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숙소라 퇴실할때 원래 상태로 해놓는것이 예의다. 내짐을 정리하고 모든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바지 두개랑 셔츠 하나를 또 버렸다. 가방이 한국서 올 때보다 반으로 줄었다. 버릴 옷들을 가져와서 점점 짐이 줄고 있다. 근데 아직도 안입은 옷들이 있다.
일찍 나오느라 열쇠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나왔다. 집주인에게 잘지내고 간다고 메시지 보냈다. 주인도 고맙다며 나의 무사안녕을 빌어준다. 집을 나와서 버스터미널로 가는데 아침마다 인사나누던 고양이가 담장위에서 졸고있다.

터미널로 와서 하니아가는 버스표를 샀다. 버스에 짐을 싣고 올라타서 제일 앞자리에 앉았다. 서쪽으로 가는 길이니 오른쪽 전망이 좋을거라 오른쪽에 앉았다. 차장이 와서 표를 검사한다. 버스는 작은 마을입구마다 서고 사람들이 내리고 탄다. 차장이 몇번 바뀐다. 바뀔때마다 와서 표검사를 한다. 제일 앞자리에 앉은 보람이 있다. 달리는 내내 경치를 파노라마로 즐겼다.
이태리 아말피로드를 개인적으로 좋아하는데 버스창밖으로 계속해서 아말피로드 분위기다. 요즘 뜨고 있는 친퀘떼레 마을이 여러 개 이어서 나타난다. 북부해안은 남부해안보다 이쁜 마을이 더 많다. 크레타섬 인구의 대부분이 북부마을에 모여사는 듯 보인다. 육지에서 연결되는 배편이 다들 북부로 집중되어있는 까닭인가보다.

중간에 레팀노에 도착했다.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레팀노가 이쁘고 작은 시골마을이라고 했던 것이 기억나서 기대했던 동네다. 실망했다. 번잡한 도시다. 버스정류장도 큰편이라 버스에서 사람들이 많이 내린다. 10분 정도 쉬었다 버스는 다시 출발한다.
여행자들이 흔히하는 거짓말이 있다. 남들이 가지않은 여행지를 환상으로 장식하는 것이다. 거짓말을 하려고 하는것보단 스스로 최면에 걸리는 것이다. 주관적인 감정이 개입되어서 남들이 안가본곳을 과대포장하는 면이 있다. 그런 정보를 듣고 무조건 갔다가는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여행정보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일정을 짜는 것은 본인의 몫이니 잘 판단해야 한다. 나도 일기를 쓰지만 여행지에 대한 판단은 주관적인 면이 있다. 객관적으로 여행지를 표현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버스는 드디어 하니아에 도착했다. 주소를 가지고 호텔을 찾는데 난감하다. 할리돈거리에 왔는데 건물에 주소들이 표시되어있지 않다. 1번지부터 하나하나 세어서 겨우 찾았다. 아파트형숙소는 외로워서 이번에는 도심호텔로 선택했는데 찾고보니 황당하다. 리셉션도 없다. 전화번호가 걸려있어서 전화했더니 주인이 왔다. 젊고 씩씩한 젊은 여자다.

구도심의 옛날 건물을 개조한 분위기좋은 부틱호텔이다. 내방은 베란다가 달린 방이다. 방이 너무 좋아서 3박하겠다고 했다. 티룸이 별도로 있다. 에스프레소머신이 있어서 일단 커피부터 한잔 진하게 뽑았다. 커피향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베란다에 나가보니 중심거리가 발아래 내려보인다.
밤에 나가도 무섭지 않을 곳이다. 집나가서 넘어지면 베네치안 항구다.

이것저것 알아볼겸 시내로 나갔다. 우리집 바로 옆이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4개 묶어서 6유로란다. 묶음으로 샀다. 규모는 이라클리온보다 작은데 내용은 못지않게 알차다. 기원전 3천년부터 기원전유물들이 전시되어있다. 그시절에 섬세한 도기들을 만들다니 놀랍다. 양날도끼도 오늘 더 자세히 봤다.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르겠다. 이럴줄 알았으면 여고시절 세계사공부를 더 열심히 할걸 그랬다.

시내지도를 보니 성터가 있다. 성은 겨우 중간중간 흔적만 남아있다. 성벽위에 현대식 건물이 지어져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하니아의 골목골목은 이쁜 카페들과 가게들이 즐비하다. 골목 카페에 사진기세워서 셀카를 찍으려니 주인부부가 같이 찍잔다. 사양할 이유가 없다.

