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크게 하나 될 이름... 전태일(全泰壹), 그 아들과의 약속을 위해 천사처럼 살다간 작은 여인 이소선(李小仙), 아름다운 인생을 예고한 두 이름의 주인을 조용히 불러본다. 청계천 피복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청년은 자신의 권리도 모르는 바보들을 규합하여 ‘바보회’와 ‘삼동친목회’를 만들고, 언론과 노동청을 수시로 방문하며 모범업체 설립에 인생을 걸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이름 없는 청년은 모든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고 궁지에 몰리자 그저 현실을 조롱할 뿐인 의미 없는 근로기준법 책 한 권을 들고 스스로 횃불이 되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외침은 하루하루를 힘겹게 죽어가는 노동자 스스로 인간답게 살아가라는 격려였을 뿐만 아니라 자본가에게도 보다 인간다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든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서울대를 시작으로 전국의 대학생들이 어머니와 함께 거리로 나왔고, 조국 근대화에 희생되며 말없이 순종하던 노동자들이 고개를 들었다. 7대 대선을 고작 165일 앞 둔 시점이라 야당은 정치 쟁점화에 앞장설 수 있었고, 대통령과 공화당은 노동 환경 개선을 처음으로 언급하고 약속했다. 전태일은 이름값 제대로 하고 떠났다.

'전태일 평전'의 역사 또한 기구했다. 시작은 서울대생 장기표였다. 그는 이소선 어머니를 취재한 두 권의 공책을 정리하여 자신보다 글을 더 잘 쓰는 친구에게 평전 집필을 부탁하고 수배를 피해 도망 다녔다. 역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익명의 저자는 감시를 피해가며 조심스럽게 어머니를 만나 인터뷰하며 3년 만에 탈고했다. 전태일 사후 6년 만에 원고가 완성되었지만 개발독재 시대에 그런 불순한(?) 노동자의 주장을 담은 책이 출판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1978년 11월, 손학규·김정남에 의해 일본에서 ‘불꽃이여 나를 태워라’가 처음 출판되었다. 작가는 김영기로 밝혀졌는데 가명이었다. 1983년 5월, 저자 이름을 특정하지 않은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같은 내용의 책이 한국에서 처음 출판되었다. 세월이 흘러 투병 중이던 저자는 지식인의 관점이 아닌 노동자 관점에서 평전을 다시 쓰고 싶다고 했다. 아울러 죽음을 미화한 것으로 읽혀지는 것이 괴롭다고 이야기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91년 1월, 개정판 '전태일 평전' 에 저자가 한 달 전 타계한 조영래 변호사라고 처음 공개되었다.

청옥 고등공민학교 다니던 짧은 날들을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하였던 시절’이라 기억하는 전태일은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지만 늘 책을 끼고 살았고 항상 배움에 목말라 있었다. 식모살이 떠나는 어머니 앞에 무기력했던 소년은 술주정하는 아버지로부터 어린 동생들을 보호해야 했고, 어떻게든 현실을 극복해 보려고 동생들을 데리고 가출하여 신문팔이로 세상에 다가갔다. 열심히 공부하여 반드시 대학에 들어가겠다는 결심도 했고, 지적 한계에 이를 때마다 대학생 친구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픈 기록도 남겼다. 하루 14시간 노동하면서도 꿈을 꾸며 먼 이상의 세계를 향해 포기하지 않고 도전을 거듭했다. 정직하게 반성하는 노숙 시절의 수기를 옮긴 평전을 읽노라면 감옥에 끌려가지 않은 것이 다행일 만큼 서글픈 소년의 참담함이 느껴진다.

얼마나 많은 밤을 그는 저 저주받은 현실과 자신의 버려진 목숨을 끌어안고 피투성이의 고뇌로 지새웠던가? 이제는 인륜마저도 잃어버린 죄인 - 아버지에게 반항하여 집을 뛰쳐나왔고, 어머니를 괴롭혔으며, 작은아버지의 시계를 훔쳤고, 차마 떨어지지 않으려는 어린 동생을 차디찬 서울의 길바닥에 다 내던져버린, 그러고도 구차한 목숨을 이어가려고 남의 동정을 구하여 구걸을 하는, 그 자신의 저주받은 목숨...... 때로는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도록 증오했다. 그러나 전태일은 이를 악물었다. (62쪽)

동대문 전태일 재단 인근에서 밥을 먹을 때에도, 청계천 버들다리 전태일 동상 앞을 지나칠 때에도 '부한 환경‘을 설정하고 고민했던, 어쩌면 내 친구의 아버지가 되었을지도 모를 그 짧은 인생에 숙연해진다. 청계천 피복노동자의 삶을 통계한 그의 집계는 탁상공론 노동청의 집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섬세하고 정확했으며 무학의 통찰에도 빛나는 근본적인 고민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벗어난 생각을 못한다. 바로 옆의 사람과 비교하고 질투하며 스스로의 인생을 푸념과 좌절의 수렁으로 유도하는 수동적인 삶을 살아간다. "평화시장 여공은 시집가도 삼 년밖에 못 써먹는다."는 말 역시도 인간을 기계처럼 소모시키는 현실을 비꼰 말이지만 더 이상의 진전은 없다. 열일곱 살 가을의 전태일은 자신보다 어린 여공들의 미래를 더 많이 걱정했다. 평화시장에 발 디딘지 2년 만에 처음 느끼는 노동자 전반의 억울함을 극복하기 위해 월급 7,000원 미싱사의 길을 포기하고, 보다 능동적인 역할이 가능한 재단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재단사가 좌지우지하는 노동현장을 극복하기 위한 헌신적인 선택은 집안의 가장으로서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참으로 미안한 전략이었다. 보조공부터 시작해야하는 재단사로 직업을 바꾸는 순간 월급 3,000원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누가 봐도 바보 같은 결정이었다. 재단사로 성실하게 일하는 동안 주변의 도움으로 첫사랑의 감정이 꿈틀거리지만 그것마저 사치라며 냉정하게 뿌리치는 수기를 남긴다. 뜨거운 신념의 청년은 폐병 걸린 여자 아이의 해고를 경험한 뒤, 어린 시다들을 먼저 퇴근 시키고 청소까지 도맡는 등 자발적 노동 환경 개선을 실천하다가 주인에게 거듭 혼나고 결국 쫓겨난다. 업주들은 전태일을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동료들도 만남을 꺼린다.

