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이는 마음에 일찍 잠이 깼다. 오늘은 드디어 수동운전에 도전한다. 6년동안 자동으로만 운전해서 다시 잘할수 있을지 걱정이다. 자동으로 렌트하려니 가격도 비싼데다 차종이 맘에 영 안든다. 오랫만에 수동운전해 보자 생각했다.
9시에 호텔앞에서 니코스를 만나기로 했다. 조그만 하얀 차가 도착한다. 니코스는 조르바스타일이 아니다. 아메리칸 지골로스타일이다. 머리까지 리차드기어처럼 곱슬머리를 어깨까지 길렀다. 키도 크고 잘생겼다. 쾌활해서 보자마자 사람을 편하게 만든다. 계약서를 써야하는데 차를 세울만한 마땅한 곳이 없어서 성곽옆 주차장으로 갔다. 반납할때도 이 주차장으로 오면 된단다. 계약서를 작성하고 니코스가 도심을 벗어나는 곳까지 운전해서 데려다준다. 압테라유적지에 갈거라 했더니 그방향으로 출발하기 좋은 곳에 데려다 준다.
쾌활한 니코스는 데려다주는 중에 별 이야기를 다한다. 이라클리오출신이라 한다. 이라클리오가 하니아의 5배 규모인데 하니아사람들은 이라클리오사람들만큼 행복하지 않단다. 그건 나도 느낀 점이다. 관광도시에 사는 사람들 행복지수는 낮은 편이다. 돈 펑펑쓰는 행복한 사람들만 보이니 본인신세가 갑갑한 법이다. 하지만 여행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모두 행복한건 아니다. 내가 아는 많은 여행중독자들이 우울에 시달리고 있다. 여행을 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행복할 사람은 어디서나 행복한 법이다. 행복하게 장수하는 마을에 가보면 마을을 벗어나본적이 없는 어르신들이 많다. 고생스럽게 돌아댕긴다고 여행자를 오히려 불쌍해한다. 행복의 기준은 남을 바라보는것이 아니다. 자신을 바로 봐야 행복해진다.
렌트비를 주려고 하니 잔돈이 없단다. 잔돈을 나중에 받아도 되는데 니코스는 차 반납할때 렌트비를 달란다. 디파짓도 안하고 풀카바로 보험들고 렌트비는 후불이라니 거기다 현금으로 낸다. 세상에 다시 없는 렌탈시스템이다. 니코스가 차에 대해 설명을 해준다. 스즈키 소형 신차란다. 신차구경을 못했나? 마일리지 쌓인걸 보니 36000이 넘었다. 렌트카가 그정도면 퇴역수준이다. 차가 나를 닮았다. 작고 귀엽고 이쁘고...늙었다. 절대로 젊지 않다. 본인이 아무리 젊다고 우겨도 실상은 늙은 것이 딱 날 닮았다.
니코스는 떠나고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1단넣고 엑셀을 밟는데 차가 뒤로 밀린다. 생각보다 엑셀을 세게 밟아야한다. 굉음을 내며 출발한다. 수동운전 못하는 애들이 많이 운전한듯 하다. 아이들링을 높여놓았는지 조그만 차가 힘이 넘친다. 2단에서 시속 60까지 부드럽게 올라간다. 신기하게도 수동운전이 자연스럽게 된다. 클러치에 왼발이 저절로 올라가고 걱정과는 달리 시동은 꺼지지 않았다. 수년간 수동운전을 하지 않았는데도 어렵지않게 되는걸 보니 머리는 과거를 잊어도 몸은 기억하나보다.
압테라유적지로 갔다. 압테라에 가기로 한건 순전히 박물관 묶음티켓때문이었다. 압테라에 대한 상식이 하나도 없는 상태인데 그냥 갔다. 표를 보여주고 들어갔다. 들어서는 순간 탄성이 절로 나왔다. 천상의 화원에 온줄 알았다. 온갖 야생화가 어우러져 내가 여기에 왜 왔는지를 잊고 꽃에 취해 놀았다.
정신을 차리고 유적지를 돌아봤다. 유적지 규모도 작지않다. 로마시대 유적지인 모양이다. 작은 규모의 원형경기장이 있고 로만배스가 있다. 크레타섬의 기구한 역사가 짐작이 된다. 지리적으로 로마 그리스 투르크 3대강국의 가운데 끼어 지나온 세월이 고스란히 보인다. 허물어진 유적지에 수놓은 화려한 천상의 꽃파티에 눈이 즐겁다. 도착했을때만 해도 나혼자 꽃에 취해 돌아다녔는데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온다. 다들 유적지보다 꽃속에서 사진찍느라 정신이 없다.
