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의 봄에 남도 끝자락 부둣가 벤치에서 누군가 흘리고 간 얼룩진 종이 뭉치를 집어 들며 시작된 만남이 있다. 그 나름 창간 특집호라며 무려 76면이나 발행하는 배포를 보이긴 했으나 장평만 좁힌 목판-볼드체의 촌스러운 제호에 어디 들고 다니기도 민망한 판형의 1,000원 짜리 향토잡지였다. 끝없이 펼쳐지는 황톳빛 땅에 관한 글과 사진을 특집으로 농사꾼의 한 마디 놓치지 않고 담아낸 글맛, 봄빛 환한 매화마을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사연과 지역 병원 노동자의 인터뷰, 두어 곳 맛집 이야기와 사찰 탐방, 가수 김원중과 소설가 공선옥이 들려주는 지역 문화의 아름답고 투박한 한 마디 한 마디가 심금을 울리는 뛰어난 기획은 뜻밖에도 무구한 충격이 되었다. 차가운 바다 앞에서 한 시간에 하나씩 있는 배를 기다렸다 한 시간이나 파도를 가르며 들어가 내린 항구에서 다시 20리를 더 들어가야 도착하는 먼 섬마을 처가 어른들을 찾아 뵐 때까지 함께 나눌 대화거리를 넘치도록 제공한 특별한 선물이었다.

“더우문 목욕 흐고, 선풍기 있으문 됐제. 함부래 마라. 아~암 필요도 없슨께.”
어머니는 ‘에어컨’의 ‘에’자도 못 꺼내게 입막음을 하셨다. 한낮에 달궈진 열기가 미처 빠져나갈 틈도 없이 열대야가 이어진 날들이었다. 연만한 노인들은 날마다 영금을 본 끔찍한 더위였지만 에어컨 따윈 아무짝에 쓸모 없이 돈만 축낸다며 마다하셨다. 역정을 내며 손사래까지 치고선
“애기들 더운디..., 느그 집에는 언능 놔야제”라고 채근하셨다.
“우리 집은 산 밑이라 괜찮당께라. 그라문 올 여름에 엄니랑 한 대씩 같이 놓게요.”
우리 모자는 이렇듯 하나마나한 대화를 주고 받으며 한철을 보냈다.
- 월간 전라도닷컴 2016년 9월호 통권 173호 편집장의 여는 글 중에서

월간 전라도닷컴은 강렬한 지역 색의 촌스러운 웹진으로 시작했지만 불과 몇 년 만에 미운 오리새끼의 비밀을 벗겨내듯 우아한 종이 잡지의 본색을 드러내며 거침없이 달렸다. 중앙의 잡지사들이 전국을 상대로 시작해도 벅찬 도전을 전라도 변방에서 일궈낸 쾌거였다. 정체성조차 파악하기 힘든 묘한 이름의 편집장이 오지게 날카롭고 야물게 써대는 글에서 느껴지는 기운도 예사롭지 않았다. 표준말은 안중에도 없고 거침없이 표현하는 입말 그대로의 뚝심어린 전라도체는 자신감과 풍요로움이 넘쳐흘렀다. 흔들리지 않는 일관성으로 가장 전라도적인 것이 가장 한국적이며, 가장 세계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이 잡지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하는 올해의 잡지로 여러 차례 선정되었고, 한국미 넘치는 소박함의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사라져가는 이 땅의 근대사에 대한 기록물로도 손색이 없었다. 타지방은 어떻게 기록되는지 모르지만 전라도만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존재하는 유무형의 거의 모든 것을 향토잡지 하나가 담아낸 것이다.

키득키득 웃다가도 콧날이 시큰해지는 민초들의 애환이 살아 숨 쉬는 예향의 박물관을 관람하는 심정으로 정기구독을 신청했다. 100호 특집을 받아 쥔 그해 가을에 광주 구도심의 대인시장으로 찾아가 다짜고짜 편집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앙소. 거 하나 자시게.”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방석 자리를 깔아주며 윗목에 보관 중인 잘 익은 홍시까지 대접받는 따뜻한 환대의 자리였다. 평생 형님으로 모시고 싶다는 어쭙잖은 객기를 부리고 헤어진 뒤 잡지를 통해 종종 소식을 주고받았을 뿐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고, 격조의 세월 후에 책 한 권의 소식이 들려왔다.

