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최근에 읽은 고전은 무엇인가? 읽지 않았는데도 대략의 줄거리를 꿰차고 있어서 읽었다고 착각하는 책이나, 처음 읽는 책인데도 옆 사람이 물으면 표지를 보여주면서 “응. 다시 읽는 중이야.”라고 대답하게 될 것 같은 그런 책 말이다. 이탈로 칼비노는 처음 읽을 때조차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 느낌을 주는 그런 책이 바로 고전이라고 말했다. 청소년기에 요약본으로 처음 접한 러시아 문학은 특히 그런 착각을 줬는데, 청년에 완역판으로 다시 만난 톨스토이는 여전히 훌륭했지만 중년에 도스토옙스키를 재독한 뒤로 살짝 시시해졌다. 그것은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으나 교과서에서 강조한 문화예술 그 이상을 발견한 기쁨이었고, 영웅이라 배웠던 나폴레옹이나 콜럼버스가 결코 모범적인 사람이 아니란 것을 깨우치는데도 도움을 주었다.

‘죄와 벌’은 나폴레옹을 동경하는 가난한 청년이 전당포 노파를 계획적으로 살해한 뒤에 펼쳐지는 13일 동안의 이야기다. 그 짧은 시간 동안의 사건이 꽤나 두꺼운 장편 소설이 된 까닭은 전 생애를 바쳐 인간의 신비를 풀고 싶었던 집요한 영혼의 분석자가 매 순간들을 치밀한 심리묘사로 정교하게 서술했기 때문이다. 오종우 교수는 19세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가련한 인생들을 21세기 서울의 한 대학 강의실로 초대하여 여럿이 함께 읽는 수업을 진행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죄와 벌’은 다들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고전에 대한 착각이었음을 자각하고, 그 작품을 통해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었다고 했다. 시중의 번역서 두 종과 러시아 원전을 비교해 가며 진행된 그 소중한 수업은 예상하지 않았던 상황 때문에 속기록을 필요로 하게 되었는데, 결국 한 권의 대중서로 출간되는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늘 혼자 읽던 습관에서 벗어나 마치 그 수업의 청강생이 된 심정으로 ‘무엇이 인간인가’라는 책을 펼쳐 놓고, 서가의 ‘죄와 벌’을 꺼내 다시 읽게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나?!”라는 말이 나왔다. 특히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읽다 보면 누구나 불쑥 내뱉게 되는 이 표현은 아주 역설적이다. 인간이 그럴 수는 없다는 뜻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내용은 인간이 그렇다는 것을 담고 있다. 인간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지만 그럼에도 그럴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우리를 무척 당황스럽게 하는 참으로 묘한 존재라는 뜻이다. 그것이 능력이건 윤리건, 좋건 나쁘건 간에, 이 표현을 종종 쓴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나”하고 - (무엇이 인간인가 31쪽)

19세기 중반, 7월의 저녁 7시가 지난 시간에 로쟈는 페테르부르크의 한 전당포 노파와 그녀의 여동생을 살해한다. 생활고에 시달려 휴학 중인 이 가련한 법대생은 사회악인 노파를 죽이고 그 돈을 빼앗아 학업을 마치고 나중에 전 인류와 공공의 사업을 위해 헌신하는 나폴레옹 같은 위대한 인간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전에 계획된 일의 결행으로 하숙집에서 있었던 일상의 대화나 어머니가 보낸 장문의 편지나, 친구를 찾아갈까말까 갈등하는 과정을 읽지 않고서는 결코 몰입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작품의 도입부를 집중해서 이해하고, 책의 리듬과 글의 흐름에 빠져들어야 진정한 독서의 근력 키우고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는 조언처럼 말이다.

