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3월 17일, 미국 뱅가드 1호 발사 성공

■발사대의 참화, 여지없이 무너진 미국의 자존심

“오, 하느님...”

1957년 12월 6일 오후 12시 44분(16:44:34 UTC) 미국 케이프커내버럴 LC-18A발사대. 뱅가드TV3(Test Vehicle3)의 발사 장면을 지켜보던 미국인들은 경악했다.

TV화면은 미국최초의 인공위성 로켓이 발사대에서 화염을 뿜으며 발사된 지 2초 만에 1.2미터 정도 솟구치는 듯 싶다가 폭발해 내동댕이쳐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두 달 전인 10월 4일, 그리고 11월 3일 두차례나 발사에 성공한 소련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1호(83.5kg),2호(500kg)에 이어 자신있게 나섰지만 허망하게 사그러든 순간이었다.

그나마 1.36kg짜리 인공위성을 싣고 발사되는 로켓이었음에도 미국에게 우주로켓 발사 성공은 호락호락하게 주어지지 않았다.

소련역시 이같은 실패를 여러차례 겪었지만 지켜보는 일반 미국인들은 이를 알 리가 없었다.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소련의 스푸트니크가 발사되기 전인 1955년 7월 언론담당비서를 통해 “미국은 국제지구물리관측년(IGY) 참여의 일환으로 지구궤도를 도는 작은 무인 인공위성을 발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이 될 뻔한 뱅가드 TV3 발사 모습. 케이프커내버럴 발사대에서 발사 2초만에 그대로 폭발해 버리면서 전세계의 조롱거리가 됐다. 사진=나사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이 될 뻔한 뱅가드 TV3 발사 모습. 케이프커내버럴 발사대에서 발사 2초만에 그대로 폭발해 버리면서 전세계의 조롱거리가 됐다. 사진=나사

미국최초의 인공위성이 될 뱅가드1A가 주인공이었다. 이 위성은 3단 로켓으로 발사되며 로켓 발사능력 테스트는 물론 지구궤도 환경이 위성과 그 시스템에 미치는 영향 등을 연구하도록 만들어진 지름 152mm짜리 알루미늄제 원형 위성이었다. 10밀리와트 108-MHz급 전송기 2개가 장착돼 있었다. 또한 궤도분석을 통한 지구측량 결과를 얻기 위한 장비도 들어가 있었다. 벨연구소가 만든 6개의 태양전지가 따라 붙었다. 테이터는 6개의 작은 안테나를 통해 원격전송하도록 돼 있었다.

발사 석달 전인 9월 미국방부가 해군에 "미션을 수행하라"는 서한을 보내면서 시작된 뱅가드프로젝트의 첫 꿈은 이처럼 허무하게 날아갔다. 인류 최초 인공위성 발사의 영광을 소련에게 내준 초강대국 미국의 체면을 또다시 여지없이 구겨버렸다.

외신들은 발사에 실패한 뱅가드TV3를 ‘스푸트니크(Sputnik)’의 발음에 접두사를 붙여 ‘플롭트니크(Flop-nik,주저앉은-)’ ‘카푸트니크(Kap-utnik,잡힌-)’ ’웁스니크(Oops-nik,이런-)‘ ’스테이푸트니크(Stay-putnik,머물러있는-)’ 등으로 부르며 조롱했다.

사고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낮은 연료탱크압력으로 인해 점화시 갑작스레 압력이 급증해 엔진균열을 가져온 때문으로 파악됐다.

■익스플로러1호가 미국의 체면을 살리다

뱅가드TV3 발사 실패 이듬 해인 1958년 1월 31일. 미국은 육군유도미사일청(ABMA) 주도로 준비돼 온 익스플로러 1호 발사 성공으로 간신히 국제적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성공은 미국인들을 환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속사정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미국 익스플로러 발사 성공의 주역은 나찌의 V-2로켓 개발자인 폰 브라운 박사였다. 그는 1945년 2차대전 종전 직전 미군에 투항해 망명한 이래 10여년 간 헌츠빌 소재 육군로켓연구반에서 묵묵히 로켓 개발과 우주기술 관련 책을 쓰면서 때를 기다려 왔다.

