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에 눈을 떴다. 6시50분 차를 타려면 일어나야 한다. 근데 일어나기 싫다. 이불속에서 20분간을 천사와 악마가 씨름을 했다. 결국 일어났다. 후다닥 샤워하고 준비하고 나섰다. 아빌덕인지 진드기퇴치제 덕분인지 비염이 신기하게 약해졌다.
거리는 어젯밤 흥청대던 사람들은 하나도 보이지않고 청소부가 어젯밤의 흔적을 지우고 있다. 새벽공기가 상큼하다. 카페를 지나는데 왠 아저씨가 파이를 들고 나오는데 김이 모락모락 난다. 호텔서 쥬스한잔 마시고 나왔더니 군침이 확 돈다.
카페에 들어가니 아줌마가 분주하다. 방금나간 아저씨가 들고나간 파이 주세요. 아줌마가 끄덕끄덕하더니 메모지에 숫자를 잔뜩 적어준다. 파이라고 했더니 와이파이를 말하는줄 알았나보다. 와이파이 패스워드를 적어준다. 먹는 파이하고 카푸치노 달라구요. 아줌마가 아하하며 웃는다. 올드타운에는 영어잘하는 사람들 많은데 조금만 벗어나도 영어가 거의 안통한다.
버스터미널로 왔다. 안내데스크에 아가씨가 앉아있다. 스타브로스가는 버스 물어보니 6시50분에 7번에서 타란다. 내가 고맙다하니 브라보란다. 이동네사람들은 브라보를 참 좋아라한다. 특히 버스터미널 직원들은 내가 지명을 정확히 발음해주면 신나서 브라보를 힘차게 외쳐준다.
표를 사서 7번 스탠드앞 테이블에서 치즈파이를 꺼내먹었다. 치즈가 아직도 따끈하다. 방금 구운 치즈파이와 카푸치노의 궁합이 환상이다.
버스가 한대 온다. 스타브로스가는건가 기웃대니깐 옆에 앉아있던 총각이 어디 가냐고 묻는다. 스타브로스간다니깐 지도 스타브로스간다고 넥스트라 한다. 말이 짧다. 영어가 짧은지 성격이 시니컬한건지 잘 모르겠다.
드디어 스타브로스가는 버스가 왔다. 아까 안내데스크에 앉아서 브라보를 외치던 상큼이가 표를 확인하고 태워준다. 먹던 치즈파이를 보더니 버스안에서 먹으면 안된단다. 어제 하니아오는 버스안에서 땅콩먹다가 안내양한테 혼났었다. 알아요 윙크로 답했다.
버스에 올라서 제일 앞자리에 탔다. 총각이 내 옆자리에 앉는다. 스타브로스까지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가는 동안 총각하고 한마디도 안했다. 기사뒷자리라 싸구려 남자향수냄새가 풀풀난다. 괜히 앞자리에 앉았다 싶은데 경치가 좋아서 향수냄새는 잊었다.
스타브로스에서 내렸다. 총각은 마을안으로 홀연히 사라진다. 나도 어슬렁 걸어서 가다보니 조르바의 비치가 보인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찍은 어촌이 바로 여기다. 조르바카페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지만 영화장면을 캡쳐한 사진들을 구경할수 있다.
영화에서 광산이었던 산이 마을 바로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다. 바닷가를 산책하면서 깜짝 놀랬다. 제주도 지질공원수준의 바닷길이 쭉 이어진다. 색깔도 다양하다. 잘못 밟으면 바스러질까 조심스럽다. 마을을 막고 서있는 앞산때문에 8시30분이 넘어도 마을은 그늘지다. 사진을 찍어도 영 맘에 안들어서 마을을 어슬렁거렸다.
같이 버스를 타고온 총각이 청소를 하고 있다. 이동네 사냐고 물었더니 예스라 한다. 근데 왜 하니아에서 첫버스를 탓냐고 물었더니 엉뚱하게 얼론이라고 한다. 이론...영어를 못하는거다. 짧은 단어로 시니컬하게 답하니 왠지 조르바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이유는 영어를 못해서다.
나는 다시 동네구석구석 돌았다. 아직도 마을이 그늘지다. 앞산에서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다 목빠지겠다. 그래도 기왕에 온 조르바의 마을인데 여유있게 즐기자고 비치에 앉아서 남은 치즈파이를 먹었다.
총각이 청소하는 곳으로 차가 한대 들어오더니 사람들이 내리고 드르륵 드르륵 쾅쾅 공사소리가 난다. 여기 사는지 모르겠지만 이동네에서 공사하는 모양이다. 하니아에서 새벽차를 타고 들어와서 일하고 나가는 모양이다.
드디어 해가 산위로 솟아올랐다. 9시가 되어서야 비치에 해가 드리운다. 해변으로 가서 사진을 찍었다. 셀카를 열심히 찍고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날 찍는다. 왠지 포스가 느껴져서 내 카메라로 찍어 달라고 했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한다. 손짓으로도 대화가 통해서 사진까지 찍어달라니 놀라운 수화의 경지다.