전당포 답사를 다녀오던 날, 아버지의 유품인 시계를 맡기고 들른 허름한 선술집에서 마음을 끌어당기는 한 인물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살인계획을 정당화시켜가는 과정도 흥미롭다. 마르멜라도프는 전처소생의 딸 소냐가 매춘부가 되어 가정을 책임지는 현실을 괴로워하지만 실직한 무능한 가장으로서 자괴감에 빠져들 뿐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로쟈는 술집에서 처음 만난 무기력한 극빈자를 부축하여 안전하게 귀가시켜줄 뿐만 아니라, 주머니의 돈을 모두 창턱 위에 놓고 나온다. 거지가 전재산을 털어 또 다른 거지를 돕는 꼴인데, 절망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기희생을 실천하며 묘한 구원자 코스프레를 시작하는 것이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는데, 이건 진리입니다. 술타령이 미덕이 아니라는 것도 내 잘 알고 있지만, 이건 더 말할 나위도 없는 진리지요. 하지만 극빈이라면, 형씨, 극빈은 죄랍니다. 그냥 가난한 정도라면 아직은 타고난 감정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지만 극빈한 상태라면 아무도 절대 그럴 수 없지요. 극빈하면 지팡이로 쫓아내는 것도 아니고 숫제 사람들 무리에서 빗자루로 싹 쓸어 내지요, 괜히 더 모욕을 주려고요. 이것도 옳은 일이지요. 극빈한 상태에서는 그 스스로 자신을 모욕할 태세를 갖추니까요. 그래서 곧장 술집행이고요!” (죄와 벌 제1권 29쪽/무엇이 인간인가 36쪽)

21세기의 해설서와 150년 역사의 고전 소설 완역판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며 읽었다. 약간의 차이가 있고 일부 인물의 입장도 달라보였지만 전체적인 맥락의 차는 없어서 의미 있는 독서가 가능했다. 소설 속의 이야기를 나치의 유태인학살, 성 다미앤 드 뵈스테르 신부와 나병 환자들의 만남, 사회학자 조은이 25년 동안 서울의 빈민촌을 취재한 기록, 포드자동차의 노동문제, 세월호 참사를 겪었던 우리 사회의 갈등 등과 연결하여 설명하는 것도 적절했다. 에드바르 뭉크의 ‘불안’, 자크-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므스티슬라프 도부진스키의 ‘소냐를 향해 엎드린 로쟈’, 표트르 보클렙스키의 ‘기품 있는 두냐와 탐욕스러운 스비드가일로프’, ‘고결한 소냐’ 등 적절한 그림들을 활용하여 독자가 보다 쉽게 도스토옙스키를 즐길 수 있도록 편집했다. 단순하게 요약된 글을 읽으면 마냥 무책임한 존재일 뿐이지만 집요하고 장황한 묘사와 적절하게 덧붙여진 해설로 그 가련한 인물의 영혼 깊숙한 곳을 파고들어 독자가 보다 심란하도록 자극하고 도발한다.

“그는 도끼를 완전히 꺼낸 다음 양손으로 획 들어 올려 무슨 감각도 없이 힘도 들이지 않고, 거의 기계적으로 도끼 등으로 머리를 내려쳤다. (중략) 정확히 정수리였는데, 그녀의 키가 작은 까닭이었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지만 소리는 몹시 가늘었고, 아직까지 두 손을 머리 쪽으로 쳐들 여유는 있었지만 갑자기 마룻바닥으로 푹 주저앉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한 손에는 계속 ‘담보물’을 쥐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역시나 도끼 등으로 정수리를 있는 힘껏 한 번 더 내리쳤다. 피가 엎질러진 잔의 물처럼 콸콸 솟구쳤고 몸뚱어리는 뒤로 발라당 나자빠졌다.” (죄와 벌 제1권 143쪽/무엇이 인간인가 84쪽)

총 6부와 에필로그로 구성된 이야기의 제 1부는 살인의 동기와 결행 뒤의 사실들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더 이상의 사실과 진실이 필요할까 싶은 의구심을 들게 한다. 소설의 백미는 바로 지금부터다. 죄를 지으면 죄가 그 사람을 지배한다고 했다. 죄를 짓고 응당 처벌을 받는 단순한 형벌의 이야기가 아니라 범죄의 순간부터 이미 스스로 처벌을 받기 시작한 영혼의 몸부림이 시작된다. 독자는 괴로움과 비탄에 빠진 주인공의 반복되는 악몽과 잠 못 이루는 한 여름 밤의 고통에 말려들기 시작한다. 아무리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 시키려 해도 스스로 뉘우치지 않고 벗어날 방법이 없다. 일은 이미 시작 되었고, 죽은 노파는 살아 돌아오지 않겠지만 키득키득 웃는 모습으로 꿈에 나타나기를 반복하니 생활은 엉망진창이 된다. 마치 관음증 환자처럼 책장을 넘기는 관찰자로서의 독자는 자기 합리화와 그럴싸한 핑계에 동조와 동정을 보낼지도 모를 일이다.