촌스럽다는 것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다.
촌스럽다는 것은 호들갑스럽지 않고 웅숭깊다는 것이다.
촌스럽다는 것은 천진난만하다는 것이다.
촌스럽다는 것은 자존심이 세다는 것이다.
촌스럽다는 것은 때로 분노할 줄 아는 것이다.
(중략)
촌스럽다는 것은 도시스러운 것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것이다.
‘어린 도시스러운 것’이 ‘어른 도시스러운 것’을 맨날 놀리고 울려도 촌스러운 것은 어른스러운 것이라, 그저 조용히 웃으며 간다. 그러니 전라도닷컴이여, 우리 그냥 어린 도시스러운 것까지 우리 품에 안고, 쾌활 명랑하게, 천진난만하게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자와요.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연민하면서 그렇게 뚜벅뚜벅!
- 20쪽, 월간 전라도닷컴 100호 80쪽에 수록된 공선옥 축사의 인용

전국의 정기구독자들은 물론 소소한 광고비로 후원하는 기업가들에 의해 월간 전라도닷컴의 생명력이 지속된다. 크게 눈에 띄지는 않았으나 수 년 전부터 빠지지 않고 실리는 작은 출판사 광고가 있었다. ‘풍년식탐’이란 전라도 음식문화의 명저가 전혀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고 생각보다 많이 주목받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며 노력이 가상하다 싶었는데 ‘전라도, 촌스러움의 미학’은 결국 그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조용히 출판기념회를 찾아가 구석 창가에 홀로 앉아 오랜 정기구독자의 참된 마음으로 응원했다. 책이 만들어진 과정을 소개하던 행성B 출판사의 림태주 사장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강원도의 힘’, 남덕현 작가의 ‘충청도의 힘’에 필적할만한 가제 ‘전라도의 힘’을 기획했다가 얼마 전 서울시청 잡지 전시회에서 접한 공선옥의 '촌스러움의 정의'를 통해 제목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고 했다. 고난 속에서 피어난 그 땅의 문화에 적합한 단어는 ‘힘’이 아니라 ‘촌스러움’이었음을 깨닫고 저자와 협의하여 제목을 고쳤다고 했다.

전라도말 가운데 독보적인 쓰임을 가진 말들이 있다. '귄있다'는 사람에 대한 최고의 칭찬이다. '아름답다'거나 '귀엽다'는 의미지만 매력적인 외모만을 이르는 말은 아니다. 첫눈에 확 끌리는 외모만을 이르는 말이 아니다. 첫눈에 확 끌리는 외양보다는 보면 볼수록 정이 가는 사람, 밀과 행동, 마음 씀이 고운 사람에게 붙이는 사람됨의 보증처럼 쓰인다. 하여 '귄있다'는 말은 내면의 아름다움까지 아우른다.
- 66쪽, 전라도 말에 담겨 울리는 것은...

출판기념회에 모인 사람들의 귄이 넘쳤다. 배일동 명창의 판소리와 장흥 막걸리, 흑산도 홍어, 광산 무공해 포도와 함께 시골영감 팔순잔치처럼 흥겨웠다. 저자의 고향 선배 조충훈 순천시장은 물론 경상도 출신의 박원순 서울시장, 강원도 출신의 김우영 은평구청장, 부산 출신의 김영배 성북구청장 등 여러 지역 출신 단체장들과 다양한 언론인, 기업인들이 저마다의 사연으로 전라도 일화를 풀어 놓으며 웃고 떠드는 재미난 자리였다. 2000년 10월 15일 웹진으로 시작한 토종잡지 하나가 이름 없는 할매와 할배들의 적나라한 입말로 고스란히 담아 놓은 즐거움을 한 권으로 압축한 이 한권의 책 덕분이었다. 촌스러운 책 한 권의 축제로 토정로의 금요일이 불타올랐다.