빨리 기술을 배워서 미싱사 언니들처럼 두툼한(?) 월급봉투를 집으로 가져가야지 하는 꿈에 잠시 가슴이 부풀기도 한다. 그러나 며칠 전에 어떤 미싱사 언니가 해준 말을 생각하면 또다시 맥이 풀린다. "...... 평화시장 여공생활 8년 만에 남는 것은 병과 노처녀 신세뿐이더라. 너만한 나이 때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일찌감치 평화시장을 빠져나가는 것이 현명한 일이야." (93쪽)

젊은 시절 대구의 방직공장 노동자로 활동하며 파업 전력이 있는 아버지 전상수는 무모하게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좌절한 아들에게 근로기준법의 개념과 노동자의 권익에 대해 가르쳐주고 세상을 떠났다. 법으로 보장된 근로조건을 쟁취하지 못한 자신과 평화 시장 일대에서 혹사당하는 노동자 모두들 바보라고 생각한 전태일은 자조적 이름 '바보회'를 조직한다. 어머니를 졸라 구입한 2,700원짜리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평생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바보회가 설립 초기에 해체되었지만 비관하지 않고, 주경야독하며 대통령을 향해 편지를 쓰는 등 더욱 열심히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고단함 속에서도 모파상과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며 진리 탐구에 매진했고, 구체적인 사업계획서를 작성하며 자본금 3,000만 원의 모범기업체 설립이라는 담대한 꿈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간다. 바보회가 해체된 일 년 뒤에 동대문 일대 피복노동자들을 규합하여 제법 규모 있는 삼동친목회를 조직하고 모두가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의 가치를 역설한다.

한 달에 두 번 쉬며 하루 14시간 근무하는 악조건 속에서 신경통과 위장병과 눈의 통증을 달고 살았지만 보건소 건강진단 한 번 받은 적이 없었다. 그렇게 일해 받은 월급 23,000원으로 책을 사고, 더 어려운 친구들을 위해 밥을 사고, 풀빵을 사고, 동생들과 어머니를 돌봤다. 자신보다는 평화시장 10대 소녀 노동자들의 미래를 더 아파하고 걱정하던 스물두 살 재단사 청년은 노동자들의 노동현실을 고발한 진정서를 들고 삼동친목회 동지들과 함께 노동청을 찾아간다. 실패를 거듭하다가 드디어 석간 경향신문을 통해 평화시장의 참담한 노동현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작은 성공이자 희망의 발견이었다. 모범업체 설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안구 기증까지 불사했던 청년은 플랜B,C를 구상하며 이상이 실현되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해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무엇인가 도모 할수록 좌절과 시련도 점점 많아졌다.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한 소설과 영화시나리오까지 집필했던 청년은 거듭된 실패에도 굽히지 않았으나, 마침내 넘어설 수 없는 벽 앞에서 스스로 횃불이 되어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결행했다.

“어머니 담대하세요. 마음을 굳게 가지세요. 그래야 내가 말을 하겠습니다……”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만은 나를 이해할 수 있지요? 나는 만인을 위해 죽습니다. 이 세상의 어두운 곳에서 버림받은 목숨들, 불쌍한 근로자들을 위해 죽어가는 나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은총이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조금도 슬퍼 마세요. 두고두고 더 깊이 생각해 보시면 어머니도 이 불효자식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 저를 원망하십니까?” 어머니는 웬일인지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흉하게 탄 아들의 얼굴에서 눈도 돌리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너를 이해한다. 어찌 원망하겠니? 원망하지 않는다.” (305쪽)

전태일, 그가 떠나고 46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시대의 고단했던 젊은 노동자들은 민주화 운동과 평화적 정권교체 등을 경험하며 세상이 참 좋아졌다고 이야기한다. 고난의 시대를 함께했던 평화시장의 재단사, 미싱사는 정보화 시대를 맞아 디지털단지에서 흔히 만나는 자부심 넘치는 프로그래머, 디자이너들로 세대교체 되었다. 부모 세대가 닦아 놓은 기반 위에서 조금 더 인간적으로 일하고 있는 듯 착각할 수 있지만 자본가의 힘이 더욱 공고해진 21세기 노동자의 일상은 여전히 고단하다. 5월 1일 노동자의 날은 그냥 하루 쉬는 날이 아니다. 전태일을 읽고, 조영래를 읽고, 독자 스스로 바보 노동자임을 읽어낼 수 있다면 가슴 깊은 곳에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미소 지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들을 이 만큼이라도 살게 해준 것은 위대한 권력자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 쉬는 노동 선구자, 끊임없이 부활하는 전태일 때문이 아닐까?

안중찬 ahn0312@gmail.com 장거리 출퇴근길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관련 11권의 전문 서적을 집필하고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이나 다양한 분야 여러 직업을 경험하면서 삶에 대한 애정과 추억이 많아 세상이 여전히 따뜻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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