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그로브 인텔 전 최고경영자(CEO)가 21일(현지시간) 79세의 나이로 타계했다고 주요 외신이 일제히 보도했다.

그로브(1936~2016)의 사망 원인은 발표되지 않았으나 수 년간 앓아온 파킨슨병이 원인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그는 인텔에 재직하던 37년간 인텔을 세계최고의 반도체 회사로 키워낸 인물이다. 그는 세계 1위 반도체 업체 인텔을 키우면서 변덕스러웠지만 동시에 비전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1970년대에 일본 반도체 업체들이 메모리칩 공세를 해 오자 회사가 기울어지는 상황에 도박과도 같은 결단을 내리면서 개인용컴퓨터(PC)용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으로 주력칩을 바꾸며 회사의 체질개선을 이끌어 냈다. 이는 이후 극적인 성공을 가져오면서 인텔을 부동의 세계 1위 반도체 회사로 끌어올렸다.

■나찌 치하에서 20달러들고 미국행...4억불 자산 아메리칸 드림에 실리콘밸리 신화 쓴 IT거목

헝가리 국적의 유대인 출신인 앤디 그로브는 나찌와 소련 공산독재라는 역경을 극복하고 미국으로 망명해 실리콘밸리의 신화를 만들고, 동시에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

그가 미국에 망명했을 때 그의 수중엔 단돈 20달러 밖에 없었고 영어도 서툴렀다. 하지만 20여년 뒤 그는 세계 최대 반도체 업체 인텔을 이끄는 사장직에 올랐다. 그는 37년간 인텔의 핵심인물로 회사를 이끌었다.

그는 1936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을 부모로 두고 태어났다. 나찌에 의한 홀로코스트와 소련의 지원을 받는 헝가리 공산당 독재를 거치며 힘겨운 성장기를 보냈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먼저 그를 괴롭힌 것은 4살 무렵 앓았던 성홍열이다. 이 때문에 그는 청력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는 제목의 앤디그로브 저서. 그는 1997년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에 선정됐다.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는 제목의 앤디그로브 저서. 그는 1997년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에 선정됐다.

1942년부터는 2차 세계대전이 그로브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그로브의 아버지가 헝가리 군대에 징집된 후 가족과의 연락이 끊겼다. 1944년에는 나치가 헝가리를 점령했고, 어린 그로브는 유대인을 상징하는 ‘다윗의 별’을 달고 다녀야 했다. 나치가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보내기 시작하자 그로브의 가족은 수용소행을 피하기 위해 부다페스트를 떠나 숨어 지냈다.

2차대전이 끝난 뒤 포로 수용소에 갇혀있던 아버지가 돌아와 안정되는 듯 했지만 이번에는 공산정권이 이들을 괴롭혔다. 그로브의 삼촌은 신문편집자라는 이유로 체포됐고 아버지는 해고당했다.

동유럽에 반공, 반소련 정서가 확대되던 1956년, 헝가리에서 대규모 반소련 시위가 일어났고 소련 군대는 헝가리 시민들을 학살했다. 이 무렵 그로브는 가족들과 헤어져 홀로 헝가리 국경을 넘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 때 그의 수중에 있는 돈은 20달러가 전부였다.

하지만 미국 망명 후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했고 세계최고의 반도체 회사 인텔을 이끈 입지전적인 인물이 됐다. 포브스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4억달러(약 4800억원)에 이른다.

■과감히 메모리사업 철수 결단...PC 마이크로프로세서로 전성기 열다

미국의 비싼 학비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던 그로브는 학비가 전액 무료인 뉴욕시립대학교에서 입학 화공학을 공부했다. 이후 버클리대에서 화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1963년 반도체 회사 페어차일드에 입사했다.

입사 초기, 페어차일드 직원들이 반도체 개발을 위한 수식 계산에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그로브는 프로그래밍 언어 포트란을 이용한 수식 계산 프로그램을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면서 문제해결 능력을 과시했다.