미국 해군연구소 과학자들이 뱅가드로켓 노즈콘에 뱅가드1호 위성을 장착하고 있다. 사진=나사
미국 해군연구소 과학자들이 뱅가드로켓 노즈콘에 뱅가드1호 위성을 장착하고 있다. 사진=나사

그러던 1955년 9월 미 국방부는 브라운이 배속돼 있던 육군의 오비터(Orbiter) 계획을 폐기하고 더이상 인공위성개발에 손대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해군연구소(NRL) 중심으로 미국의 운명을 건 우주개발을 주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육군과 브라운박사는 연구중이던 다단계 레드스톤 로켓을 포기하지 않고 남겨 놓았다.

스푸트니크2호가 발사되자 더욱더 소련과의 우주경쟁 기술 격차에 대해 위협을 느낀 미국정부는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브라운 박사와 그의 육군 로켓연구반은 이미 2년 전부터 초조하게 고대하던 명령을 받았다.

“되도록 빨리 위성을 궤도에 올려 놓기 바랍니다.”

닐 매켈로이 미국방장관은 이같이 지시했고 브라운박사팀은 90일 이내에 그 일을 해내겠다고 약속했다. 이들이 주노1 로켓으로 익스플로러1호 위성 발사에 성공한 것은 그로부터 84일 만이었다.

익스플로러1호는 밴알렌대로 알려진 대형 방사선대가 지구주변에 있다는 것을 발견해 국제지구물리관측년의 주요한 과학적 성과를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해군주도의 뱅가드 절치부심, 성공을 이끌다

하지만 그 훨씬 이전부터 준비해 왔던 해군연구소(NRL)팀의 미국 과학자들에게 익스플로러1호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이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이 만든 로켓으로 지구궤도에 인공위성을 띄워 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뱅가드TV3 사고 4개월 만인 1958년 3월 17일. 케이프 커내버럴 LC-18A발사대에서 긴장속의 카운트다운이 진행되고있었다.

“...10,9,8,7,6,5,4,3,2,1,0. 발사”

1958년 3월 17일 미국이 뱅가드호 발사에 성공하는 모습. 사진=나사
1958년 3월 17일 미국이 뱅가드호 발사에 성공하는 모습. 사진=나사

높이 23미터, 지름 1.14미터, 질량 1만50kg인 뱅가드1호 3단 로켓의 발사는 무사히 발사대를 박차고 나갔다. 발사는 성공이었다. 노즈콘 아래에는 무게 1.47kg, 지름 152mm인 뱅가드 1호 인공위성이 실렸다. 여기에는 7개의 수은 전지, 2개의 추적용 전송기,온도감지 크리스탈 등이 들어 있었다. 스푸트니크와 달리 태양전지가 사용된 최초의 인공위성이었다.

니키타 후루시초프 소련수상은 스푸트니크보다 형편없이 작은 이 위성을 빗대어 ‘포도송이 위성(The grape fruit satellite)’이라고 조롱했다.

하지만 뱅가드1호가 보내온 데이터는 지구의 모습이 북극은 튀어 나오고 남극은 평평해 서양배를 닮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려 주었다. 또한 지구의 크기, 공기밀도, 온도, 소형운석의 영향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며 과학계에 공헌했다.

뱅가드1호 발사 6년 만인 1964년 이 인공위성에 장착된 태양광으로 작동하는 소리 기능은 더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푸트니크1호, 스푸트니크2호, 그리고 익스플로러1호가 모두 추락한 오늘날까지도 뱅가드1호는 여전히 지구궤도를 돌고 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당초보다는 크게 줄었지만 이 위성이 최소 240년 간 너끈히 지구를 돌게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뱅가드1호 인공위성이 발사 50주년을 맞이한 지난 2008년 3월 17일 이 위성은 지구를 19만6천990회 이상 돌았다.

이재구 기자 (jklee@next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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