강아지 산책시키는 아저씨가 인사를 한다.이란에서 노르웨이로 갔다가 그리스로 와서 정착했단다. 가족들은 와인하고 올리브농사 짓고 본인은 기술자란다. 뭐라뭐라하는데 무슨 기술인지는 못 알아들었다. 하니아까지 걸어갈거라 했더니 20킬로는 되는데 한다. 안다고 했다. 더 걸릴지도 모른다. 동네구경 다니다보면 빙빙 돌것이 빤하다. 중간에 재미없으면 버스타면 된다.
하니아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갔다. 포도나무농장이 나오는가 하면 올리브농장이 나오고 양떼가 풀을 뜯어먹고 평화로운 길이 이어진다. 양귀비와 엉겅퀴가 지천으로 피어있다. 올리브나무아래 양귀비가 흐드러져 있다. 멀리 조르바의 광산이 모습을 바꾸어서 나타난다. 비상용으로 가져온 우산을 꺼내들었다. 땡볕에 걸으려니 고역이다. 우산을 양산처럼 쓰니깐 걸을만 하다.
이동네 우편함이 재미있다. 집들이 드문드문 있어서 그런지 길모퉁이에 여러집 우편함을 모아 놓았다. 우체부아저씨는 한꺼번에 블락단위로 일을 처리하면 되겠다. 중간중간 작은 예배당을 세워놓았다. 걸어가니 예배당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며 걸었다. 걸어서 보는 즐거움이 바로 이런게 아닌가 싶다. 각자 다른듯 같은 모습들이다.

한참 걸어가다보니 왠 큰개가 쫓아온다. 내손을 으며 좋아한다. 개주제에 이쁜건 알아가지고 좋단다. 주인이 개를 부른다. 양들을 우리에 넣으며 아저씨가 인사를 한다. 한국에서 왔다니 신기해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행자에게 통상 묻는 말들이다. 아저씨가 앞쪽에 빌라를 가르키며 가서 커피나 마시고 가란다. 하니아까지 걸어가야해서 시간이 바쁘다 했다. 내일 또 오란다. 내일은 차를 빌려서 서쪽 해안등을 돌거라 했다. 초대는 감사하지만 사양했다. 여행자가 지켜야할 선이 있다. 여행중 타인에게 공짜로 얻어먹으면 안된다.
다시 열심히 걸었다. 동네가 끝나니 길은 해안으로 이어진다. 칼라타스비치가 나온다. 비치는 조그만 라군형이다. 바닷색이 예술이다. 라군안에 작은 섬이 있어서 화룡정점이다. 수영하는 아저씨가 손을 흔든다. 나도 손을 흔들다 멀쓱했다. 손을 흔든게 아니라 배영을 하느라 팔을 휘저은 것이다. 민망하다. 하늘보고 누워있으니 날 보진 못했을거다. 허공중에 손흔든 꼴이 되었다.
계속 걸었다. 혼자 걷는 길.
생각하면서 혼자 걷는 길
걷는 것은 힐링이다.
잡념은 사라지고 좋은 생각만 남는다. 인간사 잡념은 다 사라지고 배고프고 목마른 생각만 남는다.

하니아까지 절반넘게 걷다보니 배고파서 힘이 빠진다.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었다. 반이상 걸었으니 쉬면서 밥먹어야겠다. 마침 코라키스에 도착했다. 동네는 큰데 식당은 마땅하지 않다. 있어도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길모퉁이에 카페가 있어 들어갔다. –u네샐러드가 있어서 시켰다. 껄쭉한 발사미코와 올리브오일을 섞어서 드레싱으로 준다. 숙성한 발사미코는 향이 깊다. 제대로된 발사미코를 길에서 만난 카페에서 먹을수 있다니 감동이다. –u네도 제대로 삶아서 맛있다. 배고픔까지 보태져서 삼위일체다.
배를 채우고 다시 길을 걸었다. 크레타공대를 지났다. 바다가 보이는 경치좋은 언덕에 학교가 있으니 공부가 될라나 싶다. 학교근처라 젊은 학생들이 버스타느라 기다리고 있다. 버스탈까 잠시 망설이다 그냥 걸었다.
한참 가는데 어느 건물앞에 차들이 줄서 있다. 고등학생정도로 보이는 청소년들이 떼로 몰려나온다. 차들은 애들을 데리러온 부모님들이다. 그리스도 우리나라못지 않게 교육열이 대단해 보인다.
교차로에서 베니젤로스의 묘지표시가 크게 보인다. 몇군데에서 보던 표시다. 지나가는 학생에게 물어보니 1킬로미터정도 떨어져있다 한다. 돌아가더라도 한번 보고 가자 싶었다. 가보길 잘했다.
하니아가 내려보이는 전망좋은 위치에 묘지가 있다. 하니아를 볼수있는 최상의 전망일듯 싶다. 이렇게 좋은 자리에서 잠자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묘비를 읽어봤다. 크레타독립에 기여한 혁명가이자 정치인이란다. 그리스역사에 아주 많이 중요한 사람이란다.

