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는 기록의 전당 알렉산드리아도서관에 갔다. 지중해를 등진 그 거대한 외벽에는 세상에 존재했던 다양한 글자들이 공존과 연대의 기억을 품고 불규칙하게 새겨져 있었다. 바깥 길을 따라 걷다가 반가운 한글 월, 강, 름, 세를 발견했는데 끝에 걸린 더 큰 두 글자를 조합하니 `세월`이 되었다. 2300년 세월 동안 인류사의 수많은 기록과 망각과 재생이 반복되는 그곳에서 만난 그 특별한 이름은 우리들에게 아픈 기억의 선물이었다.

그날은 타이타닉 참사 102주기의 다음 날이었다. 해양대를 갓 졸업한 입사 4개월차 혈기왕성한 삼등항해사는 청해진해운 소유의 거대한 배를 몰고 맹골수도에 진입하고 있었다. 세월호는 그 멋진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하부의 평형수를 제거한 과적 증축 정원 초과라는 불법의 3박자를 두루 갖춘 기가 막힌 선박이었다. 제주도로 향하던 476명 승객 중 304명의 희생자는 물론이고 살아남은 172명에게도 씻을 수 없는 아픔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단원고 2학년 박수현 군은 생의 마지막 순간을 15분짜리 동영상으로 남기고 떠났다. 아버지 박종대 선생은 매일 새벽, 아들의 책상에 앉아 그 휴대폰 기록을 기반으로 다양한 기록들을 우직하게 정리하며 1년을 보냈다. 한겨레21과 진실탐구의 노하우를 보유한 재단 ‘진실의 힘’이 그 아버지의 노력에 감동하여 체계적인 지원을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흩어진 진실의 조각들을 하나씩 찾아서 연결하고 조합하여 묵직한 책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세월호, 그날의 기록>은 단조로운 색상에도 불구하고, 세로로 흐르는 제목과 함께 의미심장한 바다의 느낌을 담은 표지부터 예사롭지 않은 책이다. 어두운 하늘로부터 짙은 바다로 이어지는 듯 해수면의 차가움이 느껴지는 디자인에 먹먹한 가슴으로 책을 펼쳤다.

전문 용어 설명과 함께 다양한 각도에서 선박의 도면, 사고 발생 과정의 요약된 지도, 사고 발생부터 침몰까지 101분간의 타임라인이 펼침면으로 한 눈에 들어와 편안하게 읽힌다. 선원 및 선박 회사와 해경 등 인적 구성을 조직도로 보여준 뒤 그들의 역할과 형량까지 일목요연하다. 수많은 도표와 주석들이 객관성의 바로미터가 되어 가독성 높은 편집으로 보기 좋게 잘 정리되었다. 승객들의 상황은 어떠했는지, 승객을 버리고 가장 먼저 도주한 선원들이 경비정에 옮겨 타고 해경들과 나눈 대화는 무엇인지, 해경과 관제실 담당자들과 청와대는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사고 소식을 들은 청해진해운은 무엇을 감추려 했는지 마치 영화처럼, 희곡처럼 생생한 직접 인용법과 함께 상세하게 묘사된다. 어린 학생들의 꾸밈없는 표현과 악의 없이 습관화된 천진한 욕설 등 정제되지 않은 순수성이 초반을 장식한다. 뒤로 갈수록 재판과정이 섬세하게 재구성되는 부분에서는 책임져야 할 사람들의 영혼이 없는 유체이탈 화법이 두드러지고, 위선이 점점 더 심화된다. 부분 삭제와 수정이 의심되는 녹취록과 같은 타락한 발언들이 토사물처럼 쌓여간다. 700여 쪽 두꺼운 책이 이렇게 술술 읽히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사고 발생 후 침몰까지 101분은 다음과 같이 요약 된다.

2014년 4월 16일 아침 8시 49분, 선수가 오른쪽으로 빠르게 돌면서 배가 좌현으로 기울자 3등 항해사 박한결(26, 징역 5년)이 선장 이준석(69, 무기징역)에게 전화를 걸려다 미끄러졌다. 이후에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구석에 찌그러져 울기만 했다. 같은 시각 교사 양승진(57, 실종)이 학생들과 과자를 먹으며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튕겨나가 바다로 추락했다. 8시 52분, 최덕하 학생이 119에 전화를 걸어 살려달라고 애원한 것이 최초의 신고전화였는데, 신고접수 과정은 엉망이었다. 선장을 비롯해 모두가 우왕좌왕 하는 동안 여객부 선원 강혜성(32, 생존)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방송했다. 8시 55분, 선원 강원식은 제주VTS에 사고 소식을 전했다. 8시 56분, 승객들이 스스로 구명조끼를 착용하기 시작했고, 목포 해경에도 사고가 접수됐다. 8시 58분, 목포해경 123정이 출동했고 3분 뒤 세월호와 교신을 시도했지만 그 역시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이 책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9시 정각, 기관부 선원들의 도주가 시작되었다. 9시 5분 선원 강혜성이 뒤늦게 구명조끼 착용 안내 방송을 시작했고, 112와 119, 122에 승객들의 구조 요청 전화가 폭주했다. 9시 19분, YTN 보도를 통해 사고 소식을 처음 접한 청와대는 해경에 전화를 걸어 다그치기 시작했다. 9시 21분, 청해진해운 물류팀장 남호만은 김정수 과장에게 화물량을 조작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본사에 나타난 김한식 사장은 멍하게 있다가 아무런 지시도 없이 기자들을 피했다. 9시 59분, 조업 중이던 인근 어선들이 몰려와 본격적인 구조작업이 시작됐다. 10시 21분, 마지막 생존자가 구조된 뒤 배는 선미가 하늘을 본 상태 90도 각도로 90%가 침몰했다. 10시 24분까지 청와대는 오로지 현장 영상자료만을 요구했고, 인원 파악 등 숫자가 틀리다는 등 대통령 보고용 자료의 부족함에 대한 호통으로 일관했다. 10시 30분, 배가 거의 침몰하기 직전에 대통령의 메시지가 현장에 전달 됐다. “단 한명도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

