라서 도자기 부분만 자연스럽게 도드라져 보여 배경과 중심이 대비를 이룬다. 유약을 바르지 않은 배경과 재현한 도자이미지는 이원적인 구분이 불가능하나 물성 차이는 뚜렷하다. 가까이에서 보면 작품 속 도자기나 배경은 두께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평면적이지만,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흰 공간에 부유하는 입체도자기 모습이다.

TAO, 71x85cm, ceramic, 2014
TAO, 71x85cm, ceramic, 2014

맑은 흙물을 겹겹이 쌓고, 티끌 높이의 결을 조심스럽게 긁어내고, 선과 면을 고르고, 그림을 그리고, 유약을 바르고, 수천도가 넘는 가마 앞에서 기다리는, 이 모든 과정에 쏟아 부은 열정과 에너지를 감지할 때 작품에 대한 진지한 이해와 작가와의 진정한 소통이 일어난다. 그가 만든 도자회화라는 예술의 새로운 담론은 이러한 숭고한 작업과정에 의해 더욱 의미를 부여받는다. ‘내 작업은 일종의 부조로, 도자기만도 아니고 회화만도 아니다. 그 둘이 결합된 독특한 현대미술을 실현하고 싶었다’ 고 말하는 작가는 자신의 내면적 울림을 예술로서 표현하고 동양적인 감성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감성에 호소할 수 있는 예술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다. 기능성이 강조된 입체적인 도예작품에서 벗어난 시각적 예술성이 강조된 벽에 걸 수 있는 평면도자의 탄생은 작가의 도전정신이며, 고정관념을 탈피한 선구자적인 관점과 의지인 것이다.

기억, 지름 900, 높이 400cm, ceramic, 2015
기억, 지름 900, 높이 400cm, ceramic, 2015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미래지향적인 어조의 영화제목 ‘다가오는 것들 Things to come'이 실로 무엇일지 전혀 알지 못한다. 우리 모두 길(道) 위의 인생이지만 과연 길에서 무엇을 떠나보내고 무엇을 맞이하는 걸까... 그러나 겨울의 쌀쌀한 바람으로 인해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들도 바로 다가오는 ’것들Things' 일 수 있음을 막연하게 생각해 본다.

이승희 작가가 흙물을 반복해서 계속 쌓는 과정은 ‘도道’를 닦는 과정과 유사하며 그가 추구하는 삶의 의미와 직결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 보내는 것과 다가오는 것은 분명 분리되지 않은 채 시간의 연장선상에서만 존재하는 연속적인 과정일 것이다. 작가 이승희가 그렇게 하듯이 모든 길 위의 인생들은 누적된 시간 속에서 삶과 존재에 대한 철학적 사유로무장하고 차곡차곡 다져가는 과정에서 조우하게 될 다가오는 ‘것들’을 만나게 될 뿐이다.

중국 징더전 작업장에서의 이승희작가
중국 징더전 작업장에서의 이승희작가

배미애 geog37@nate.com 갤러리이배 및 이베아트랩 대표, 전 영국 사우스햄톤대학교 연구원 및 부산대학교 연구교수. 지리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강의와 연구원 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 직업에서 배우는 성찰적 태도에 깊이 공감하면서 평소 미술작품과의 막역한 인연으로 50세에 정년에 구애 받지 않는 새로운 직업으로 갤러리스트를 택했다. 미술사의 맥락을 짚어가며 일년에 약 10번의 전시를 기획하며 주로 우리나라의 보석 같은 작가들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차세대 한국미술계를 이끌어나갈 신진작가 발굴에도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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