고든 무어와 로버트 노이스는 1968년 인텔을 창업하면서 과거 페어차일드 동료 그로브를 합류시켰다. 그는 1979년 인텔 사장, 1987년에는 인텔 CEO, 1997년 인텔 회장에 올랐다. 그가 인텔의 지휘봉을 잡은 이 기간은 인텔의 최전성기였다. 1998년 인텔 CEO에서 물러났지만, 2005년까지 인텔 회장으로 일했다.

그로브의 최대 업적은 그가 사장이었던 1980년대 중반 회사의 주력 사업을 컴퓨터용 메모리칩에서 마이크로프로세서로 전환시켜 회사를 극적으로 회생시킨 일이었다.

인텔은 반도체업체 최초로 1102 메모리칩을 만들어 초기 메모리 산업을 장악했다. 하지만 미국반도체업계에 로열티를 내고 기술을 갈고 닦은 일본의 NEC,도시바,히타치 같은 회사들에 대적할 수 없었다. 1985년 초에 30달러였던 256KB 메모리 가격은 몇 달새 3달러까지 떨어지면서 인텔은 1억달러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이듬해 미일 반도체 전쟁까지 벌어지고 일본 메모리에 30%의 고관세를 매겼지만 여파는 가시지 않았다.

인텔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 인텔 4004. 사진=위키피디아
인텔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 인텔 4004. 사진=위키피디아

메모리 사업 쇠퇴로 고민하던 앤디 그로브는 그의 책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는 책에서 그당시를 상세히 적어놓고 있다.

그는 당시 CEO이자 동료인 고든 무어를 찾아가 “주주들이 우리를 내쫓고 새로운 경영진을 내세운다면 그들이 무엇을 할까?”라고 물었다. 무어가 “메모리 사업에서 철수하겠지”라 답하자 그로브는 “그럼 메모리 사업을 끝냅시다”고 말하고 즉각 마이크로프로세서 사업으로 눈을 돌렸다. 인텔은 1971년 11월 15일 세계최초로 상업용 프로세서 인텔 4004를 만들었지만 그때까지도 메인프레임용 메모리반도체에 주력하고 있었다.

인텔은 그의 이같은 결단에 따라 메모리공장을 폐쇄하고 8천명이 넘는 직원을 해고하는 대대적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그의 결정은 개인용 컴퓨터(PC) 보급이 늘어나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인텔을 컴퓨터칩 업체의 독점적 지배자로 만들었다. 인텔은 1990년대에 매년 30% 이상의 매출 성장을 기록했다. PC용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 점유율은 80% 이상을 차지했다.

물론 그에게도 고비는 있었다.

전투적이고 징벌적인 성격을 가진 그는 인텔 사상 최고의 실수중 하나를 기록한 CEO로도 기록된다.

1994년 인텔의 주력 마이크로프로세서 펜티엄칩이 소수점 아홉번째 자리에서 수식계산 오류를 보인다는 지적을 무시했다가 언론의 지적과 함께 소비자들의 질타가 이어지면서 뒤늦게 이를 회수하면서 수억달러의 비용 손실을 본 사례가 그것이다.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인텔 특유의 평등 문화 만들어

앤디 그로브는 인텔 내부에 ‘평등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임원들은 개인 사무실을 받는 대신, 일반 직원들과 똑같은 크기의 한칸짜리 공간과 책상에서 일했다. 본인이 CEO였지만 임원 전용 주차장을 만들지 않았다. 그로브 본인이 늦게 출근할 때엔 빈 주차 공간을 찾아 회사 주변을 빙빙 돌아야 했다는 내용역시 그의 책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에 소개된 유명한 일화다.

그가 평등을 강조한 것은 지위에서 오는 권력이 직원들의 창의력을 가로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부딪히면서 길을 찾아나가야 하는데, 직원들이 상급자의 지위를 의식하면 제대로 된 논쟁이 불가능하다고 봤다. 그는 임원들의 특혜를 없애면서 직원과 임원들 간의 심리적 격차를 좁혔고,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인텔에 평등 문화를 확산시킨 그로브였지만, 그는 직원들에 대한 통제와 징벌적 성격으로도 악명높았다.