여행사겸 렌트카사무실에 가서 물어봤다. 여자가 무지 딱딱하다. 사마리아계곡은 아직 오픈안한단다. 4월말은 되어야 할거란다. 계곡물이 빠져야 안으로 들어갈수 있단다. 렌트카 가격은 싼듯한데 너무 무섭게 사무적이라 렌트할 마음이 달아난다. 산책하다 다른 렌트카사무실에 들어가 물어보니 친절한데 비싸다.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

호텔쪽으로 걸어오다 교회가 있어 들어갔다. 하니아 입성신고도 할겸 촛불을 밝혔다. 입구를 지키는 여인이 뭐라뭐라하며 고맙다한다. 기분이 좋다. 교회광장에 입간판이 서있다. 조르바의 어촌마을로 가는 길 투어안내가 있다. 거리를 재보니 20킬로가 안된다. 굳이 투어할 필요없이 혼자 걸어도 될듯하다. 투어팀에 끌려다니면서 설명듣고 여기저기 쓸데없이 들어가고싶지 않다.
일단 호텔로 왔다. 주인여자가 있다. 내일 조르바의 어촌마을에 버스타고 가서 걸어올거라 했더니 버스시간을 알아봐준다. 다음날 렌트카도 남편친구에게 부탁하면 된단다. 남편친구이름이 니코스란다. 내가 넘 좋아하는 이름이라 하고 같이 웃었다. 니코스와 조르바가 점점 더 좋아진다.
오늘은 푹 쉬려고 침대에 누웠다. 이상하게도 침대에만 누으면 비염이 도진다. 친한 의사샘에게 톡으로 여쭤봤다. 약국이나 마트에 가면 처방없이 아빌을 팔거란다. 사먹으란다. 그냥 참을려고 했는데 한번 도진 비염이 잡히질 않는다. 유럽의 가구들이나 집들이 오래되어서 집먼지진드기때문에 예민한 내 코가 타국에서 고생이 심하다.
아빌사려고 나왔는데 햇빛이 너무좋아서 약국은 안가고 등대쪽으로 걸었다. 항구광장에 터키식 하맘건물이 크게 자리잡고 있다. 베네치안시절에 공동하맘으로 사용했나보다. 지금은 문이 닫혀있고 유리창도 깨져있다. 건넌편에 진짜로 하맘이 있다. 터키에서 했던 하맘이 생각나서 웃었다.
여자때밀이를 요청했는데 남자가 나타나서 수세미로 빡빡 밀어주던 기억이 난다.
베네치안항구를 따라 노천카페들이 줄지어있다. 젊은 관광객들이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다. 젊은이 둘이서 사진찍는데 끼었다. 아들보다 더 젊은 친구들인데 여행지에선 친구가 된다. 영국에서 왔단다. 나도 영국에서 왔어. 5일 머물렀다 왔지. 같이 깔깔 웃었다.

등대까지 가는 길은 항구를 건너보며 걷는 길이다. 맞은편 보이는 항구가 그림처럼 아름답다. 해가 서편으로 넘어가고 도시는 황금빛으로 물이 든다. 등대뒤로 물드는 노을이 아름답다. 다시 방파제를 걸어 돌아왔다.

지도에 있는 약국을 찾아가는데 보이질 않는다. 다시 돌아가서 건물하나하나 자세히 보니 조그맣게 보인다. 카페나 기념품가게는 입구가 요란한데 약국은 찾기 어려울 정도로 숨어있다. 아빌과 진드기퇴치제를 사왔다.
진드기퇴치제를 침대 구석구석 뿌리고 아빌을 먹으려고 보니 난감하다. 영어도 독일말도 없다. 오직 그리스어로 적혀있다. 까막눈신세라 몇알을 먹을지 알수가 없다. 한국에 톡하기는 늦은 시간이라 다시 약국에 갔다. 하루에 3번 한알씩 먹으란다. 오늘은 먼지진드기하고 비염을 잡으면 좋겠다.

허미경 여행전문기자(mgheo@nextdaily.co.kr)는 대한민국의 아줌마이자 글로벌한 생활여행자다. 어쩌다 맘먹고 떠나는 게 아니라, 밥먹듯이 짐을 싼다. 여행이 삶이다 보니, 기사나 컬럼은 취미로 가끔만 쓴다. 생활여행자답게 그날그날 일기쓰는 걸 좋아한다. 그녀는 솔직하게, 꾸밈없이, 자신을 보여준다. 공주병도 숨기지 않는다. 세계 각국을 누비며 툭툭 던지듯 쏟아내는 그녀의 진솔한 여행기는 이미 포털과 SNS에서도 두터운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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