어머니의 편지에서 그간의 어려웠던 집안 사정이 여동생 두냐의 약혼과 함께 잘 풀릴 것 같다는 소식을 읽을 때만 해도 눈물 흘리고 잠깐 갈등하는 듯싶었지만 결국 일은 터지고 수사가 시작된다. 친구 라주미힌이 병들고 지친 로쟈를 방문했고, 두냐와 약혼했다는 중늙은이 루진이 빈곤한 예비 처남을 찾아와 거드름을 피운다. 루진은 여러 가지 유식한 말들을 늘어놓지만 유행하는 사상을 자신의 생각처럼 마구 떠들며 도대체 속이 텅 비어있는 속물성과 지적 허영심만 드러낼 뿐이다. 악몽으로 갈등하는 로쟈는 만사가 귀찮고 마음이 초조하여 현실을 벗어나고자 투신자살을 계획하지만 그 마저도 용기가 없어 결행하지 못하고 더욱 초라하게 돌아선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수를 결심하지만 경찰서로 걸어가는 도중에 마차 사고로 쓰러진 마르멜라도프를 발견한다.

“가까운 사람에게 느닷없이 불행이 닥쳤을 때마다 항상 느끼는,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그야말로 진정으로 애석해하고 동정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느끼는 저 이상한 내적 만족감을 맛보면서 말이다.” (죄와 벌 제1권 326쪽/무엇이 인간인가 110쪽)

술집에서 비참한 자신의 집안 이야기를 고백하던 그에게서 로쟈는 묘한 위안을 얻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양심의 가책과 자기혐오에 시달리며 죽지 못해 괴로워할 때 진짜 죽어가는 그를 발견한 것이 야릇한 위안으로 다가오는 것 아닌가. 그는 어머니가 보내준 돈을 모조리 마르멜라도프 가정에 전해주며 불행한 죽음에 동정을 보내면서 스스로의 자신감을 회복한다. 집에 돌아오니 편지의 예고대로 어머니와 두냐가 와 있다. 무려 3년만의 가족 상봉임에도 반가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짜증을 내니 모녀는 당황한다. 반면, 친구의 여동생에 반한 라주미힌은 로쟈를 대신해서 모녀를 따뜻하고 쾌활하게 대한다. 두냐의 약혼자인 루진은 로쟈를 향한 적개심과 함께 형편없는 인격의 바닥을 드러내 보인다. 두냐와 악연이 있었던 스비드가일로프가 나타나고, 괴로움에 지쳐가던 로쟈는 마침내 소냐를 찾아가 모든 것을 고백하기로 결심한다.

정의로운 살인자와 고결한 매춘부의 만남이라고 해야 하나? 선술집에서 그녀의 아버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막연한 끌림이 있었던 로쟈는 소냐에게서 유로지비(고결한 바보)의 모습을 발견한다. 일종의 동질감에서 찾는 위안이었는데, 소냐는 그런 로쟈를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바라보며 자수를 권한다. 두냐를 찾아 상경한 스비드가일로프는 바로 옆방에서 우연하게 이 모든 것을 엿듣게 된다.