“회의실에 계십니까? VIP 메시지 전해드릴 테니까. 빨리 전해주세요. 첫째, 그 단 한 명도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 그냥 적어! 그 다음에 여객선 내에 객실, 엔진실 등을 포함해서 철저히 확인해 가지고 누락되는 인원이 없도록 하라. 자, 그 두 가지를 말씀하셨으니까 일단 청장님한테 메모로 넣어드리고. 업데이트 추가된 거 있어요. 아, 왜 자꾸 인원이 틀려? 거 지시해 가지고 가는 대로 영상 바로 띄우라고 하세요. 그것부터 하라고 하세요. 다른 거 하지 말고...” (p176~177, p320~321 중복 언급, 해경의 단순 대답 생략한 청와대 메시지)

일부 해경은 다급한 상황에서도 어린 학생들을 존중하지 않았고, 뚱뚱하다는 신체적 약점까지 지적하는 욕설을 퍼부었으며, 그러한 해경 지도부를 향한 청와대 관계자의 고압적인 태도는 명확했고, VIP 보고 한 줄 추가를 위해 영상중계를 우선시할 것을 6번이나 반복적으로 촉구하며 구조 활동을 방해했다. 사고의 총 책임을 최초 출동하여 허둥지둥한 123정의 말단 지휘관 김경일에게 덮어씌우고, 그가 퇴직급여를 제대로 수령할 수 있도록 솜방망이 처벌(징역 3년 및 강등)을 한 것은 따뜻한 의리라고 봐야할까? 김경일의 노트북에서 나온 ‘최선을 다한 당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 힘들어도 ‘잘 견디라는 격려와 변호사 선임비를 대겠다.’는 등 해경의 조직적 모의 정황은 헛웃음만 나온다. 며칠 뒤 대통령은 고심 끝에 `해경 해체` 결정을 발표하며 눈물을 흘렸다.

역설적으로 이 책은 각자도생 대한민국 시민들을 위한 가장 현실적인 안전교과서다. 정부나 기업의 관계자들이 사건 사고 시 시민의 안전과 재산을 책임지는 태도에 관해 꾸밈없이 보여주는 실체형교과서다. 반면교사에 관한 정석을 제공하여 정부나 기업이 배포하는 공식 매뉴얼만 믿었다가는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확실한 경고문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시민이라면 반드시 읽어둬야 할 분노의 필독서로 추천하고 싶다. 거시적으로는 분식회계와 정경유착의 살아있는 교본이고, 작은 매점의 현금매출 누락으로부터 시작하여 회사 돈을 빼 돌리는 수많은 노하우, 금융권을 농락하거나 정관계 인사를 주무르는 방법, 뒷거래의 정석 등이 섬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법정에서 검사와 판사의 예상 질문에 적절하게 반응하고 빠져나가는 기술과 재판에 임하는 자세까지 빠짐없이 정리된 최고의 경제·경영·법무 실생활 처세술의 클래식이 될만한 책이다. 이 책의 기록이 재판 과정에 제대로 반영되었더라면 범죄자들의 형량은 더욱 늘었을 것이란 확신이 들만큼 기록은 무책임한 공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선원들마저 평소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험한 배라고 부르던 세월호, 잦은 사고를 내고도 제재를 전혀 받지 않은 청해진해운이었다. 선장과 선원을 구한 뒤 해경 123정이 보여준 소극적인 구조 활동은 세월호 참사의 온갖 의혹과 음모론의 근원이 됐다. 호형호제하는 경찰간부로부터 제보를 받고 특종을 잡고서도 오보를 남발한 YTN 기자도, 조작된 인터뷰를 공모한 SBS 기자도 적나라한 언론의 실상을 보여줘서 고마웠다. 12년 전 같은 날 같은 시각 그러니까 2002년 4월 16일 아침에 제주 방파제를 박아버린 청해진해운의 사고선박 선장도 세월호의 이준석이었다. 앞뒤로 낱낱이 추적한 이 기록물 속에서 하인리히 법칙은 무색하기만 했다.

이 험한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책이 모든 답을 주지는 않지만 희망이 무엇인지 그 방향만큼은 확실히 알려준다. 세월호 참사 2주기를 앞두고 희생자의 고통을 읽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읽고, 국가가 외면한 진실을 찾아 헌신했던 사람들을 읽었다. 그들은 사고 당일 고아가 된 다섯 살 권 모양이 자신을 구해주고 떠난 언니 오빠들과 같은 17살이 되는 10년 후에 읽어도 부끄럽지 않은 기록물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이것은 미완성의 기록이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읽기를 통해 보다 깊은 진실에 다가가는 실천적 연대의 길을 제안한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며 입장의 동일함을 강조하시던 쇠귀 선생님 말씀이 생각나는 밤이다. 분노로 가득 찰 수 있는 소재를 따뜻한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잘 기록한 희망의 책이라서 읽고 또 읽었다.

안중찬 ahn0312@gmail.com 장거리 출퇴근길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관련 11권의 전문 서적을 집필하고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이나 다양한 분야 여러 직업을 경험하면서 삶에 대한 애정과 추억이 많아 세상이 여전히 따뜻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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