전망좋은 베니젤로스묘지에서 해안가를 향해서 꼬불꼬불 내려왔다. 해안으로 내려서자 또다른 절경이 펼쳐진다. 으슥하고 인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못볼것을 봤다. 왠 남정네가 땡볕에 바닷가 경치좋은곳에 나체로 앉아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않고 명상하듯 앉아서 책을 읽고있다. 지가 무슨 포세이돈이라고 포도잎도 하나 걸치지않고 바다를 품고 앉아있다. 얼른 지나가면서 옆눈으로 계속 봤다. 내가 지나가던말던 쳐다도 안본다.
절벽길을 따라서 한참 가니깐 작은 교회가 나온다. 왠 아저씨가 다리를 절며 오더니 뭐라뭐라 한다. 한마디도 못알아듣겠는데 손가락 두개를 비비는 것이 돈을 달라는 것이다. 구걸도 별스럽게 한다. 무섭기도 해서 후다닥 걸어서 마을쪽으로 갔다.
드디어 하니아에 도착했다. 바닷가 산책로를 따라 이쁜 카페들이 줄지어 있는 항구에 들어섰다.
해안 모래사장에는 쌍쌍이 쪽쪽거리고 난리도 아니다. 젊은 것들이 해안가 경치에 어울리게 그림처럼 드러누워있다. 물색은 환상이다. 그 물에 들어가는 사람들 모습도 환상이다. 유럽인들이 여름 휴가철에 지중해 섬으로 날아오는 이유를 알겠다.

다리가 뻐근한걸 보니 20킬로이상 걸었나보다. 차도로 16킬로인데 해안가와 마을을 왔다갔다 했으니 상당히 돌아왔다. 사마리아계곡 트래킹을 못해서 아쉬웠지만 크레타의 속살을 본듯 뿌듯하다.
호텔에 들어와서 샤워를 하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죠지아가 방문을 두드린다. 스타브로스에 잘 다녀왔냐고 묻는다. 버스시간 등 알려줘서 너무 고마왔다고 인사했다. 피레우스가는 페리표를 사야한다니깐 여행사에서 사지말고 아네크사무실에 가서 직접 사란다. 전통시장 맞은편에 있단다. 저녁은 어디가서 먹을거냐고 묻는다. 그러고보니 배가 고프다. 생선 먹고싶다 했더니 식당을 소개해준다.
먼저 아네크사무실에 가서 페리티켓을 샀다. 아네크는 블루스타보다 더 큰 페리인지 2인실하고 싱글캐빈이 있다한다. 하룻밤 자고 갈거라 여성용 4인캐빈으로 했다. 모르는 사람하고 단둘이 자는것보다 4명이 자는게 더 낫다.
식당을 찾다가 너무 멀리왔다. 설명을 잘못 알아들었다. 피곤해서 환청이 들렸나보다. 가만 기억을 되돌려보니 스타벅스에서 왼쪽으로 돌라고 했던것이 생각났다. 다시 돌아서 식당을 찾았다. 주인추천메뉴를 시켰더니 양이 많아도 너무 많다. 누굴 돼지로 아나보다. 해물이 싱싱하긴한데 맛은 그냥 그렇다. 양에 질려버렸다. 해물 좋아하는 나의 조르바가 그립다.

허미경 여행전문기자(mgheo@nextdaily.co.kr)는 대한민국의 아줌마이자 글로벌한 생활여행자다. 어쩌다 맘먹고 떠나는 게 아니라, 밥먹듯이 짐을 싼다. 여행이 삶이다 보니, 기사나 컬럼은 취미로 가끔만 쓴다. 생활여행자답게 그날그날 일기쓰는 걸 좋아한다. 그녀는 솔직하게, 꾸밈없이, 자신을 보여준다. 공주병도 숨기지 않는다. 세계 각국을 누비며 툭툭 던지듯 쏟아내는 그녀의 진솔한 여행기는 이미 포털과 SNS에서도 두터운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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