골골 섬섬 할매들 할배들과 마을에 관한 감상문으로 산, 들, 강, 바다, 갯벌, 풀길, 꽃길, 숲길, 굽이굽이 돌담길, 올망졸망 오일장, 흥으로 정으로 어울리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 속에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있다. 같은 전라도라도 산 너머, 강 건너 확연하게 달라지기도 하고, 나란히 이웃한 마을 문화들도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전라도 사람만이 느끼는 슬픔과 연민, 분노와 격정, 존경과 감사 같은 복잡 미묘한 감정의 기복도 고스란히 드러내지만 전라도의 감성은 이미 전국으로, 세계로 퍼져 있었다.

음식에는 ‘게미(개미)지다’를 즐겨 쓴다. 겉맛이 아니라 속맛, 한번 좋앗다가 마는 게 아니라 먹으면 먹을수록 자꾸 당기고 그리워지는 맛이 ‘게미진 맛’이다. 오래 묵은 장이나 묵은지, 고향 어머니가 손수 담근 된장으로 끓여낸 토장국 등에서 나는 웅숭깊은 맛이다. 가볍지 않은 감칠맛, 오래오래 입안에 남는 풍미를 ‘게미’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오지다’라는 말은 물질적인 풍요로움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만족감까지 느낄 때 쓴다. ‘징하다’라는 말은 어떤 한계나 도를 뛰어넘는 경우에 쓰는 말로 상황에 따라 부정적이기도 하고 긍정적이기도 하다.
- 67쪽, 전라도 말에 담겨 울리는 것은...

‘워넌히’, ‘가풋해’, ‘낫낫한’, ‘뽈깡’, ‘뽀짝’, ‘이무러운’, ‘깔끄막’, ‘베람빡’, ‘개안하다’. ‘싸묵싸묵’, ‘담박질’, ‘맬겁시’, ‘아심찬하다’, ‘쓰잘데기’, ‘징허다’, ‘몰똑하다’, ‘보듬다’, ‘질나다’, ‘개리다’, ‘갈아주다’, ‘팽야’, ‘지까심과 시동’. ‘그라제’, ‘솔찬허시’, ‘허벌나다’, ‘암시랑토 안혀’ … 전라도 출신에게는 향수의 풍요로움이 귓전에 머무는 듯 애틋하고, 타지인들에게는 영랑의 시를 낭송하는 듯 낯선 전라도 입말들이 풍요로운 시어처럼 정답다. 전라도는 본디 오랫동안 핍박을 받아온 땅이라 주눅 들어 살아온 세월을 무시할 수 없지만, 그 어디에도 없는 감수성과 진한 향수로 완성된 촌스러운 지방이었다. 남도의 땅과 바다를 터전으로 소박하게 살아가는 촌스러운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하며 그들의 정서와 문화를 한 권으로 담아낸 ‘전라도, 촌스러움의 미학’은 그렇듯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책이 아니다.

"시아재 두울에 시누이가 두울. 상할머니, 어머니, 우리 내우간에 애들... 그렁게 열 식구가 넘제. 거그다가 개도 있구 소도 있구. 지금 사람들은 못 산당게. 그렁게 우리 딸들은 큰아들한테는 안 줄라고 했등마 전부 큰메느리가 돼버리등마. 둘째아들한테 시집가도 그집 큰아들이 죽어서 어른 모시고 살고, 넷째에게 줬는데도 결국 큰메느리 노릇하고 살아."
- 155쪽,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 최규순 아짐의 쑥개떡 만드는 현장에서...

쫀득쫀득 맛난 쑥개떡을 대물림해 온 취재 현장에서 침이 고이는 탐스러운 사진과 더불어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 놓는 최규순 아짐의 시집살이와 자식 얘기, 열일곱에 지아비와 눈 마주치고 삼 년 걸려서 시집온 인생은 웃프도록 서러우면서도 정겨운 이야기를 남겼다. 표준말로 기록한다면 도무지 그 정서와 감흥이 전달될 수 없으리라. 비옥한 곡창지대로 복 받은 전라도 땅은 어디까지나 평화로울 때 일이다. 그러한 이유로 더욱 모질고 악랄한 수탈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던 전라도의 아픔은 조정래 대하소설 ‘아리랑’을 비롯한 수많은 문학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해방과 전쟁을 겪고 난 후 근대화의 그늘을 지나는 동안에도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던 불행한 땅에서 감내해야 했던 엄니들의 눈물겨운 삶은 먹거리를 통해 전해온다. 허기를 달랠 그 무엇이라도 찾고자 땅과 바다를 고르고 씻고 다듬어 자식들을 키워낸 위대한 손길 안에서 전라도의 맛이 탄생한 것이다. 수수하고, 한결같은, 웅숭깊은, 검소한, 투박한, 인정미의 미덕이었다.