예심판사 포르피리는 로쟈의 논문에서 특이점을 발견하고 그가 범인이라고 확신하지만, 난데없이 나타난 페인트공이 자수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한편 마르멜라도프의 장례식장에서 로쟈를 향한 적개심을 품은 루진은 엉뚱하고 치졸하게도 소냐를 도둑으로 모함하여 창피주려고 했다가 실패한다. 카테리나는 소냐의 봉변을 지켜보며 심한 죄책감으로 미쳐가고 결국엔 폐결핵 악화로 죽어가며 용서를 빈다. 그 난동을 부린 루진은 이제 거론조차 되지 않는 하찮은 인물로 소설 속에서 소멸되고, 대신에 스비드가일로프가 전면에 등장한다. 그는 장례비용은 물론 졸지에 고아가 된 소냐의 이복동생들을 위해 조건 없는 후원금을 기탁한다. 호색한인 스비드가일로프는 로쟈의 비밀을 알고 나서 오히려 친절을 베풀고, 그 점을 이용해 두냐에게 다시 접근한다. 오빠의 안위를 걱정한 두냐는 권총을 들고 그를 찾아가 위협하지만 솜씨가 미숙하여 실패한다. 두냐를 향한 열정이 끝나는 지점에서 상실감에 빠진 그는 소냐에게 큰돈을 건네며 로쟈를 위해 쓸데가 있을 거란 말과 함께 아메리카로 떠난다는 말을 남기고 자살한다. 로쟈의 살인이 두냐의 살인을 유도하고, 두냐의 살인 실패가 한 남자의 자살로 이어지는 돌고 도는 불행 속에 수많은 번뇌와 후회가 교차한다. 범죄 사실을 뉘우치지 않고 변명만 일삼던 자기중심적 인물 로쟈는 결국 자수를 하고 6부가 끝난다. 에필로그는 시베리아에서 9개월째 유형생활을 하는 시점에 맞춰진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하숙집을 나와 무작정 강가를 거닐며 강 너머 풍경을 못 봤었던 그가 강 너머 풍경을 바라보며 드디어 잘못을 깨닫고 참회하는 모습을 그려준다.

“탁 트인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 저편 강기슭에서 노랫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드디어 로쟈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모습을 봤고, 들으면서도 듣지 못했던 소리를 들었다. 인간이 신비로운 까닭은 자기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이 무한한 것이다. 자기 안에 갇히지 않고 자기를 강화하지 않으면 자기가 넓어진다. 진정한 자기 긍정은 자신을 넘어서는 일이다. (무엇이 인간인가 252쪽)

푸시킨을 숭배했던 도스토옙스키는 동시대 러시아 귀족 톨스토이나 투르게네프와 달리 가난하고 못생긴 작가였다. 열등감과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매우 피곤한 이 남자는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 스물여덟 살에 사형선고를 받았고, 8년의 유형생활 끝에 석방되어 극우보수주의자로 변신한다. 순탄하지 않은 삶을 견뎌가던 이 지식인은 아내와 사별하고 악덕 출판업자에 걸려 원고 마감에 쫓기던 중 주변의 권유로 속기사를 고용한다. 마흔다섯 홀아비는 그렇게 스무 살의 속기사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를 만나 ‘죄와 벌’을 완성하는 것은 물론 여생을 함께하는 부부가 된다. 안나의 헌신적인 내조가 있었으나, 여전히 도박에 빠져 지냈고 지병인 간질에 시달렸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불행 끝에 세상을 떠났다. 대단히 신경질적이고 괴팍한 한 남자는 주변인과 스스로의 인생을 갉아 먹었으나 그 인생 자체도 결국 찬란한 문학이 되었다.

“산다는 건 회계장부를 만드는 일과 다르다. 손익계산서를 작성하는 일도 아니다. 수량을 세어 점수를 매기고 도표로 실적을 헤아리는 게 인생이 아니다. 산다는 건 한 점의 그림을 그리는 일과 같고, 한 곡의 노래를 부르는 일과 같다.” (무엇이 인간인가, 시작쪽 & 끝쪽)

누군가에 대해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던 밤에 그 사람을 살해하고, 경찰에 쫓기는 꿈을 꾼 적이 있다.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상황이라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을 후회하며 비탄에 빠진 마음으로 절규하다가 식은땀과 함께 악몽에서 깨어나 안도의 한숨을 쉬지만 더 이상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행이란 생각으로 새롭게 다시 하루를 시작하는 날의 기쁨은 그런 것이 아닐까? 고통스런 현실을 탓하고 싶을 때 종종 로쟈를 생각한다. 로쟈를 읽고,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오종우 교수를 통해 삶을 정면에서 직시하는 용기와 지혜로 읽고 또 읽었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관련 11권의 전문 서적을 집필하고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이다. 다양한 분야 여러 직업을 경험하면서 삶에 대한 애정과 추억이 많아 세상이 여전히 따뜻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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