정신차리고 다음 목적지로 갔다. 내가 크레타섬에 온 이유는 사마리아계곡트래킹때문이었다. 5월에 계곡을 개방한다니 아쉽지만 계곡입구까지라도 가보고 싶었다. 오마로스까지 가는 산길은 꼬불탕거리지만 도로폭이 좁지않아 운전하기 어렵지 않다. 중간중간 있는 절벽동네들이 자꾸 차를 멈춰서 사진을 찍게 만든다.
사마리아계곡 입구에 왔다. 계곡트래킹은 강의 물이 빠져야 가능하단다. 아직은 눈녹은 물때문에 수위가 높아서 위험하단다. 입구는 막혀있지만 계곡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을 보니 아찔할 정도로 내려가는것이 보인다. 계곡트래킹은 못하지만 근처 트레일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 계곡트래킹은 2천미터고지에서 해안까지 이어지는 사마리아계곡을 따라 내려간다. 양옆에 우뚝선 산의 기세를 보니 자연앞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아직 닫혀있지만 구경온 관광객이 꽤 있다. 나도 어슬렁거리며 사마리아계곡의 기운을 느꼈다.
걸어서는 못가지만 차로 남쪽해안까지 가기로 했다. 소우기아로 내려가는 길에 고원을 지난다. 평화로운 전원이 펼쳐진다. 몇채 되지 않는 집들이 있고 사람들은 반갑게 손을 흔들어준다. 길에 왠 검은 돌들이 잔뜩 깔려 있다. 운전이 황당해지는데 자세히보니 갖가지 똥들이다. 소똥 말똥 염소통이 섞여 칼라풀하게 차도를 장식하고 있다. 내차 아래부분이 상상이 된다.
꼬불꼬불 내려오는 길에 계곡트래킹 표시가 있어 들어가봤다. 크레타섬에는 크고작은 산들이 많아 계곡트래킹코스가 많다더니 정말 그렇다. 산위까지 차도가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잘되어 있어서 등산은 별로 땡기지않는데 계곡트래킹은 할만한 코스가 많다.
작은 계곡인줄 알았는데 소우기아까지 이어지는 이리니계곡이라 한다. 입구에 있는 문닫힌 레스토랑이 하얀 카모마일로 덮혀있다. 나이를 알수없을 정도로 늙어 잘생긴 올리브나무가 나를 맞아준다. 하얀 카모마일밭에서 혼자 미니 삼각대 발빼서 열심히 사진 찍었다. 혼자놀기의 진수를 제대로 즐겼다.
드디어 소우기아해변에 도착했다. 남부해안의 비치는 광활한 바다에 면하고 있어서 우리나라 동해안같은 분위기다. 그냥 보기에도 수심이 깊어 보인다. 바람이 거칠어 파도가 높다. 날도 쌀쌀한데 수영을 즐기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리니계곡트래킹을 마치고 이 해안에서 수영도 하면서 놀면 딱 좋을듯 싶다. 이리니계곡트래킹은 지금도 가능한지 택시서비스하는 차들이 대기중이다. 크레타트래킹하러 오려면 한달은 잡고 와서 지내야 할듯 싶다. 해안트래킹까지 하자면 한달도 모자랄듯 싶다.
다시 차를 타고 서부해안으로 가려다 기가 막혔다. 길이 없다. 서부해안동네로 가려면 다시 꼬불탕 산길을 넘어야 한다. 큰 지도를 안보고 대충 갈 곳만 생각하고 왔더니 일정이 엉킨다. 서부해안으로 갔다가 바로스해변으로 가려면 또 산을 넘어야 한다. 8시까지 차를 반납하기로 약속했는데 여유가 많지 않다. 그냥 바로스로 갔다. 산맥을 또 넘는다. 꼬불탕길 운전하다보니 오늘 S코스 제대로 연습한다 싶다. 수동운전이 이런때 오히려 편하다. 1단과 2단을 적절히 사용하면 브레이크를 덜 밟아도 된다.
꼬불탕을 돌아돌아 산을 몇개나 넘었는지 모른다. 탁트인 바다가 보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근데 바로스해안까지 차도가 없다. 지도를 아무리 뒤집어봐도 길이 안보인다. 맵스미에 경로를 찾아보게 하니 경로없다고 나온다. 황당하다. 근처로 가는 길에 다른 볼거리 있나하고 기웃거리니 별것이 없다. 바로스는 크레타 서북쪽 정점에 위치하고 있다. 다시 지도를 보니 큰 산을 하나 넘어야 갈수 있는 해안이다. 카보니시선착장에 보니 바로스로 가는 크루즈광고가 붙어있다. 다시 보니 큰 지도가 보이는데 비포장길 안내도가 있다. 꼬마차로 비포장을 10킬로이상 가야한다니 아찔하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려니 억울하다. 바로스이정표를 따라 돌아돌아 비포장도로 입구까지 왔다. 드디어 비포장에 들어섰다. 속도제한 20킬로라고 떡 붙어있다. 달려보니 20킬로를 내기도 힘들다. 옆절벽에서 계속 떨어진 낙석때문에 도로는 자갈밭수준이다. 상대편에서 오는 차를 만나면 서로 양보해가며 손흔들며 별짓을 다하고 지난다. 바로스에서 나오는 사람들 표정이 좋다. 왠지 느낌도 좋다.