"오메, 오니라고 되겄네. 앙거봐. 근디 호박 깍음시롱 솥에다가 넣고 불 땐 것도 보고 그래야흔디 으짜까."
"맹그는 걸 다 볼라문 일찍 와야 흔디."
"도매(도마)랑 갖다 놓고 요것을 잘라서 아까매니로(아까처럼) 해보까?"
열대여섯 명의 아짐들이 마을 회관 부엌방에 둘러앉았다가 한꺼번에 인사말을 건넨다. "천천히 와도 된다"하시던 홍국식 이장님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게 탈이다. 손수 음식을 장만하는 아짐들과 기다렸다가 먹기만 하는 아재들 사이엔 적어도 한 시간쯤 시차가 있었던 게다.
- 본문 185쪽, 화순군 춘양면 우봉마을 할매들의 호박죽 만드는 현장에서...

영랑 생가 담벼락에 핀 능소화와 초가 옆으로 우뚝 선 은행나무의 풍경이 눈에 선하다. 다산 유배시절의 주막집 노파 인심이 귤동떡 할매가 가져다 준 묵은지와 갓 담은 깻잎지의 인심으로 시작된 이 책에는 고흥의 오일장, 화순의 산골마을, 보성 벌교의 뻘, 장흥 남포마을 방파제, 진도와 우도, 칠전팔기로 고향집을 되사서 돌아와 문학을 꽃피운 김도수 시인의 사연, 서른여섯에 청상이 된 어머니를 향한 미안함, 대인시장 닭집 주인 곽일님 아짐이 그린 닭 그림의 사연 등이 맛깔나는 글과 아름다운 사진들이 쏟아져 나온다. 촌스러운 삶은 정직하고 성실하고 아름다우며, 한데 어울려 구김 없이 쾌활하고 세상의 모든 생명에 따뜻한 연민을 품는다는 주장에 숙연했다. 허장성세 따위에 현혹되지 않고 알토란같은 속내만을 드러낼 줄 아는 담박한 성정으로 재정의 되는 당당함은 ‘촌스러워지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도전인가를 거듭 강조한다. 참으로 웅숭깊다.

“여름에는 남풍만 분게 요놈(뻘)이 까라안져서(가라앉아) 뻘이 틉틉해지거든(탁하고 진해지거든). 그런게 모세(모래)가 없어 뻘이 그렇게 좋아. 겨울에는 북풍이 분게 이것이(뻘이) 배깨져불고, 그래서 옛날에는 한나도 뻘 찐 것이 없어. 그런디 지금은 사방데서 막어가지고 물심이 없어. 쩌어기 백수로 어디로 다 막아버렸능가 안. 물이 왔다 갔다 해야 뭔 꼬랑(고랑)도 생기고 어찌고 하는디 다 미어져(메워져) 불었어. 그렁게로 무장(점점) 뻘이 쪄서 포도시 댕개(다닌다니까).”
- 324쪽, 영광군 염산면 두우리 선홍택 아재의 삶터에서...

저자는 아름다움의 회복을 갈망하는 행동하는 양심이다. 불쌍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람들이 지천에 널려 있는 세상이 짠해서 앞장서는 전라도의 아들이자 전라도의 아버지다.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달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고뇌하는 표정 속에서도 간간히 미소를 잃지 않는 실천하는 지식인이다. 출판기념회에서 정성스럽게 사인하던 앙상한 손가락과 비쩍 마른 그 모습을 떠올리면 참으로 마음이 짠해진다. 한 권의 책이 결코 한 권이 아니고, 한 사람이 결코 한 사람이 아닐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가슴 적시는 촌스러움의 전라도 민속촌을 읽었다. 말미에 첨부된 전라도 오일장 일정을 참고해서 올가을 남도 여행을 결행한다면 더 없이 좋은 추억이 될 것 같다.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 계절에 한없이 촌스러운 전라도 땅을 밟고 싶다. 그립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사교적인 생활인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書三讀의 실천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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