3인의 인텔 창업자. 왼쪽부터 앤디 그로브, 밥노이스, 고든 무어. 사진=인텔
3인의 인텔 창업자. 왼쪽부터 앤디 그로브, 밥노이스, 고든 무어. 사진=인텔

출근시간인 아침 8시보다 늦게 출근하는 사람들은 지각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고 특별관리 대상이 됐다. 회사 내에서 직원들끼리의 잡담도 금지됐고, 근무시간에는 라디오나 음악도 들을 수 없었다.

그로브는 직원들의 작업계획표를 일일이 체크했다. 정해진 일정대로 개발이 진행되지 않는 경우에는 어김없이 질책하는 무서운 상관이었다. 수시로 직원들의 책상을 점검해 자리 정돈이 돼 있지 않은 직원에게는 직접 주의를 주기도 했다.

당시 자유로운 근무 분위기를 자랑하던 실리콘밸리에서 그로브의 방식에 불만을 품는 직원들도 많았지만, 그로브는 끝까지 자신의 방식을 고집했다. 직원들은 회사내에 먼지하나 허용하지 않았던 그의 태도를 빗대 그로브를 ‘미스터 클린’이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깨끗한 환경을 유지하는 반도체 시설을 유지해야 하는 사업의 성격과도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초창기만 해도 반도체 납품시 이같은 손때나 반도체 관리부실로 납품 제품이 불량으로 나타난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엄격함은 그로브의 철학에서 나왔다. 그로브는 자신의 저서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에서 “성공은 만족을 낳고, 만족은 실패를 낳는다. 과거와 현재의 성공에 안주하는 순간, 미래의 생존 근거를 잃게 된다. 항상 긴장하는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계산시 소수점 아래 아홉번째 자리 수 오류를 보인 펜티엄칩. 초기에는 계산이상 확률이 90억분이 1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대처하던 앤디 그로브는 이로 인해 수억달러의 비용을 들여 칩을 교환해 줘야 했다. 사진=위키미디아
계산시 소수점 아래 아홉번째 자리 수 오류를 보인 펜티엄칩. 초기에는 계산이상 확률이 90억분이 1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대처하던 앤디 그로브는 이로 인해 수억달러의 비용을 들여 칩을 교환해 줘야 했다. 사진=위키미디아

■말년엔 전립선암, 파킨슨병과 싸움...실리콘밸리 인사들 잇단 추모 메시지

그로브는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병마에 시달렸다. 1995년에 전립선암 판정을 받았지만 극복해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이어 지난 2000년에는 파킨슨병이 찾아왔다. 진단을 받았다. 이후 그로브는 파킨슨병 연구를 위해 3천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브라이언 크루자니크 인텔 CEO는 “앤디는 불가능한 일이 이뤄지게 한 인물이다. 또한 수세대에 걸쳐 기술자,사업가, 비즈니스 리더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실리콘밸리 인사들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 추모도 줄을 이었다.

앤디 그로브와 함께 화려한 30년 윈텔 전성 시대를 누렸던 빌 게이츠 MS창업자도 트위터에 “앤디 그로브의 타계는 유감이다. 나는 그와 일하는 것을 사랑했다. 그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비즈니스 리더 중 한 사람이다”라며 고인을 추모했다.

팀 쿡 애플 CEO는 “앤디 그로브는 IT업게의 거인 중 한명이다. 그는 미국을 사랑했고 미국이 최고라고 요약했다. 영면하소서”라는 트윗을 남겼다.

1980년대말 그와 함께 학생들에게 경영수업을 했던 로버트 버겔만 스탠포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그에 대해 “내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또 “그로브의 기술적, 전략적 능력은 인텔을 만들고 아시아의 경쟁자(일본 메모리반도체 업계)들을 피해가는 데 꼭필요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재구 기자 (jklee@next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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