10킬로를 30분넘게 걸려서 드디어 크레타섬의 서북쪽끝에 도착했다. 감동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크레타섬의 끝에 서니 바람까지 세차게 맞이해준다. 주차장에는 차들이 생각보다 많다. 차를 세우고 자갈길을 걸어서 언덕을 넘었다. 입이 딱 벌어진다. 크레타에서 수많은 비치를 봤는데 최고다. 이번 크레타여행의 정점을 찍었다.
신이 자연이란 작품을 만들면서 온갖 구상을 다하신 모양이다. 자연은 항상 내 상상의 범위를 넘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미니삼발이로는 도저히 셀카의 각이 안나온다. 바람이 워낙 세게 불어서 미니삼발이는 계속 넘어진다. 상큼이 두명중 한명에게 찍어달라고 하니 두번씩 눌러서 잘 찍어준다. 프랑스에서 왔단다. 참하고 이쁘게 생긴 처자가 사진도 정성스럽게 두번씩이나 잘 찍어준다.
다시 언덕을 넘어서 주차장으로 왔다. 차를 몰고 나오는데 앞서가는 차가 비실비실 헤매며 가고 있다. 비포장 자갈길운전할때는 핸들을 가볍게 잡아야하는데 힘주어 잡으면 운전이 힘들다. 초보에겐 힘들 자갈길이다. 다행히 도로폭은 넓어서 추월하라고 비켜준다. 가볍게 추월해서 달렸다. 시속 20킬로로 달리는데 앞에 자전거 두대가 가고있다. 프랑스에서 온 상큼이들이다. 이쁜이들이 자전거도 잘탄다. 자전거 잘타는 젊은 이쁜이들이 부럽다. 돈으로 절대 살수없는 것이다.
한참가는데 걸어가는 커플이 보인다. 아까 들어갈때도 보았던 커플이다. 여전히 씩씩하고 당차게 걷고있다. 왕복 20킬로가 넘는 길인데 대단한 체력이다. 비포장이 끝날 무렵 배낭맨 젊은 청년이 보인다. 다리가 거의 풀려보여서 태워주까하다 말았다. 비포장이 끝나고 동네가 바로 코앞인데 성취감을 뺏는건 예의가 아니다. 더구나 꿋꿋하게 걷고 있다.
포장도로로 들어서고 드디어 고속도로가 나왔다. 속도제한 90킬로지만 백킬로로 달렸다. 10킬로 초과하고도 뿌듯하다. 스즈키가 작은데도 힘이 좋다. 오랫만에 수동운전의 진수를 맛봤다. 하니아로 들어와서 주유를 했다. 26유로 나온다. 며칠전 이라클리오에서 렌트했을때하고 기름값은 비슷하게 들었다. 오늘은 3백킬로정도 운전했는데 하도 꼬불탕 산길로 다녀서인지 기름소모가 더 된듯 하다.
니코스와 만나기로 한 주차장으로 갔다. 하니아시내는 이라클리오골목길보다 운전이 쉽다. 도로양쪽으로 주차한 차들이 있지만 도로폭이 넓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니코스를 기다렸다. 좀 있으니 니코스가 차를 몰고 왔다. 내가 느무느무 좋았다고 고맙다하니 니코스도 좋아한다. 니코스가 호텔까지 태워준다고 타란다. 니코스가 명함을 주면서 담에 크레타오면 찾으라 한다. 글쎄 올까? 세상은 넓고 갈곳은 느무느무 많은데 다시 오기는 너무 멀고 힘든 곳이다.
니코스가 한국에 그리스식당 있냐고 물어본다. 있긴한데 퓨전식이라 하니 한국가서 식당차릴까 한다. 그냥 웃고 말았다. 내가 요식업에 대해 뭘 알아야 말을 하지. 그냥 피식 웃으니 니코스가 다시 보자고 인사한다. 기약못하는 약속은 안하는 성격이라 또 그냥 웃었다.
니코스가 말한다.
Who knows?
그래 맞다.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아나?
허미경 여행전문기자(mgheo@nextdaily.co.kr)는 대한민국의 아줌마이자 글로벌한 생활여행자다. 어쩌다 맘먹고 떠나는 게 아니라, 밥먹듯이 짐을 싼다. 여행이 삶이다 보니, 기사나 컬럼은 취미로 가끔만 쓴다. 생활여행자답게 그날그날 일기쓰는 걸 좋아한다. 그녀는 솔직하게, 꾸밈없이, 자신을 보여준다. 공주병도 숨기지 않는다. 세계 각국을 누비며 툭툭 던지듯 쏟아내는 그녀의 진솔한 여행기는 이미 포털과 SNS에서도 두터운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