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스팸메일 속에 파묻혀 있던 메일이 눈에 띄었다. 예전에 제주도 바람카페의 손님이었던 소혜씨의 남편 현진식 감독이 보낸 메일이었다. 메일을 받고 생각해보니 내가 움직이고 있는 커피 여행을 영상으로 남겨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미팅은 소혜씨가 사무실을 쓰고 있는 망원동의 건물 옥상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커피를 준비하고 소혜씨와 그의 동료 소영씨는 몇가지 음식과 와인을 준비했다. 우리는 햇빛이 쏟아지는 옥상에서 음식과 와인을 먹고, 커피를 내려 마셨다.

현진식 감독은 제주도 서귀포가 고향이다. 그런데 제주도에서는 한번도 못보고 망원동 옥상에서 처음 만났다. 몇가지 이야기를 하고 몇가지의 원칙을 정한 후에 다큐를 촬영하기로 했다. 몇 가지 원칙에는 촬영을 위해 인위적인 연출을 하지 않는다, 여행 일정에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정도였다.

예전에 TV 방송 출연을 해본 적이 있었는데 그땐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는 요구가 너무 많아서 힘이 들기도 하고 짜증도 났었기 때문이다. 다큐멘타리를 찍으려면 긴 시간을 함께 해야 하는데 그런 일들이 생기면 너무 힘들 것 같았다. 나 또한 감독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가능하면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커피 여행은 내 것이지만, 영화는 감독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재료를 어떻게 요리할 지는 요리사의 마음이다.

첫번째 촬영은 며칠 후 의정부에서 진행했다. 의정부 문화발전소의 황현호 소장이 몇명을 불러 같이 저녁식사와 커피를 마시자는 연락이 왔는데 그날 처음으로 같이 동행을 했다. 일종의 테스트 촬영이었다.

카메라가 앞에서 있으면 어떻든 긴장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행히 이미 몇 번 얼굴을 본 사람들이 같이 있어서 편하게 촬영이 시작됐다. 사진작가인 김성종 선생님이 얼마 전부터 배운 이탈리아 요리 솜씨로 스파게티를 만들었고, 황현호 소장은 유기농 콩으로 만든 일명 ‘마약두부’란 걸 주문해서 가지고 왔다. 몇 잔의 막걸리가 돌고 또 몇 잔의 커피가 내려졌다. 좁은 방에서 여러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먹고 커피를 마셨는데 무척 재밌고 즐거웠다.

카페라를 든 현 감독은 그냥 있는듯 마는듯 촬영을 했다. 사람들도 처음에는 카메라 앞이라 긴장을 했지만 또 어느새 편안하게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밖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스파게티와 두부와 커피로 배를 채운 우리들은 2차로 근처에 있는 지인의 초벌구이 고기집으로 갔다. 고기와 소주를 배불리 먹고서 나는 또 커피를 내려야만 했다. 아직 커피를 제대로 못마셔봤다는 식당 사장 내외와 여전히 맛있는 커피가 고프다는 모임 참석자들이 계속 커피를 원했기 때문이다.

커피의 매력은 어울림이다. 달콤한 케이크와 마시는 커피도 맛있고, 스파게티와 두부를 먹고 마시는 커피도 맛있고, 고기와 소주를 먹은 후에 마시는 커피도 맛있다. 그래서 커피를 들고 다니는 커피 여행자는 어디서든 환영을 받는다. 그게 커피의 매력이자 커피의 힘이다.

첫날 카메라 테스트 겸 촬영은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현 감독은 시간이 날 때마다 커피트럭 여행을 따라 다니면서 2014년 8월부터 2015년 11월까지 일년 반 정도를 함께 다니면서 촬영을 했다.

현진식 감독은 재능이 많다. 촬영과 편집을 모두 하고 있고, 파울로시티라는 밴드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다. 다큐 촬영이 한창이던 2014년 11월에 ‘님아 그강을 건너지 마오’가 개봉되어 소위 ‘대박’이 났는데, 현 감독이 그 영화의 편집감독이다. 영화 촬영 기간 중에는 다음의 뉴스펀딩(현 스토리펀딩) 으로도 촬영 후원을 진행했다. 목표액에는 다소 못 미쳤지만 뉴스펀딩 기간 중에 다음 메인에 많이 노출이 되어서 홍보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특이하게도 영화는 흑백이다. 감독은 아예 촬영할 때부터 흑백으로 촬영을 했다. 덕분에 진한 커피의 향이 물씬 풍기는 영화가 됐다. 2016년 겨울과 봄에는 편집작업과 음악작업을 진행했다. 그 촬영의 결과가 다큐멘타리 영화 ‘바람커피로드’다. 이번 9월 22일부터 29일까지 열리는 제 8회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한국다큐쇼케이스로 상영이 된다.

영화는 한잔의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잔잔하게 흘러간다. 내 여행이 그렇듯 갈등도 없고 로맨스도 없다. 그래도 심심하지는 않다. 그것이 바로 바람커피로드의 매력이 아닐까?

이담 login@naver.com 커피트럭 여행자. 서울에서 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제주로 이주해서 10년 동안 산 경험으로 ‘제주버킷리스트 67’을 썼다. 제주 산천단 바람카페를 열어서 운영하다가 2013년에 노란색 커피트럭 ‘풍만이’이와 함께 4년째 전국을 다니며 사람들과 함께 ‘인생의 커피’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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